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死法府가 되어 버린 사법부, 경제를 죽이는 21세기 자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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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死法府가 되어 버린 사법부, 경제를 죽이는 21세기 자본
  • 법률저널
  • 승인 2014.09.26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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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정의가 없는 사법부(司法府)는 사법부(死法府) 또는 사법부(私法府)가 되기 쉽다. 아니 되고 만다. 사법부의 최고 가치는 사회 정의의 실현이어야 한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 취급함을 최대 원칙으로 삼아야 할 사법부가 이러한 가치를 상실하게 되면 이는 국민을 해치는 무서운 흉기부(凶器府)가 되고 만다. 마치 축구심판이 축구장에서 한쪽 편이 되어 공을 가로채거나 패스해 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멀쩡한 선수에게 레드카드를 내밀어 퇴장시키고, 정상적인 플레이에 페널티킥을 차도록 하여 승패를 뒤집어 버리게 된다. 죄 없는 자를 돌로 치고, 죄 있는 자에게 상을 주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까닭에 사법부의 구성원은 단순히 법을 집행하는, 법조문만 달달 외워 법을 해석, 적용하는 기계가 되어서는 안 되고, 법의 본질을 꿰뚫는 혜안과 인본주의와 신본주의의 경계를 깨닫는 대철학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최근에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킨 두 가지 사법사건이 있었다. 하나는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위반사건 무죄선고에 대한 수원지방법원성남지원 김동진 부장판사의 공개비판이고, 다른 하나는 전교조에 대한 고용노동부의 법외노조 통보처분에 대한 서울고등법원의 집행정지가처분결정과 헌법재판소에의 위헌제청신청이라 할 것이다. 김동진 부장은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선거법위반사건에 무죄판결을 내린 서울중앙지방법원의 이범균 부장판사에 대하여 “고등법원부장판사 승진이라는 개인적 영달을 위해 유죄여야 할 판결을 무죄로 판결한 것이 아닌가?”고 공개비판하며 “법치주의가 죽었다.”고 선언하였다. 사법부가 법을 공정하게 집행하는 사법부가 아니라 법치주의를 죽이는 死法府, 승진에 목매는 판사의 사리사욕을 충족시켜주는 도구가 된 私法府가 되고 말았다고 통탄하였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에 대한 판결문을 보면 11만 건이 넘는 국정원 직원들의 선거법위반관련 댓글에 대한 증거판단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무죄이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위적으로 황당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진실을 뒤집거나 애쓴 흔적이 무죄판결문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오죽하면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라는 비판적 패러디가 인터넷에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이범균 부장판사는 침묵 중이다. 반면에 대법원은 동료 판사의 판결에 공개적 비판의견을 표명하였다는 이유로 법관윤리지침을 위반하였다며 김동진 부장판사를 징계하겠다고 나섰다. 옳은 말 한 사람에 대한 전형적인 족쇄 채우기라고 할 것이다. 원세훈 국정원장은 국정원댓글과 관련하여 정치관련행위를 하였다는 이유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그 행위는 선거법위반은 아니라는 것이 이범균 부장 재판부의 판단이다. 어떻게 대통령선거기간 동안 정치관련행위를 하는 것이 선거행위를 한 것이 아닌지 알다가 모를 일이다. 댓글 내용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박근혜 여당 후보의 당선을 위한 호의적 여론 형성과 문재인 야당 후보의 낙선을 위한 악의적 여론 형성”으로 분류된다. 이처럼 여당 후보의 당선을, 야당 후보의 낙선을 의도하는 수많은 댓글내용은 초등학교 1학년이 보아도 분명해 보인다. 그런데도 11만 건이 넘는 정치성, 선거성 댓글에 대한 적법한 증거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무죄판결을 선고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고용노동부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전교조에 대하여 6만 명이 넘는 조합원에 해직교사 9명이 포함되어 있다는 그 하나의 이유만으로 법외노조처분을 내렸다. 0.015%의 흠으로 100%를 죽여버린 꼴이다. 최고의 보석으로 치는 다이아몬드에도 0.015%의 흠은 있게 마련인데 말이다. 이에 대해 전교조는 교원노조법상의 노조임을 인정해 달라며 제소하였으나 1심재판부는 고용노동부의 위 처분이 정당하다고 판단하였고, 전교조는 항소하였다. 그런데 항소심인 서울고등법원 재판부는 전교조를 위법하다고 판단한 근거조항인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약칭 교원노조법 제2조가 “교원의 헌법상 보장된 단결권을 침해하고, 교원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조항이라고 의심할 상당한 이유가 있다.”며, 전교조가 신청한 위헌법률심판제청을 받아들여 헌법재판소에 위헌신청제청을 하였다. 다시 말해 헌법 제37조 제2항의 과잉금지 원칙에서 벗어나 헌법상 보장된 교원의 단결권을 침해하고, 헌법 제11조의 평등 원칙에 위반하여 교원의 평등권을 침해하는 위헌적인 조항이라고 의심할 만한 상당한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 해고근로자를 노조원으로 인정하고 있는 다른 산별노조에 비해 전교조의 요건이 너무 엄격하다는 것이다. 서울고등법원은 동시에 “고용노동부의 전교조에 대한 법외노조 통보 처분은 2심 판결 선고 시까지 그 효력을 정지한다.”며 전교조의 합법성을 2심판결 시까지 인정해 주었다. 1심판결에 근거해 전교조 전임교사들을 전부 학교로 복직시키고, 이에 응하지 않은 교사들을 모두 징계하라고 강공 드라이브를 쓰던 교과부가 머쓱하게 되고 말았다. 서울고등법원의 가처분결정으로 2심판결이 날 때까지 전교조가 합법적 노조로 인정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교원의 노동조합 설립 및 운영 등에 관한 법률, 약칭 교원노조법 제2조는 교원에 대하여 초·중등교육법」 제19조 제1항에서 규정하고 있는 교원을 말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다만 해고된 사람으로서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82조 제1항에 따라 노동위원회에 부당노동행위의 구제신청을 한 사람은 「노동위원회법」 제2조에 따른 중앙노동위원회의 재심판정이 있을 때가지 교원으로 인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의 법적 정당성 여부는 헌법재판소의 위헌심판 판결이 내려질 때까지 최종 판단이 미뤄질 전망이다. 이러한 고등법원의 결정에 대하여 지지하는 쪽에서는 사필귀정이라 환호하는 반면 반대하는 쪽에서는 학교안정을 침해하여 학생들의 학습권에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헌법재판소가 위 교원노조법 제2조에 대하여 어떠한 결정을 내릴 것인지 지켜볼 일이라 하겠다.

