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17) - Science Fi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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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17) - Science Fiction
  • 차근욱
  • 승인 2014.11.0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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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필립 K. 딕의 선집을 샀다. 사실 조금은 충동구매였어서 스트레스성 지르기 중 하나였다고 밖엔 생각되지 않지만, 그래도 사고 나니 조금은 뿌듯했다.

소설은 잘 사지 않는 편이기 때문에 이런 기회가 아니면 아마 필립 K. 딕의 선집을 갖게 될 일은 별로 없었을테니.

필립 K. 딕이 누구지? 싶은 분들을 위해서 이 분께서 누구신지 잠시 설명을 드리자면, ‘필립 K. 딕’은 SF소설가이다. SF계의 셰익스 피어라고도 불리운다. 그만큼의 문학성과 대중성을 고루 갖춘 작가라는 의미겠지. 대부분의 선구자들이 그렇듯, 필립 K. 딕도 생존하던 시절에는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하게도 궁핍하고도 초라한 나날을 보냈었다고 한다. 뭐... SF작가의 작품을 문학으로 인정받기란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SF소설을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치부하던 시절에 필립 K. 딕은 SF도 훌륭한 ‘문학’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 위대한 작가였다. 늘 그렇듯, 결국은 사람이 문제인 것이지 꼭 무언가 한계가 정해진 것은 아니니까.

필립 K. 딕이 무슨 소설을 썼길래? 싶으시지요? 후후후. 필립 K. 딕은 여러분이 잘 알고 계시는 영화, ‘브레이드 러너’라던가 ‘마이너리티 레포트’, ‘페이첵’, ‘토탈리콜’의 원저자이다.

탁월한 상상력과 문제의식으로, SF를 아동용 심심풀이에서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새로운 다른 창의 차원으로 끌어 올렸다. 우화를 통해 현실을 깨우치게 해 주는 현자처럼. 마치 만화는 유치하다는 편견을 깬 ‘고우영’선생님이나 ‘방학기’선생님처럼.

개인적으로 SF를 좋아하는 편이다. 하지만 리얼리티가 없는 SF는 싫다. 내가 좋아하는 SF는 삶과 존재에 대해, 자유로운 상상력 아래에서 인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보여주는 생생한 SF다.

마치 ‘더 로드’처럼. 코맥 맥카시의 작품은 코맥 맥카시의 작품일 뿐 SF라고 해서 그 주제의식이 달라지지는 않듯이, SF라고 해도 결국은 그 모든 것이 사람 사는 이야기니까.

‘미래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사실은 두근거린다. 나는 그 세상에서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지, 그 세상은 과연 행복할지에 대해서 생각하며 오늘을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SF에서는 미래세상이 장밋빛으로만 묘사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는 ‘매드맥스’가 이미지가 너무 강렬했어서 미래 세계가 조금은 두려웠고, 최근에는 ‘더 로드’덕분이었다. 코맥 맥카시의 신간이라고 해서 출간 날짜를 기다리다가 허겁지겁 사다 읽었던 ‘더 로드’의 이미지 역시, 가혹할만큼 리얼하고 처절했다.

‘문명의 붕괴’에서 이스터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숨죽여 읽었듯, ‘더 로드’의 세상 역시 숨 한번 크게 쉴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 했었다.

붕괴된 정부와 혹독한 환경에 처하게 된 사람들의 선택. 그리고 서로를 향한 생존게임. 대부분의 디스토피아적 미래가 그렇듯 ‘더 로드’의 세상도 그렇지만, 코맥 맥카시는 이러한 디스토피아를 흥미꺼리 정도로 다루지 않았다.

아노미 사회에서의 인간. 늘 그것이 주제이니까. 무엇 때문에 종말이 왔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그 이유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단지 인간은 그 종말적 미래 속에서 살아간다.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는 서로에게 가혹하다.

왜 살아남아야 하는지 스스로도 모른다. 하지만, 살아남기 위해 악착같다. 그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그 가혹함은 디스토피아적 미래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한 추악한 인간의 본모습은 우리가 매일 접하는 오늘이다. 그래서 더 오싹했는지도 모른다. 물론, 어떤 잔혹함도 ‘수용소’라는 특수한 현실의 공기를 따라갈 수는 없겠지만.

생각해 보면, SF를 좋아하는 것은 단순히 우주선이 나오거나 타임머신이 나와서는 아니다. 인간에 대해 탐구하게 되는 상황이 보다 극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물론, 현실의 지루함보다야 훨씬 더 흥미롭기도 하고. 결국 SF가 좋은 이유는 인간 그 자체 때문이 아닌가 싶다. 제한된 상황 속에서 보이는 인간의 선택과 행동들. 그리고 그 의미의 이해가 늘 진짜로 알고 싶은 것이니까.

돌아보면, 소설이든 영화든 매혹되어 버리는 대상은 SF 중에서도 ‘재난’에 대한 이야기이다. 인간군상에 대한 묘사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므로. 궁금하지 않나?

