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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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경쟁사회에서 살아가기
  • 신희섭
  • 승인 2014.07.11 11:58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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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7월이 시작되었다. 1년의 반이 지난 것이다. 한편으로는 1년의 새로운 반이 시작된 것이다. 2014년 시험을 대비한 모든 일정이 끝이 났고 7월 1일 행정법을 시작으로 5급 공채 시험이 시작되어 진행 중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7월 3일 오늘은 정치학시험이 있는 날이다. 가르친 학생들이 어떤 문제를 만날 지 얼마나 본인들이 준비한 것을 잘 정리하고 나올지 수험생만큼이나 긴장되는 하루이다.

개인적으로 대학 강의도 완전히 끝이 났다. 기말고사 점수 입력까지 마무리를 지었고 이제 방학이 되었다. 처음으로 해보는 대학 강의를 어찌되었든 무사히 마치고 났더니 시원섭섭하다. 학교 성적을 처리하면서 상대평가가 얼마나 잔인한가를 한 번 더 실감하기도 했다. 점수로 누군가와 누군가를 완전히 구분해야 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점수대에 있는 사람들을 나누고 각자 다른 등급을 부여한다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되었다. 경쟁이라는 관점에서 지난 1/2년을 돌아보면서 배운 몇 가지를 적어본다.

학교강의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배운 것이 있다. 그것은 우연한 기회에 수업시간을 활용하다 생겼다. 수업 중에 최근 가장 관심이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학생들에게 물어보았다. 수업을 단방향적으로 진행하다 과연 이 학생들은 무엇에 관심이 있고 어떻게 사회와 본인을 파악하고 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사적인 질문이 될 수도 있었지만 수업에 참여한 많은 학생들이 질문에 솔직한 본인들의 고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몇 몇 학생들의 이야기가 진행되자 다른 학생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했고 상당히 많은 고민과 관심거리를 들을 수 있었다.

두 달전에 여자친구와 헤어진 이야기, 취업에 관한 이야기, 동아리 활동과 관련된 이야기 등등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아주 솔직히 돈을 많이 벌고 싶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가장 주된 것은 역시 졸업 후의 장래에 관한 불안의 문제였다. 그런데 어떤 수업에서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었다. 몇 몇 학생들이 무엇을 걱정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이 없다거나 그렇게 생각 없이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무엇을 걱정한다고 해서 과연 미래가 달라질 것인가에 대한 자조적인 비관이었다.

“걱정이 있다고 해법이 있을까요?”식의 대답은 최근 한국의 20대가 직면한 어두운 현실의 모습 그대로를 비춰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20대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막연한 미래. 높은 실업률. 주변에서 공무원시험로 몰려가는 이들. 기업 취업문이 어려워지자 직업안전성을 찾아 너무나도 많이 몰려있는 공무원 수험가.

어디에선가 나왔던 한국 학생들의 미래도에 대한 풍자에서는 상경계열이나 인문계열을 나오나 이과계열이나 공과계열 모두 백수 아니면 치킨 집을 한다고 보여주었다. 많이 웃었지만 웃기에는 씁쓸한 현실. 학생들에게 수업을 통해서 지식의 일부를 가르쳐 주고 지식을 소화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정작 그 수업을 통해서 배운 것은 마주하고 싶어하지 않는 20대의 삶과 미래였다.

미래에 대한 걱정은 미래의 그림이 어느 정도 보일 때 가능하다. 그리고 그림이 보여야 구체적인 고민이 가능해진다. 그런데 미래가 이제 막 진입한 터널과 같아서 얼마나 오랫동안 달려야 터널 밖으로 나올 수 있는지를 알 수 없다고 하면 묵묵히 터널을 빠져나오는 이도 있겠지만 터널에서 멈추어버리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수업시간에 묻고 들은 이야기는 이렇게 두 부류의 미래에 대한 예측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소득의 양극화 보다 더 두려운 ‘미래의 양극화’. 누군가는 개척하고 다듬어가야 할 것이지만 누군가에는 그저 길고 고통스러운 시간의 연속이 된 미래. 한국사회가 짊어진 숙제는 소득양극화와 복지라는 표면적인 것도 있지만 미래의 주역이 되어야 할 이들에게 미래라는 그림을 보여주고 미래를 다듬어 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더 장기적인 플랜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사회의 경쟁과 연결되어 있다. 대학도 그런 경쟁구조에서 크게 동떨어져 있지 않다. 학업과정 속 경쟁을 통해서 사람을 구분할 수 있게 하고 그렇게 훈련하는 것은 사회가 대학에 대해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많은 인재들과 적은 일자리. 희소한 사회적 가치에 도달하는 협소한 방법. 물론 사회적 가치에 도달하기 위해서 피라미드 형태로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은 한국만의 모습이 아니고 현 시대만의 문제도 아니다. 이것은 인류의 궁극적인 문제이다. 가치를 움켜주고 있는 사람들과 그 가치를 나누자고 하는 사람들은 인류의 공동체가 생긴 이후 지속적으로 인간 공동체의 구성원들을 다투고 협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너무 멀리 갈 필요는 없고 지금 한국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과거 보다 더욱 치열해진 경쟁은 미래를 더욱 어둡게 한다. 이 경쟁구조에서 살아남는 것 자체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너무 일찍 시작한 경쟁구조는 끊임없이 사람을 평가하게 만든다. 유치원 이전에 얼마나 영어를 잘하는가에서 시작하여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경쟁은 대학을 향해서 최고조가 된다. 대학을 가도 경쟁은 계속되고 회사에 들어가도 어느 회사이고 연봉이 얼마인지 결혼 정보회사에서 보는 회사의 등급은 어떤지가 중요하게 되고 중년으로 진입하면 집이 어느 동네에 사는지 어떤 차를 몰고 다니는지를 기준으로 경쟁은 지속되고 평가도 계속 따라 붙는다.