위 두 판결이 상징하는 바는 크다고 할 것이다. 사법부가 어떤 결론을 내리는가에 따라 이 나라에 정의가 제대로 세워질 것인가 아닌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선거법위반에 대한 무죄판결은 박근혜 대통령의 정당성을 보장해 주는 반석이 되었다. 검찰은 항소를 머무적거리다가 여론에 떠밀려 항소를 결정하였다. 그러한 행태는 전형적인 정치검사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비판받아 마땅하다. 정의실현에 대한 의지의 결여는 검찰을 양아치수준으로 격하시킬 수도 있다. 오죽하면 여론조사결과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생각을 전체 국민의 3분의 2가 하는가 말이다. 검찰을 포함한 사법부의 판결이 정치지향성을 띄게 되면 국가에 정의실현은 사라지고, 사람을 죽이고, 정의를 죽이는 死法府가 되고 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21세기 자본”의 저자인 프랑스 경제학자 피케티의 방한이 거의 신드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난 300년 가까운 경제지표들을 통계화하여 자본소득율이 노동소득율을 앞서온 경제현실을 진단하고, 수익률 높은 자본의 힘이 부의 집중을 가져오고 부의 세습을 가져와 사회불평등을 심화시킨다는, 그래서 이러한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고소득자본가에게 고율의 소득세와 상속세를 부과하고, 저소득자에게 교육기회를 보장하여 그들의 소득창출능력을 배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이 사회적 공명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마이클 샐던 교수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이어 사회경제적 불평등의 심각화로 사회안전망이 흔들리고 있는 한국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앞서의 두 개의 사법부결정으로 정의에 기반한 법치주의의 실현이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었다면, 피케티 교수의 21세기 자본은 경제적 안정사회를 구축하는 중요한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 두 사회현상의 공통점은 불평등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법이 사회정의를 외면한 채 강자에 의해 무자비하게 휘둘리게 되면 이는 정의실현의 도구가 아닌 불의와 부정을 자행하는 사회적 흉기로 둔갑하게 되고 만다. 경제적 정의 역시 정당한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못하면, 그리하여 사회적 불평등이 심화되게 되면 결국 극단으로 치닫게 되는 양극화의 후유증은 치유될 수 없는 사회혼란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여론압박이 무겁다 보니, 위 두 재판을 담당하게 되는 고등법원 판사들은 재판진행에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재판이 여론에 떠밀려서도 안 되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회적 공감대를 벗어난 부당한 판결을 해서도 안 될 것이다.

피케티 교수의 방한으로 한국사회에 파장이 만만치 않은 듯하다. 벌써 대기업들이 중심되어 반대의견형성을 위한 물밑작업이 진행 중이다. 대기업 자본가에게 불리한 경제정책이 될 수밖에 없는 피케티 교수의 주장으로 야기된 사회적 파장을 최소화하기 위하여 그의 이론죽이기여론을 형성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듯하다. 일부 재용학자(재벌들의 입맛에 맞는 경제이론을 주장해 주는 어용학자)들이 앞장서서 피케티 교수의 주장이 안고 있는 문제점들을 침소봉대 과장주장을 늘어놓기 시작하고 있다. 아주 간단한 문제를 아주 복잡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피케티 교수의 주장은 아주 간단하다. 자본이 지나치게 탐욕스럽다는 것이다. 노동자의 몫을 지나치게 많이 빼앗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자본의 탐욕을 자제하여 노동자에게 그 정당한 몫을 배분해 주라는 것이다. 문득 3조5천억 원으로 평가된 한전 부지를 10조 5천억 원이 넘게 비싼 낙찰가를 써낸 정몽구 회장의 얼굴이 현대자동차 파견근로자를 정규직으로 인정하라는 법원의 판결과 함께 겹쳐온다. 용역업체로부터 근로자를 불법파견받아 그들을 정규직과 동일한 근로를 하도록 하고서 월급은 적게 주어 남은 돈으로 축적된 자본을 가지고 위 한전 부지 매입에 과도한 돈을 쓰는 자본의 민낯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법부에 의해 법치주의가 죽고, 자본의 탐욕에 의해 자본주의가 죽는 세상은 별로 재미가 없다. 아니 너무 재미가 많은 것인가? 자본과 법에 사육당하는 것 같지만, 자본과 법은 유한하나 인간은 영원하다. 권불십년이라 했고, 부자3대라고 했다. 정의로우면 영원히 갈 것이다. 한국 경제학자 중에는 피케티처럼 할 말을 제대로 하는 경제학자들은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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