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근욱의 "Radio Bebop"(7) - 슬픈 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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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의 "Radio Bebop"(7) - 슬픈 얘기
  • 차근욱
  • 승인 2014.08.1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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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근욱 아모르이그잼 강사

몇 달 전에 면접상담을 한 적 있다. 면접이라는 측면에서 보완할 점이 보였던 친구라, 이런 저런 보완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데, 이 친구의 반응이 좀 의아했다. 분명 상담을 자처해서 나를 찾아온 것 일 텐데, 굉장히 방어적인 자세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사실 좀 골이 아파왔다. 당연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름 이쪽에선 - 쌩판 처음 만난 남이라 해도 -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 상담에 임하고 있는데, 상담을 받는 쪽에서 무조건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라...’를 연발하고 있다면.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안타깝게도 부상으로 인해 은퇴하게 된 이 전직 육상선수의 반발 논거는 딱 하나였다.

“선생님, 제가 엘리트 운동선수였다니까요!”

내 입장에서는 당황스러운 대목이다. 만일 본인이 현역 국가대표 육상선수라고 할지라도 면접장에 들어가 면접수험생으로 면접관 앞에 서게 된다면 합격을 위해 공무원으로서 적합한 사람인가 아닌가 만이 관건일 뿐, 그 이외에는 무의미할 다름이므로.

 
물론 본인이 면접 수험생이 아니라면 전직 엘리트 운동선수라는 긍지로 말끝마다 그 사실을 노래하는 매일에 불만은 없다.

하지만 공무원 면접을 치러내야 하는 수험생으로서는, 적어도 면접 대비 보완사항을 철저히 보완해 최종합격을 얻어 내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 그 이외의 모든 것은 오만이다. 모두가 엘리트라고 떠받들어 주던 과거 탓일지는 모르겠지만.

원숭이와 침팬지와 고릴라와 오랑우탄과 인간을 포함한 영장류의 특징이라고는 하는데, 이족 보행을 하며 손과 도구를 사용해 지구별에서 살고 있는 이 미지의 생명체는 무리지어 서식하며 집단 내에서 서열을 만들어 군림하려 드는 유전적 습성이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호모사피엔스의 DNA가 잘난 척 하고 싶게 하고 약자를 괴롭히고 싶게 한다는 뜻이라고나 할까.

많은 사람들이 ‘최고’라는 것에 매력을 느낀다. 그거야 당연히 나도 그렇다. ‘최고’라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로 좋으니까.

그래서 학벌서열에 다들 민감하지 않나. 그런데 한 가지, 나로서는 납득이 가질 않는 것이 있다. 그럼, 도대체 ‘학교는 왜 가느냐’ 이다. 나라면 보다 좋은 교육을 받고자 좋은 학교에 가고 싶은 것 같은데, 이 좋은 교육의 취지는 교육을 통해 어리석음을 벗고 자신의 인생과 이웃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행복해자는 것이 아닌가?

어느 학교를 가든, 훌륭한 교수님들 문하에서 자신에게 필요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고 자신이 행복해 질 수 있다면, 분명 그 사람은 좋은 학교에서 잘 배운 거다. 자기 자신과 모교를 자랑스러워해야 하는 것이 맞다. 타인이 1류네 3류네 왈가왈부 쌩쑈 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만일 학교를 가지 않고서도 그런 인격과 실력을 갖출 수 있다면 그건 축복이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린 천재일 게다. 천재에게 스펙을 강요하는 사회는 슬프다.

하지만 우리는 어느새 왜곡된 가치관으로 주객이 전도된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잘 배워 행복해지고자 좋은 학교를 꿈꾸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려고 리더가 되고픈 것이 아니라, 좋은 학교 그 자체가 목적이 되고 엘리트 자체가 목적이 되어 모두 불행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실제로 하버드, 예일, 옥스퍼드 같은 명문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판단력, 그리고 타인들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깨우치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정이라 들었다.

이들 학교에서 수학하신 분들의 경험담에 따르면, 이는 스스로 깨달아야 하므로 토론식 수업을 중심으로 커리큘럼을 운영한단다. 교수는 가이드일 뿐이지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력을 길러야할 학생들에게 내용주입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요컨대, 전인교육이 목표라는 것이다.

그렇게 잘 배운 학생들이 사회로 나아가 올바른 선택을 하고 서로를 도와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 후회없이 살라는 취지가 바로 이들 대학의 교육목표란다.

근사하지 않나? 그러니까 배우는 것은 째째한 알음알이가 아니라, 삶의 의미를 찾고 생각하는 방법을 배워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 능력을 기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명문이라는 거다. 부럽다. 된장!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서 높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는 특별하고 나만은 다르다는 일그러진 선민의식이나 교만한 우월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런 사람 난 별로 안 존경스러울 것 같다. 좀 ‘꺄우뚱’스러울지는 몰라도.

