차근욱의 'Radio Bebop'(23) - 얼뚱이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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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23) - 얼뚱이를 추억하며
  • 차근욱
  • 승인 2014.12.17 1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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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얼마 전에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 이구아나가 든 유리상자 안고 버스를 기다리는 여학생을 보았다. 고등학교 3학년이나 대학교 1학년 정도가 되어 보이는 아가씨였기에 여학생이라고는 했지만, 직장인일지도 모른다.

혹시 그 날, 이구아나가 든 유리상자를 들고 버스를 기다렸던 기억이 있으신 분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틀렸다고 하더라도 너그러이 넘어가 주시길.

애완용으로 파충류나 거미 등을 기른다는 이야기를 들어는 봤지만, 실제로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인지라 실은 굉장히 신기했다. 마음 같아선 여학생의 곁으로 가까이 다가가 그 이구아나를 자세히 관찰해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Snow White같은 여학생에게 경악과 공포의 트라우마를 남겨서야 쓰나. 그래서 그냥 짐짓 관심이 없는 척을 하면서 멀리서 슬금 슬금 구경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 덩치 큰 파충류에겐 예쁜 구석을 하나도 찾을 수 없었기에, 그 소녀와 처녀의 중간계에 위치한 여학생이 그 이구아나를 얼마나 예뻐하고 사랑하는지 짐작 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좁은 유리상자에 갇혀있는 이구아나 쪽도 실은 좀 답답해 보였기에 그다지 행복해 보이지는 않았고.

그런데, 어디선가 아저씨가 되기 15분 전 쯤으로 보이는 수염 까실한 한 사내가 나타나 갑자기 여학생에게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그 상황을 보면서, 저렇게 낮선 아저씨가 갑자기 친한 척을 하면 그 여학생이 무서워 할 텐데... 라는 우려가 좀 있었지만, 나의 처음 걱정은 기우였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오래 알던 사람들처럼 신나서 이구아나에 대해서 묻고 답하는 것이 아닌가! 과연 그렇군. 역시 이구아나를 기르는 여학생이란 이처럼 대범하고 대담한 것인가 하며 새삼 감탄하는 순간이었는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여학생의 말이었다.

“집에서는 그냥 풀어놔서 얘가 최대한 편하게 해 주어요. 같이 사는 거죠 뭐.”

뭐?! 이구아나를 그냥 집에서 풀어놓고 지낸다고?! 완전 free하게?!!

순간 나는 그 여학생을 다시 쳐다보게 되었다. 왠지 아마존에 가도 잘 적응할 것 같은 여 전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여학생의 얼굴에선 그야말로 환한 광체가 났는데, 남들과는 다른 개성의 자부심으로 인한 빛이었다. 나는 순간, 문득 예전의 한 친구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여자 친구를 구하던 나의 친구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집에서 족제비를 기르기 시작했다. 족제비는 사실 그다지 지능이 높지 않은 탓에 주인이고 뭐고 없다. 그냥 생존본능이 있을 뿐이지.

이런 본능에 충실한 족제비는 나의 친구에게 입양된 이후로 친구의 집이 자신의 집이 되어 아무데나 쉬아와 기타 등등으로 실례를 해, 친구의 집은 언제부턴가 동물원의 공기, 바로 그것이 되어 버렸다. 족제비의 누린내와 친구의 담배 내음으로 첨철된, 흡연자의 스위트 홈. 개인적으로는 정말 다시 찾고 싶지 않은 이런 남 무섭지 않은 환경에서도 나의 친구는 행복하게 지내고 있는 듯 했다.

이처럼 새 가족을 입양한 나의 친구는 족제비를 애지중지 하면서 어디를 가든지 소중하게 데리고 다녔는데, 그 친구가 그렇게 동물 애호가인줄 난 미처 몰랐었다. 물론, 심성은 원래 고운 친구였지만.

여튼, 그 친구는 극장에 친구들끼리 영화를 보러 갈 때에도 꼭 족제비를 데리고 갔고, 외출을 할 때면 하여간 반드시 함께 했다. 그런 지극정성이 갸륵해서 ‘족제비가 그렇게 좋느냐’, 라고 물었더니 친구의 말이, 왠지 애완동물 가게에서 그 녀석을 본 이후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단다.

으흠, 과연. 이것이 바로 인연이고 교감이란 것인가. 하며 감탄하고 있었는데, 친구는 씨익 웃으면서 그 다음의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얘가 있으면 어디에서든 아가씨들이 말을 걸어와.”

“오!~오!~오!” 과연 그런 것인가! 아직까지 살면서 단 한 번도 아가씨들이 먼저 말을 걸어왔던 적이 없던 친구들은 그 말을 듣고 모두가 합창을 했다. 그렇다. 그 친구는 천재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때, 그 친구의 얼굴에서도 환한 빛이 났었던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강아지나 고양이 등의 애완동물들을 그다지 가까이 하지 않는다. 성격이 나빠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만, 언제부터인가 피부 발진이나 안구이상 등의 증상이 신체에서 일어나는 경우가 간혹 있어 그런 일들을 겪게 된 뒤로는, 강아지나 고양이를 보게 되면 조심 조심 내가 먼저 피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나도 집에서 애완동물을 길렀던 소년 시절이 있었다. 물론, 내가 아니라 우리 가족이 기른 경우였지만.

어머님께서 뜰에 화초를 심는 것을 좋아 하셨어서, 나는 마당이 있는 집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냈었는데, 그 때 우리 집 마당에는 어머님이 친구 분들로부터 선물 받으셔서 함께 살게 된 무려 3씩이나 되는 멍멍이가 있었다. 잡종 세 자매랄까. 마당 있는 집 기념 선물. 물론, 3친구 모두 ‘잡종’ 그 자체였지만.

