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희섭의 정치학-마피아와 불신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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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의 정치학-마피아와 불신 (1)
  • 신희섭
  • 승인 2014.05.30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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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섭 정치학 박사
고려대학교 평화연구소 선임연구원

2014년 4월 16일 세월호참사가 발생했다. 세월호에 타고 있던 이들을 대피하고 구조하는 과정에서 드러난 청해진해운이라는 회사의 운영방식이나 대한민국정부의 재난안전관리 대비나 재난을 처리하는 방식은 망연자실하게 이 참사를 보고 있는 사람들을 더욱 참담하게 했다. 정부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고 대통령은 눈물을 흘려가며 대국민사과를 하였다. 정부부처의 조직개편안을 내놓았지만 정부에 대한 시민들의 불신이 줄어들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세월호가 한국사회가 가진 그간의 부패구조를 그대로 드러내면서 정부와 기업체와의 밀착과 정부부처의 체계적인 자기 이익 챙기기와 ‘관피아’로 지칭되는 권력화현상의 민낯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이제 과거에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없었던 정치학의 본질적인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과연 국가의 본질은 무엇이며 국가는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가? 안전과 자유보장이라는 목표를 위해 사회가 계약을 통해서 구성한 국가의 기능은 시민을 위한 것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제도화가 진행된 자기 자신의 권력강화에 있는가? 국가의 정당성이 있다면 국가를 운영하는 정부에도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국가와 정부의 정당성은 무엇으로 가능한가? 다른 한편 사회에는 신뢰라고 하는 것이 어느 정도 존재하는가? 아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무엇에 기인하는가?

정부의 신뢰붕괴는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사회전체적인 신뢰의 붕괴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구성원상호가 서로를 불신하는 사회. 이런 상황은 정치학적으로 사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신뢰(trust)’의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피게 한다. 신뢰는 불신의 반대이며 불신은 부패의 문제에 대해 들여다볼 것을 요구한다. 이번 시간에는 신뢰, 불신, 부패와 관련하여 이론적인 차원에서 이전에 쓴 글을 하나 소개한다.1) 2008년의 글이지만 이론적인 측면에서는 현재 상황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여전히 매우 적실한 도구가 될 것이다.

한국마피아들은 자기 자식을 어려서부터 훈련시키는 방식이 있다고 한다. 그들은 자식들을 높은 벽에 올라가게 한 뒤에 자식들에게 뛰어내리도록 요구한다고 한다. 그러면 겁에 질린 아이들은 섣불리 뛰어내리지 못하는데 이때 부모인 마피아들은 자신이 잡아 줄 테니 뛰어내리라고 강요한다. 결국 아이들은 뛰어내리고 곧바로 그들은 부모에게 속았다는 것을 배운다. 땅바닥에 떨어져서 다친 아이들에게 부모인 마피아들은 한 가지 교훈을 알려준다. 그것은 “살아가면서 절대 부모조차도 믿지 말라”는 것이다.

정치 문화의 현대적 설명 중에 ‘사회적 자본론’이 있다. 사회에 신뢰와 믿음이 있을 때 사회 도처에서의 성과가 좋아진다는 이론이다. 이 분야에 유명한 이론가가 로버트 푸트남(R. Putnam)이다. 위의 사례는 로버트 푸트남이 이태리 지방들마다의 경제적 성과와 지방 정부 정책의 성공차이를 각 지역의 문화적 차이를 통해서 설명한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거대한 정치문화를 통한 설명이나 사회적 자본이란 것을 통한 거시적 수준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위의 이야기가 무엇을 의미하고 무엇을 설명하게 할지를 안다. 부모에게 어려서 배운 불신과 불신의 세습화야 말로 일생을 두고 그 자식들에게 커다란 삶에 교훈이 되지 않겠는가? 부모조차도 믿을 수 없다면 도대체 살면서 누구를 믿고 살아갈 것인가? 마피아들이 살아가는 정글과 같은 세상에서 그나마 목숨부지하면서 살아가려면 철저히 다른 사람을 믿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태리가 아닌 우리는 불신으로부터 자유로운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우리사회에 불신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이명박 정부는 747로 대표되는 성장정책을 통해서 기존 정부들의 성과부재를 뛰어넘어보겠다는 이명박 후보의 약속과 그 약속에 대한 유권자들의 믿음에서 출발했다. 하지만 집권과 동시에 정부의 성장정책은 한발 물러섰다. 대통령은 소고기 문제로 터진 촛불 시위에 사과를 하였지만 정작 소고기문제는 커다란 변화 없이 부분적인 수정을 거쳐 집행되었다. 중국 멜라민이 중국 분유에서 검출되면서 우리 정부는 중국 멜라민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하였지만 다음날 아이들이 먹는 과자에서 중국 멜라민이 검출되어 나왔다. 이런 정부에 대한 불신으로 인해 정부의 어떠한 경제정책적 신호도 시민들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해석이 되어 나타난다.