그렇다고 경쟁 자체를 폐기하자거나 다시 평등적인 삶을 추구하자는 것은 아니다. 경쟁구조에서 같이 사는 법과 살아가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확실히 같이 사는 삶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하다. 같이 살아가고 가치를 공유하며 사회변화를 꾀하는 아이디어를 가진다고 해서 같은 직업을 가지거나 대안공동체를 구성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다른 삶의 모습 속에서 같이 세상을 마주보고 함께 응원하는 삶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양성속에서 공존하는 것.

경쟁사회의 우위에 서서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런 기준은 나보다 더 우위에 있는 누군가를 상정할 것이고 아마도 자신이 다른 이에게 던지는 무시보다 더 큰 무게의 무시를 다른 누군가로부터 경험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공통될 수 있다는 생각과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조금은 색다른 선호를 가질 수 있으며 창의적인 나만의 개성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살아갈 때 나와 다른 이들의 차이 속에서 공존할 수 있다. 이것은 공화주의자들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보편성과 나만의 개성이 공존하는 삶. 70억짜리 거대한 인간 공동체의 이야기 구조 속에서 자신의 작은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삶.

이런 차이 속에서 자신은 자신의 색깔을 가지고 사회와 대면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서 자신을 보여주어야 한다. 내가 아니면 안되기 때문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사회에서의 쓰임새가 있기 때문이다. 교사는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하고 기업인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어서 나누어야 하며 배우는 즐거움과 슬픔의 대리 감정을 잘 전달함으로서 사람들의 감정을 조절할 수 있고 인간애를 가질 수 있게 해야 하며 관료는 주어진 업무를 효율적으로 수행하여 한 국가가 기능적으로 잘 작동하게 해야 한다. 이런 맡겨진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조금의 노력이 더 필요하다.

다시 학교이야기로 돌아가자. 상대평가를 통해서 학생들에게 점수를 주다 보면 1학년이고 정치학과 관계가 없는 과의 학생들의 답안을 보고 채점하고 평가해야 할 때가 있다. 수업은 호기심으로 학교생활을 맞이한 1학년 학생에게 정치학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지만, 경쟁구조속의 시험은 그간의 공부를 평가하게 한다. 틀림없이 노력을 하고 있는 이 학생들 모두에게 점수를 잘 주고 싶지만 상대평가제도는 사람을 구분하게 한다. 그러다 보면 같은 1학년이지만 더 노력한 답안이 있고 더 수업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려는 사람이 보이기 마련이다.

노력에 대해 조금 더 좋은 보상을 하는 것이 공정한 것이라면 학생으로서 조금 더 노력하는 것에 더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은 사회적 형평에도 부합한다. 그러다 보면 “조금 더”라는 기준을 채우려는 노력을 한 사람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런 노력을 하는 사람과 그런 자세가 사회를 같이 살아가게 하는데 있어서 중요하다. 마치 모든 배역들이 최선을 다 할 때 좋은 연극을 만들 수 있는 것처럼. 경쟁사회에서 최선을 다하면서 사회 내에서의 자신의 역할을 만들어 가는 것. 그래서 최선을 다한다면 미래가 열려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미래를 열어주는 것이 현시대 우리사회에 기대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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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inheepak 2014-07-22 10:32:44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jinheepak 2014-07-22 10:32:44
좋은글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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