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자 송두율 교수와 국가보안법
상태바
학자 송두율 교수와 국가보안법
  • 이창호
  • 승인 2003.11.11 16:2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창호
경상대 법과대학 교수

 37년만에 조국의 품이 그리워 남한 땅을 밟은 재독 학자 송두율 교수가 마침내 검찰에 의해 구속되었다. 남과 북의 경계인을 자처하면서 양심적 지식인으로서의 삶을 고집했던 이 시대의 지성이 쇠창살에 갇힌 것이다. 그의 과거 행적 어느 부분도 크게 북한을 이롭게 한 것으로 여겨지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사법당국과 일부 언론은 그를 마치 '거물 간첩'이나 되는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우리가 우려하는 것은 그의 과거 친북 행적에 대한 사법처리가 아니라, 그의 학문적 성과에 대한 사법처리 여부이다.
 
이 사건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1994년 여름 그 아찔했던 시기를 회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필자를 비롯한 9명의 교수가 공동으로 집필한 대학 교양교재 '한국사회의 이해'가 이적성이 있다는 검찰의 덮어씌우기로 집필자 전원이 사법처리될 뻔한 사건이다. 당시 두 교수가 대표적으로 기소되어 제1, 2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아직도 사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다. 지금의 상황은 당시에 비하여 많이 달라졌건만, 검찰과 언론과 정치권의 대응방법은 달라진 것이 전혀 없다. 아직도 한국의 지배권력은 정당성에 기반한 통치보다는 폭력적인 억압수단에 의존하고 있다.
 
송 교수는 지금까지 철학 및 사회과학 분야에서 8권의 독일어 저서와 수십 편의 독일어 및 영어로 쓴 논문을 발표했고, 우리말로도 9권의 저서와 100여 편의 글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학문 활동을 해 왔다. 송 교수의 학문적 관심과 지적 스펙트럼은 그렇게 단순하게 몇 마디 말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송 교수를 마치 북한의 주체사상 선전 요원 정도로 폄하하는 일부의 시각은 엄연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의도적인 왜곡이다. 송 교수의 학문적 탐구는 서양 사상가들의 동양적 세계관에서부터 사회주의 사상과 현실 문제,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 논쟁, 민족 문제와 제3세계 문제 등 큰 이야기에서부터 생태계의 위기, 시민 생활, 여성의 지위와 권리 등 작은 이야기에 이르기까지 매우 넓고 다양하다.
 
검찰이 만일 그의 저서나 논문에서 특정 부분을 거두절미하고 발췌하여 이적성 여부를 판단한다면, 그것은 학문과 사상의 자유를 원천적으로 유린하는 현대판 '분서갱유'이며 권력의 횡포이다. 사상적인 박해와 탄압의 밑바탕에는 선긋기라는 '분리와 배제의 논리'가 잠복하고 있다. 그러나 분리와 배제의 논리로 모든 것을 재단하는 시대는 이미 지난 세기에 종말을 고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사회는 여전히 전근대적 차원의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이 먹혀들고 있다. 이러한 상황 자체가 한국의 학문적 풍토의 후진성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
 
도대체 우리 사회의 무엇이 이러한 극단적인 흑백논리를 지탱하고 학문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는가? 그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지난 55년 동안 우리 사회의 구석구석은 물론, 지식인들 두뇌의 구석구석까지 샅샅이 감시하는 '권력의 망루탑'인 동시에 '권력의 단층촬영기'와 같은 국가보안법 체계이다. 국가보안법 넷트웍이 존재하는 한 제2, 제3의 송두율 교수는 언제든지 재생산될 수 있다. 지난 10월 17일 송 교수가 검찰에 여덟 번째 소환되면서 "법의 코드는 '불법과 법'이며, 학문의 코드는 '진실'이다"고 외친 절규는 국가보안법에 가위눌린 이 땅의 지식인들에게 보내는 각성의 메시지이리라.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