정부에만 불신이 있는가? 그런 것 같지 않다. 사회에도 불신의 벽은 높다. 오죽하면 다른 사람들의 오해와 따가운 시선으로 인해 유명한 여배우가 아이들을 남겨둔 채 자살을 했겠는가? 사람들은 사회의 다른 사람들을 믿지 않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사설 경비 업체가 늘어나고 가입자 수도 늘어나고 있다. 학교 공교육을 살리겠다는 정부의 방침은 메아리가 된지 오래이다. 부모들이 자신의 자식들이 가는 학교와 그 곳의 선생님들을 믿지 않는다. 오히려 사설학원의 강사들에 대한 신뢰가 더 높다. 공교육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들은 사설학원의 규모를 키워주는 인센티브로 작용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사회의 불신이 더욱 강해지는가?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자본주의의 시장 논리가 사회를 장악하면서 속도와 자본의 논리가 사람들을 지배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빨리 빨리 그리고 조금 더 안전하려면 지금 뭔가를 더욱 확보해 두어야 한다는 논리는 ‘우리’와 ‘공동체’ 보다는 ‘나’를 중심으로 사고하게 하고 그런 이기적인 시각은 자연히 다른 사람을 보는 시각에도 투영되는 것이다. 홉스가 이야기한 만인이 만인에 대해 투쟁하는 자본주적인 정글 법칙이 작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자본주의 법칙 말고 개인들이 만들어내는 것도 있다. 그것은 바로 부패이다. 2008년 보건복지가족부의 이봉화 차관이 ‘쌀 소득보전 직불금’ 부정 수령으로 사퇴압력을 받으면서 커진 공무원의 쌀직불금 파문은 서울과 과천에 거주하는 공무원 520명과 공기업 임직원 177명이 2006년분 쌀직불금을 수령한 것을 드러나게 만들었다. 농민의 소득을 보전하기 위한 조치로 마련된 돈을 이들 공무원들이 실제 농사를 짓지 않으면서 법을 남용해서는 실제 경작을 하는 농민들이 받아야 할 돈을 챙긴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은 2008년 7월 서울시 교육감 선거 때 학원, 사학 관계자들 뿐 아니라 급식업체로부터도 돈을 받았다고 한다. 아이들의 교육과 관련해서 모범이 되어야 할 자리에는 정치논리만이 남겨진 채 각종 후원과 청탁이 난무하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시켜주었다. 공공연하게 저질러지는 학교 내의 비리나 학생에 대한 성추행 문제들은 이런 부패구조의 만연 속에서 부끄러움 없이 저질러지는 것이다.

물론 더 많은 비리들이 사회 도처에서 진행되고 있으며 이 문제가 비단 대한민국만의 문제도 아니다.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의 근원은 언젠가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큰 건을 해보려는 미국의 금융업자들의 농간에 의한 것이다. 그것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경제를 전반적으로 활성화시킨다는 차원에서 방조한 미국 정부의 책임 역시도 그 부패 구조의 한 부분을 이루고 있다.

어떻게 보면 실제 생활 속에서 사람들이 어깨를 부딪치면서 살아가고 그 과정에서 조금이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기려고 한다는 점에서 “작은” 부패는 자연스러운 것인지 모른다. 급행비 혹은 급행료는 다른 이보다 자신의 입장을 조금 더 적은 비용으로 조금 더 큰 이해를 가져오게 해주기 때문에 받는 사람이나 주는 사람이나 상호 이해가 맞아 떨어진다. 너무 빡빡하게 굴지 않는 것이 하나의 사회적 예의가 된 문화적인 풍토는 사소한 잘못에 대해 너그러운 것이 사회화라고 믿게 한다. 또한 사소한 부패는 사회를 원활하게 돌아가게 하는 윤활유라고 생각되어 질 수도 있다. 게다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묻어가기 식의 사고는 사소한 부패에 동참하지 않을 때 혹은 그것을 고발하는 내부 고발자가 될 때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동료의식의 부재로 비춰져 비난의 화살이 부패에 동참하지 않은 사람에게 돌려질 수도 있다.

부패는 자기의 몸집을 키워감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더 강하게 하는 스모선수와 같다. 어느 단계를 지나기 전까지 그것은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알기 어렵다 그 선을 넘어서면 자기 통제의 범위를 넘어선다. 그리고 그 존재만으로도 위압적이 된다. 그 회귀불가능지점을 지나는 것이 스모선수에게는 승리와 명예를 안겨다 줄지 모르지만 부패는 사회의 존속에 위협이 된다는 점에서 둘은 다르다.

사회 각 분야에 불신이 팽배하고 부패해 있다는 것은 그 사회를 주도하는 지도층에게 막중한 질문을 던진다. 지도층에서의 부패가 많든 적든 간에 그들에게는 자신들이 부패를 저지른 작위의 책임과 사회가 부패하지 못하게 막지 못한 부작위의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를 이렇게 지도층으로만 귀결시키는 것이 바람직한가 하는 점이다. 이보다는 부패구조를 줄이기 위해 우리는 사회와 문화로 다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더욱 강력한 규율과 처벌을 강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구축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다음 시간에는 부패와 관련된 아이디어를 냈던 과거 사상가들로부터 어떤 답이 있는지를 알아본다.

 

각주)-----------------
아래의 글은 법률저널 39회(2008년 10월 15일)를 수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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