모든 ‘잡종’이 그런지는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집에서 기르던 셋은, 정말 주인과 교감하는 강아지는 어떤 느낌인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머리가 나빴다. 팔뚝만한 크기의 흔한 황구인 ‘가람이’와, 시커먼 털 뭉치같은 오골견 ‘얼뚱이’. 그리고 황소만한 크기의 진돗개 잡종 ‘춘복이’. 모두가 머리는 나빴지만, 사이좋게 다들 잘 지냈다. 주인만 못 알아 봤을 뿐이지.

가람이는 좀 새침했고, 얼뚱이는 사고뭉치였다. 그리고 춘복이는 엄청난 겁쟁이. 덩치는 사람만 한데, 겁이 너무 많아 집 밖에 데리고 나가 산책을 시키려고 하면 죽어도 나가지 않으려고 하는 진돗개 잡종. 뭔가 다들 범상치 않은 개성이 있는 아가씨들이었는데, 아무도 집은 지키지 않았다. 단지 많이 먹을 뿐이었지.

‘춘복이’의 경우에는 이름이 여러 개였다. 그 이유인즉슨 이렇다. 처음에 진돗개의 혈통이라고 어머님이 어린 춘복이를 데리고 오셨을 때에는 온 가족이 부푼 기대를 했었다. 그래서 그 이름을 무엇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 다들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었는데, 내가 주장한 이름은 ‘춘복이’였다.

그리고 아버님께서 내리신 이름은 ‘똘똘이’, 어머님께서는 ‘토순이’. 수 없이 많은 회의와 협상을 거쳤지만, 그래도 결국 춘복이의 이름을 결정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도저히 결정이 나질 않았던 거다. 그래서 결국 온 가족의 동의하에, 각자 부르고 싶은 대로 부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춘복이’.

예를 들어서 가족의 대화는 이렇다. 어머님께서 “토순이 밥 줬어?”라고 하시면, 내가 “춘복이 밥 다 먹었는데요.” 그리고 나면 아버님께서 “똘똘이 산책도 좀 시켜 줘.”라고 하시는 식.

그래도 신기한 것은 춘복이가 자신을 부르면 늘 쳐다봤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치면 분명 나쁜 머리는 아닌 것 같은데,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 외에는 전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반응이 아예 없다고나 할까.

셋 중 가장 먼저 떠난 것은 얼뚱이였다. 12월의 어느 날, 아침에 나가 보니 옅은 눈발 사이로 얼뚱이가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구박도 많이 하고 혼내기도 많이 했었지만, 전날까지 잘 놀다가 전조도 없이 막상 떠나버리니, 갑자기 가슴이 저리면서 먹먹해졌다.

그래서 직접 얼뚱이의 빈 몸을 안고 가서 뒷산에 묻어 주었다. 물론, 옛날 일이니 이제 와서 법 위반을 따지시면 반칙. 게다가 지금은 특히 슬픈 대목이니까.

산 속, 볕 좋고 공기 좋은 곳에 멈췄다. 이만하면... 얼뚱이가 쉬어도 되겠다 싶었다. 나는 땅을 깊게 파 내었고, 이윽코 얼뚱이를 안치시킨 후 그 위로 흙을 덮어 단단하게 다졌다. 일이 다 끝나고는 잠시 그 곁에 바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공기는 시리게 맑았고 가벼운 서리가 끼어 있었다. “고마워. 그동안 참 고마웠어. 잘 가. 안녕.” 바위에서 일어서면서 마지막으로 얼뚱이에게 인사를 했다. ‘그동안 참 고마웠다’, 라는 말이 그렇게 가슴저리고 아픈 말인 줄은, 그 때 처음 알았다.

자연사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얼뚱이를 묻어주고 오는 발걸음은 참 헛헛했다. 마음도 어딘가 뻥 뚫린 것 같았고. 사고뭉치이긴 했어도 천진난만하기는 얼뚱이를 따라올 친구가 없었으니까. 싸움도 잘했고, 먹기도 잘했고.

그 이후로 가람이와 춘복이도 왠지 기운도 없어졌고 집 안이 전체적으로 가라앉는 것만 같았고, 그러던 중 결국 어머님께서는 가람이와 춘복이를 입양 보내셨다. 아마 다시 그렇게 어느날 아침을 맞이하면서 보내는 것이 감당하기 어려워 그러셨으려니 했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정답게 말을 나누는 여학생과 아가씨와 이구아나를 보면서 문득 나는 친구와 얼뚱이의 생각이 났다. 물론, 그 여학생의 의도는 내 친구와 달랐겠지만.

12월이 오면 얼뚱이의 생각이 가끔 나곤 한다. 돌아보면 그 시절에는 온 가족이 모여 살았고, 저녁에 함께 식탁을 마주하며 뉴스를 보던 행복한 시절이었다. 땅거미가 지면 셋을 이끌고 산책을 가기도 했고 얼뚱이를 앉혀놓고 책을 읽어주기도 했었다. 그럼 얼뚱이는 느긋하게 앞 발에 턱을 괴곤 내 이야기를 듣곤 했다. 지긋이 다른 곳을 응시하면서.

어쩌면 얼뚱이는 내게 그 행복하던 소년시절의 상징일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함께하던 그 시절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지만, 늘 추억하고 그리워하게 되는 노스텔지어처럼.

그런데, 얼뚱이는 이름이 왜 얼뚱이냐고? 얼뚱이의 이름은 국어사전을 보고 지었다. 나름의 작명기준으로 품격과 전통을 고집할 때였으니까. 되도록 우리말을 중심으로 얼뚱이의 이름을 짓고 싶었거든. 궁금해? 그럼, 어디 한번 찾아보시라. 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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