학교를 졸업할 때 개인적으로 느낀 것은, 내가 한 공부란 사실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발견이었다. 뭐, ‘알고 보니 다 책에 있는 거였어!’ 라는 허탈한 느낌이었달까. 그래서 학위 수여식에도 가지 않았다.

스스로 부끄러웠기에. 진짜 공부는 이제부터구나 싶었다. 내가 납득할 수 있는 인생을 찾기 위해 더 고민하며 스스로의 길을 헤쳐가야 하는 거구나, 라는 생각에 조심스러웠다.

학위과정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지혜이지 지식이 아니라는 깨우침을 주신 부모님과 교수님들께 감사했다.

그래서 학위논문 머리말에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제게 사람의 길을 보여주신 부모님과 교수님들께 감사드립니다.’라고 썼었다.

물론, 어머님께서는 그 글을 보시고 “그럼 내가 짐승을 낳았다는 말이냐!”라고 하시면서 장풍을 쏘아 주시기도 하셨지만.

좋은 교육이란 자기 삶의 올바른 가치를 찾을 수 있는 인식의 지평을 열어주는 것이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는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라 믿는다. 졸업생 중에 사회적으로 성공하신 유명인사가 많이 있다던가 각종 시험 합격자를 많이 배출해서 플랜카드 거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세상을 바꾸는 행동은, 사실은 뭐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지 않나 싶다. 내 생활 속 내 주위 모든 생명들에게 더욱 감사하고 더욱 헌신하고 더욱 도우며 사랑하는, 내 본분에 충실한 일상의 실천이 세상을 바꾸기 마련이니까. 그런 평범함이 진정한 특별함을 만드는 것이니까.

요즘 ‘명량’이 뜨겁다. 아마 우리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큰 탓 일게다. 우리 민족의 운명을 구하셨던 이순신 장군께서는 솔직히 좀 고민이 많으셨을지도 모른다.

문과를 준비하셨지만 결국 무과로 관직에 나가셔야 했었고, 평균수명이 24세였던 시대에 32세로 무과에 급제하셨다.

그것도 4등으로. 하지만 이순신 장군께서는 엘리트의식이나 선민의식 혹은 권위의식과 우월감이 아닌, 본분에 충실한 우직함과 주위사람들을 아끼시는 배려로 역사를 바꾸셨다.

그래서 우리는 유학파가 아니셨어도, 당대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밟으신 것은 아니셨어도, MBA학위와 화려한 스펙으로 외국어 섞어 말씀하시지는 않으셨을지라도 이순신 장군님을 민족의 성웅으로 우러른다.

어거지 권위를 폭력적으로 내세우는 싼티 작렬들과는 다르게 그 진솔함의 깊이가 자연스럽게 폭풍권위의 물결이 되어 밀려온다.

하긴, 이순신 장군님께서는 이미 창조와 혁신을 깨달아 실천하셨으니 유학 가서 배울 필요도, 스펙 쌓아 과시할 까닭도 있으셨을리 만무하다. 모르는 사람이나 배우러 가지, 아는 사람에겐 굳이 배우러 가는 헛수고가 무의미할테니.

그리고 그로부터 300년 뒤 조선은, 고종께서 가장 믿고 의지하셨던 당대 최고의 수재이자 화려한 스펙의 엘리트였던 이완용에게 배신을 당했고 이로 인해 우리 민족은 나라를 잃었다.

윤 일병 사건으로 인해 나라가 비탄에 잠겼다. 뉴스를 보고서 그다지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군복무 시절 선임에게 당했던 가혹행위가 기억났다.

늘 한 번에 따귀를 50대가 넘도록 맞아서 눈 밑이 찢어지고 얼굴이 퉁퉁 부은 채 생활하던 일상, 가혹행위로 6개월간 손가락 감각이 사라져 걱정했던 일, ‘차렸’을 시키고 ‘차렸자세’는 부동자세라고 악쓰며 성기에 딱밤을 계속 때리던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뭐가 문제였을까. 다들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우월감에 인간본분을 망각했을지 모른다. 세월호 사건도,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사건 사고도 그래서 그랬는지도 모른다. 다들 영장류인 탓에 남들보다 너무 잘났다 싶어 그랬는지 모른다.

자신이 누구라는 허영과 광기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 괴물로 돌변해 버리고 마는지 모른다.

갑이 되는 사람이나 을이 되는 사람이나 모두가 같은 사람일텐데. 여기서는 갑이라고 으스대는 사람도 저기 가서는 을이라 서러울텐데. 명량을 보면서, 명색 보다 사람이 그리웠다.

2014년의 마음 둘 곳 없는 우리는, 어쩌면 좋은 스펙보다 좋은 교육에 목말라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삼가, 윤 일병님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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