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20)-Winter is com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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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20)-Winter is coming
  • 차근욱
  • 승인 2014.11.26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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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뭐, 나는 북부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스타크 가문도 아니지만 오늘의 제목은 Winter is coming. 요즘 날씨를 보면 시절은 ‘겨울’의 문턱임에도, 느낌은 이상하게 ‘봄’이다.

간혹 쬐는 따스한 햇살이나, 남쪽에서 불어오는 듯한 훈풍들이 그렇다고나 할까.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분들께서는 ‘네가 요즘 살만 한가 보구나!’라고 하실지 모르겠지만 요즘 나름 몸도 맘도 하드한 나날을 보냈다. 몸살도 좀 앓고 했을 정도였으니까.

자신의 일이 있고 기회가 주어진다는 점에서는 감사한 나날이지만, 세상이 아름답게만 보여서 ‘봄’이 생각나는 것은 아니란 말씀.

 
사실 가장 좋아하는 계절이 언제인가 하면, 나는 ‘겨울’이다. 가족들은 ‘넌 겨울 옷이 많아서 그래’라고도 하지만, 나는 겨울 옷이 많지도 않을 뿐더러 옷이 많다고 계절을 좋아하지는 않는다.

단지, 몸에 열이 많은 편이라 알싸하고도 청아한 겨울의 공기와 달콤따끈한 겨울의 커피가 좋을 뿐이다. 겨울만큼 따끈한 차 한잔이 맛있는 때도 없으니까.

더위를 심하게 타는 탓에, 매년 여름은 정말 힘들다.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은 연신 흘러 내려 살이 금방 짓무른다. 여름의 나는, 마치 거대한 고문의 터널을 지나가는 기분이다. 몸은 늘 따갑고 옷은 금방 눅눅해져 버린다.

뜨거운 공기로 숨이 막혀 머리가 멈춰버리는 느낌에 연신 에어컨 앞에 서지만, 결국 냉방병에 자유롭지는 못하다. 여름에는 늘 이렇게 고온고습한 나날에 시달려 몸이 고단하다. 한반도가 동남아 기후대로 재편되고 있다는 사실은 거의 악몽에 가깝다. 그러니 해가 지지 않는 기나긴 백야같은 여름 동안이 내내 곤혹스러울 밖에.

하지만 겨울은 다르다. 일단 땀이 나지 않고, 머리가 티미하지도 않다. 공기는 맑고 가만히 있을 때 지치지도 않는다. 요컨대 여름의 혹독함과는 거리가 먼, 겨울의 미덕이 있는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있기도 하고,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설레임이 있기도 하고. 물론, 나이를 한살 더 먹는다는 것은 그다지 반가운 일이 아니지만. 어쨌든,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겨울이 반갑다는 이야기.

하지만 겨울은 쓸쓸하다. 이제는 쓸쓸한 순간들에 익숙해져버린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그 쓸쓸함도 어찌보면 달콤하다. 마치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 마주하는 실연의 달콤함처럼. 조금은 따스한 겨울날, 볕이 잘 드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아이들이 노는 것을 바라보고 있는 순간의 아련함처럼. 그리고 나서 코트 깃을 올려 세우며 라면이나 먹으러 간다면 좀 깨긴 하겠지만.

그래서, 겨울의 쓸쓸함도 겨울이 아름다운 이유 중에 하나라면 하나다. 물론 겨울은 춥다. 몸에 한기가 들기도 하고, 손이 곱아지기도 한다. 솔찍히, 가난한 이들에게 겨울은 혹독하다.

연탄 한 장이 아쉽고 따끈한 밥 한 그릇이 서럽다. 노숙자에게 겨울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기도 하다. 그러니, 겨울은 온기의 따스함을 느낄 수 있어 좋다는 배부른 소리는 철없는 치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기에 봄을 더 간절히 바라고 삶에 대한 의지가 보다 강렬해지는 때가 바로 겨울일 지도 모른다. 고요한 가운데 스스로를 돌아보고 새로운 한 걸음을 고민할 수 있는 때가 겨울이기도 하다.

겨울은 사계의 가장 마지막에 위치하기에, 끝이자 시작을 떠오르게 한다. 봄이 살랑살랑 흩날리는 스커트 자락같은 풋풋함을 연상시킨다면, 겨울은 저녁 술자리의 흐드러진 웃음소리와 따끈한 국물의 편안함을 느끼게 한다. 송구영신의 아쉬움과 설레임, 이별과 만남. 그리고 캐롤과 보신각의 종소리.

눈이 내리면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떠오르는데, 새하얗게 펼쳐진 겨울의 들판에 무참한 사랑담이 너무나 잘 어울려 소름이 돋았다. 그리고 보니, 군대에 가기 전날 읽은 책도 ‘설국’이었다.

4월의 한가운데에서, 군입대를 앞두고 밤새 ‘설국’을 다시 읽었다. ‘설국’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선, 뿌옇게 터 오는 동을 보면서 어쩐지 나도 모르게 청춘의 한 장을 마감하는 의식을 치룬 기분이 들었다.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입영의 아침 해를 바라보며 혼자서 그렇게 중얼거렸던 기억이 난다. 군대에 간다고 술을 먹거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싫었다.

