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평화학에서 보는 한반도평화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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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평화학에서 보는 한반도평화 (4)
  • 신희섭
  • 승인 2014.10.24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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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이번 시간에도 평화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도록 한다. 평화를 소극적인 의미와 적극적인 의미로 구분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하였다. 이점은 다시 평화를 보는 관점에서 평화가 무엇을 구축하고자 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평화는 질서(order)를 구축하는 것의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 하면 평화는 정의(justice)의 관점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 질서는 강대국간의 관계가 유지되면서 체계를 이루고 있는 규칙이 안정적으로 지켜지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질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으로 평가되어 질 수 있다. 예를 들어 핵무기를 확산하지 않는 규칙을 가지고 있는데 북한이 핵실험을 했던 것은 이러한 규칙을 붕괴시키는 것이다. 반면에 정의의 관점은 주관적인 측면이 강하다. 무엇이 정의로운가는 본인이 세상을 보는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조금만 구체화해보자.

먼저 평화를 질서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질서를 강조한 입장은 여러 국가들간에 그리고 여러 시기에 걸쳐서 나타난다. 먼저 그리스시대에서 질서는 조화(harmony)와 우정(friendship)이 강조되었다. 플라톤은 개체들 간의 역할에 있어서 조화를 강조했다. 영혼 3 분설에 기반을 둔 플라톤의 주장은 지도자는 이성을 군인에게는 용맹이 평민에게는 정념이 중요해지며 각 직분에 맞춰서 사는 삶이 조화로운 삶이라고 보았다. 이러한 조화가 ‘사회내의 질서’를 구축한다. 반면에 플라톤의 제자였던 아리스토텔레스는 시민들 간의 우정(friendship)을 강조했다. 우정은 시민들이 가치 있는 삶 즉 공적인 삶을 살 때 가능한 것이다.

평화를 질서의 관점에서 볼 때 불교 역시 질서를 중시했다. 불교에서는 평온함(tranquility)과 화합(harmony)을 강조한다. 불교는 ‘무엇이 있는가’에 대해 아는 것을 목적으로 하기 보다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을 지향한다. 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일상에서 고통스러운 것은 개인이 가진 욕심 때문이며 이것을 내려놓을 때 개인들은 평온함을 얻게 된다. ‘무아(無我: anatta)’는 자아에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의 주관적 욕망을 내려놓음으로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개인은 평온함을 느끼고 세상과 화합할 수 있게 된다.

이와 유사하게 미국과 아프리카의 문화에서도 질서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이들 나라에서 질서는 자연과의 화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문화들에서 자연은 극복되고 정복되는 대상이 아니라 자연을 받아들이고 함께 하는 것에 있다. 공존에서 질서가 만들어진다.

서양의 기독교도 질서를 강조한다. 기독교에서는 상호우애, 무조건적인 사랑과 사회적인 안위(well-being)와 개인적 안위가 모색된다. 예를 들어 로마시기의 초기 기독교에서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 무조건적인 사랑이었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듯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질서를 주장한 또 다른 입장으로 17, 18세기의 계몽주의사상들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국가의 구성과 사회질서의 정당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리체계인 사회계약론을 제시하였다. 사회계약론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홉스, 로크, 루소를 들 수 있다. 이들 주장의 핵심은 인간이 인간 공동체의 질서를 만들며 이것은 사회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사회의 핵심을 질서로 파악한 사회계약론자들에 따르면 국가 간의 평화이전에 국가라는 공동체의 건설과 국가내에서의 안전과 질서 확보가 필수적이다. 즉 평화는 국가간 관계 이전의 국가구성이 문제인 것이다.