한정된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이 어떤 모습을 보일지, 그리고 ‘나’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에 대해. 그래서 SF이면서 재난 영화였던 ‘2012’가 개봉했을 때에도 만사를 제쳐두고 첫 회 관람을 하게 되었다. 도저히 그 궁금증을 참을 수가 없었거든. 뒷심이 조금 부족했다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지만.

생각해 보니, 영화 ‘설국열차’도 개봉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관람했었다. ‘설국열차’는 소재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극화로 접했을 때에도 빠져들고 말았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님의 ‘괴물’도 영화 ‘설국열차’를 기다리게 한 원인 중 하나였다. SF도 결국은 사람 사는 이야기이므로. 머리가 나빠서 결말이 좀 이해가 되지 않았던 점은 좀 안타깝지만.

정말 미래는 디스토피아일까? 인생이라는 그 존재 자체가 늘 불안한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아마 그렇지 않을까 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근거는 없다. 그냥 직감이다.

성장이 끝나고 자원이 고갈된다면, 그리고 환경이 지금처럼 계속 파괴되어 간다면 결국, 지금까지 이룩한 우리들의 사회와 도시는 한순간에 무너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을 지울 수가 없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접하는 맛있는 음식이나 편리함들을 보면서도 이게 오늘로 마지막일지도 몰라, 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러니 살이 찌지... 쯧쯧쯧...

아무리 기술이 발달한 미래가 온다고 해도, 우주여행은 하고 싶지 않다. 생각을 해 봐라. 우주여행이라는 것이 제한된 상황에서 제한된 수학적 계산 하에서 운영이 되는 것인데, 만약에 나사 하나 만큼의 잘못이 있다고 하면 결국엔 어마어마한 참사로 이어질테니.

나 같은 인간만 있어서는 인류의 발전을 도모할 수가 없겠지만, 여튼 그렇다. 우주여행은 억만금을 줘도 싫다. 방사능 가득한 우주에서 목숨을 건다니. 개인적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두꺼운 우주복을 입고 있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갑갑해 오는데다 온 몸이 간지러워진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우주선을 타고 외계의 행성을 탐험한다던가, 타임머신을 타고 역사를 여행한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뛴다. ‘생각만’이지만. 그러니 필립 K. 딕의 소설선집을 보고서 사고 싶지 않을 리가 있나. 충동구매, 결국 어쩔 수 없었다. 핑계라면 핑계지만.

그런 점에서는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작품은 늘 놀라움을 주었다. ‘다크 나이트’가 그랬고, ‘인셉션’이 그랬다. 하지만 ‘트랜스 포머’는 나와 맞지 않았다.

말하는 변신로봇이라니! 왠지 온 몸에 닭살이 돋는다. ‘또봇’을 보느니 ‘뽀로로’를 보고 싶은 기분이랄까. 차라리 ‘에반게리온’이 좋다. 결국은 ‘사람’이야기를 보고 싶은 것이다.

상상은 매혹적이다. 상상은 사람을 살아있게 한다. 생동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게 한다. 그런 면에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꿈을 잃고 상상을 하지 않게 된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정관념에 갖히고 편협해지고 이기적이 되는지 모른다.

피터팬이 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그런 어른만은 되고 싶지 않다. 잔뜩 인상을 쓰고 자신에게 행여 손해가 될까봐 전전긍긍하는 아저씨가 되느니, 차라리 SF를 읽으며 조금은 손해를 보더라도 웃는 얼굴로 살고 싶다.

어떠한 재난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고 의지하며 역경을 헤쳐가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에 도전할 때, 안되는 이유에 대해서 친절하게 말해주려고 한다.

왜 그런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열과 성을 다해 이야기 해주고들 싶어한다. 아마, SF도 싫어하겠지. 하지만 생각해 봐라. 그렇게 안된다고 단정짓고 이야기들을 하는 일도, 누군가는 해냈다. 그러면 나라고 못할 이유가 굳이 있나?

정말로 성심성의껏 하지 못할 것을 걱정해야지, 처음부터 하지 못할 것을 걱정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아직 철이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생각해 왔던 화상전화나 컴퓨팅 기술도 상상이 없었다면 , 도전이 없었다면 존재하지 못했다.

상상할 수 있다면, 아직 기회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보다 나은 미래를 꿈꿀 수 있다면 디스토피아도 피할 수 있지 않을까. 디스토피아가 꼭 지구멸망만은 아닐게다.

개인적으로 모든 희망이 사라진 때가 디스토피아일테니. 꿈꾸고 도전하는 이의 상상은 아름답다. 그리고 상상을 위해 행동하는 하루 하루는 젊다. 필립 K. 딕이 살아있을 때는 무시를 당했어도, 지금까지 사랑받는 이유처럼. 피터팬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

‘인터스텔라’가 개봉한단다. 아... 보러가고 싶은데 도무지 시간이 나질 않는다. 수업 땡땡이 치고 확 개봉일에 아이맥스 영화관으로 도망쳐 버릴까? 요즘 하는 생각이 뭐, 그렇다. 에휴.. 나는, 언제나 철이 들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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