원래, 흥청망청 풀어져서 헤롱대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탓에 군대에 갈 때도 한 두명 정도 가볍게 식사를 같이 한 것이 전부였다. 술은 당연히 먹지 않았고 단지 조용하게 그간 고마웠다는 마음을 전했다.

군대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던 순간은 4월이었음에도 봄이라기보다는 왠지 겨울의 느낌이 이어지는 때 였어서, 조금은 두툼한 트레이닝 복을 입고 부모님께 ‘군대 다녀오겠습니다.’라며 현관에서 인사를 드린 후 지하철을 타러 갔다. 아버님께서는 ‘그래, 갔다와라.’라고 화답해 주셨다. 군대 간다며 절하고 울고 불고 하는 정서는 솔찍하게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고속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부대 근처에 도착하고 나니 기분이 묘했다. 겨울과 봄의 경계에 있다는 느낌이, 마치 내 인생의 미묘함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훈련소에 입소를 하는 시간을 따져보니 시간이 약간 남았다. 그래서 근처 재래시장 구경을 조금 하다 롯데리아를 발견하곤 제일 싼 ‘새우버거’를 주문했다. 신격호 회장님께는 죄송스러운 말이지만, 롯데리아 햄버거를 먹고 싶었다기 보다는 ‘아... 이것도 한동안은 못먹겠지?’하는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만약 그곳이 맥도날드였거나 버거킹이었다 하더라도 가장 싼 버거를 시켰을게다. 약간의 싸구려 기름냄새와 4월의 공기가 섞인 새우버거의 맛은, BGM으로 홀에 흘러 퍼지는 유행가 같았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무의미한.

훈련소 입구에 가보니 다들 야단법석이었는데, 훈련소까지 부모님이나 친구들 그리고 여자친구와 함께 온 사람들을 보니 낮설었다. 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하는 느낌이었달까. 고작 2년가량 군대를 다녀오는 것 뿐인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냥 좀 뻘쭘하게 있다가 입영대상자들을 부르는 방송에 쭈뼛쭈뼛 걸어나갔다. 울고 불며 손을 흔드는 남의 가족을 보고 있자니 내가 좀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과보호네. 하는 생각. 클라이막스는 입영자들을 모아놓고, ‘가족을 향해 경례!’라고 안내 방송에서 말하는 것이었는데, 손발이 오그라들어 좀 난감했다.

훈련소로 들어가고 나서는 대뜸 욕을 퍼부으면서 뛰라고 말하는 조교들을 보면서 피식 웃음이 났다. 고생들 하는구나, 싶었달까. 낮선 곳에서 낮선 시작을 앞두고, 아직은 겨울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있는 계절에 난 그렇게 군인이 되었다.

가벼운 흥분, 그리고 가벼운 떨림. 그것이 추위 탓이었는지 긴장 탓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왠지 겨울의 끝을, 그리고 내 소년시절의 끝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계절 상으로는 맞지 않을지 몰라도, 겨울의 끝에 대한 기억은 입영의 기억이다. 그리고 ‘설국’. ‘설국’은 ‘설국’이다. ‘눈나라’라는 번역은 설국의 느낌을 살리지 못했다.

얼마 전에 오랫동안 함께 해 왔던 나의 음파칫솔이 운명을 달리했다. 엊그제 산 것 같기만 해서 아직 함께 할 시간이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이 비데의 온열기능이 고장났고 블루투스 이어셋이 작동하지 않게 되었으며 냉장고의 냉기가 멈추었다.

전자제품이야 당연히 수명이 있을 것인데, 이상하게도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예고도 없고 전조도 없던, 갑작스런 이별처럼. 하지만, 그럴줄 알았다는 듯 당연하고도 담담한 이별처럼.

음파칫솔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던 날, 난 문득 칫솔을 들고 거울에 비추인 나의 모습을 바라 보았다. 귀 밑에 한 두 가닥, 새치가 있었다. 왠지 세월이 가고 나이가 든다는 현실을 깨닫고는 슬퍼졌다. 거울 속 서 있는 낮선 사내는 더 이상 군입대를 앞두고 설국을 펴던 내가 아니었다.

조금씩은 늙어가는, 그리고 조금은 세상에 지친. 이제는 음파칫솔을 보내주어야 하는 쓸쓸하고도 초라한 사내였다. 순간, 문득 ‘설국’의 첫 문장이 떠올랐다. ‘현 접경의 긴 터널을 빠져 나오니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시절은 겨울로 들어서는데, 가끔 봄 내음이 바람에 실려 올 때는 혼란스럽다. 이것이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다. 마치 시간은 가고 나는 남기에, 미라보 다리 위를 떠나지 못한채 우두커니 서 있는 이처럼.

가을 단풍 소식을 듣고, 이번에는 설악산 단풍을 꼭 놓치지 말아야지 라며 엘리자배스와 다짐을 했건만 어느덧 가을은 가고 다시 겨울이 온다. 사계의 끝이기에, 이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긴 터널을 빠져 나오면 설국이 있으리라는 설레임이 혼란스러운 이 바람을 봄으로 착각하게 만든다. 패티김 선생님의 ‘사랑은 영원히’를 들으며 마시는 근사한 커피 한잔이 그립다.

Winter is coming, 음파칫솔이여 안녕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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