국가내의 범위에서 국가간의 관계속의 평화를 주장한 대표주자는 19세기의 칸트이다. 그는 국가들간의 영구평화에 대해 이야기 했다. 그가 제시한 영구평화를 위한 3가지 조건은 공화주의 헌법, 연맹에 기반을 둔 국제법, 세계시민법을 제시하였다. 법을 통해서 국가들간의 평화를 구축해보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평화의 두 번째 입장은 정의의 관점에서 평화를 다루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평화주의적 아나키즘을 들 수 있다. 이 입장은 인간의 가치를 강조하며 압제의 제거를 중시한다. 아나키즘은 인간 사회 조직인 국가나 사회의 위험성을 강조하며 이러한 조직구성 자체를 거부한다. 아나키즘은 다양한 세부적인 논리에 근거한다. 먼저 환경적 아니키즘은 근대주의(modernism)가 환경을 단지 대상으로 하여 환경파괴를 자행하며 자본주의나 사회주의 모두 환경을 대상으로 여기는 것이 문제라고 본다. 페미니즘적 아니키즘은 여성을 남성의 종속물로 보는 것 역시 사회구조에 근거한다고 보고 이 문제에 집중한다. 풀뿌리민주주의를 강조하는 아나키즘에서는 국가라고 하는 중앙집중화된 구조에서 지방에 권력을 빼앗는 것 역시 문제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국가 혹은 사회가 구성되면서 폭력을 통해서 개인들을 괴롭히는 것도 문제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평화는 인간과 환경의 조화, 여성의 해방,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자기지배를 변화시키는 것과 국가와 사회의 폭력행사가능성을 줄이는 것에서 가능해진다. 사회가 폭력기제를 강화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들은 톨스토이나 간디의 평화주의 노선을 따라 반핵운동, 반군사운동, 총기휴대금지운동, 성폭력퇴치 운동을 펴나가고 있다. 이러한 평화주의 아니키즘의 논리는 자연과의 화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불교나 노장 사상과도 맥을 같이 한다.

정의의 관점에서 볼 때 사회주의운동 역시 경제적 평등을 통해서 정의를 달성하고자 한다. 사회주의는 계급구조에 주목한다. 계급구조는 생산수단의 보유여부에 따라 부르주아와 프로레타리아로 구분이 된다. 이윤율이 증가하는 비율이 다르기 때문에 자본수익률이 높은 자본가가 프로레타리아를 착취하게 된다. 이는 경제적 불평등을 만들기 때문에 부정의하다. 따라서 경제적 착취구조를 해결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정의를 달성하는 핵심적인 방안이 된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의 차이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본질적으로 인간의 역사는 폭력투쟁과 억압의 역사인가? 아니면 평화와 조화의 역사인가?” 즉 인간의 경험세계인 역사는 과연 평화가 일반적이었는가 하는 점이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인간의 역사는 폭력투쟁과 억압의 역사이다.

보편적인 역사관점에서 볼 때 자연투쟁에서 생존하는 것이 인간존재의 핵심이다. 인간이 자연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구성해야 한다. 또한 공동체를 원활하게 작동하게 하려면 사회제도를 구축해야 한다. 사회제도에 질서와 규칙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국가가 통치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세금을 걷고 관료조직을 통해서 국가라는 통치체제의 운영을 수행해야 하며 군사조직을 구축하여 외부적인 안보를 확보하고 경찰과 검찰을 통해서 법질서를 강제하고 내부적인 안전을 확보해야 한다. 국가내에서 이러한 질서가 정당하게 작동한다는 믿음을 위해서는 정부가 권위를 가져야 하며 교육제도 등을 통해서 이를 구축한다.

국가와 정부가 가지는 권위에 의해서 질서가 만들어지며 ‘질서로서 평화’가 만들어질 수 있다. 그리스와 로마는 공동체의식이라는 권위에 의존했다. 중세는 종교적인 권위를 강조했다. 근대국가는 국민국가라는 민족주의에 대한 동의에 기반하여 권위를 부여받았다. 근대국가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국가들이 이루어지는 과정은 폭력의 과정을 거쳤다. 종교전쟁으로 대표되는 전쟁이 종결되면서 근대국가들은 주권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근대국가는 이후 국가의 생존을 강조하는 사회적 다위니즘에 기반하여 제국주의로 확대되어 갔고 이것은 1차 대전과 2차 대전의 계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제국주의는 제국에 대한 강요와 거부로 인해 폭력사용을 불러왔다. 2차 대전이후 양극은 두 개의 초강국에 의해 냉전질서가 만들어졌다. 냉전질서는 정치, 경제, 이념에 있어 대립을 하였다. 하지만 반면에 소극적인 평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강대국간에는 전쟁이 없었다는 점에서 ‘긴평화(long peace)’가 유지되었다.

탈냉전의 시대는 또 다른 의미로 세계화시대가 되었다. 이 세계에서는 국가 간의 관계가 증대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국가외의 행위자들의 관계도 확대되고 있다. 자유주의이론가들이 주장하듯이 이 시기가 평화의 시기가 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수 있는가? 21세기는 20세기의 제국주의나 이념대결은 사라졌지만 테러와 인종분규와 자본주의에 따른 양극화 그리고 질병의 세계화와 같은 위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21세기=평화의 세기’라는 등식이 바로 성립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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