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소설가 김민효의 “그래, 낙타를 사자”와 진짜 낙타 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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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소설가 김민효의 “그래, 낙타를 사자”와 진짜 낙타 사기
  • 오시영
  • 승인 2014.05.23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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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소설가 김민효는 자신의 소설집 “그래, 낙타를 사자”에서 “그래, 낙타를 사자”고 독자들에게 담담히 토로한다(푸른사상 출간, 2014년). 사막을 잃어버린 현대인들에게 낙타를 사자고 속삭인다. 소설집에는 단편으로 ‘스타킹’, ‘토로소’, ‘그래, 낙타를 사자’, ‘그들은 로그아웃을 모른다’, ‘금륜의 봄날’이, 중편으로 ‘화이트 아웃’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소설가 김민효는 이 소설들을 통해 말하고 싶어 한다. 작가는 어린아이인 한 여자에서 늙어 죽음으로 방치된 한 여자에 이르기까지 개체인 약한 여자의 모습을 통해 현대사회가 안고 있는 사회적 문제들을 거침없이 고발하고 있다. 허위와 가식으로 포장된 가면 속의 인간모습을 여과 없이 보여줌으로써 해체된 인간의 슬픔을 조명하고 있다. 조직된 현대사회가 개체인 인간을 얼마나 능멸할 수 있는지, 능멸된 인간의 대가를 통해 계급사회 정점에 위치한 자들이 자신의 탐욕을 어떻게 채워가고 있는지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해체된 개체적 인간의 발버둥을 통해 깊이 모를 슬픔과 그 슬픔을 딛고 일어서려는 억압받는 자들의 강인한 삶의 의지를 격려하고 있다. 마치 속옷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 모래 알갱이 한 알이 얼마나 우리의 살갗을 껄끄럽게 하는지, 그 껄끄러운 머들거림을 통해 잊혀졌던 거대한 모래사막을 꿈꾸게 하고, 궁극적으로는 말한다, 그래 낙타를 사자고. 우리라고 못 살 게 무어 있느냐고.

언어는 상징이다. 필자가 본란을 통해 수없이 주장해 온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9일 세월호 침몰참사와 관련된 대국민담화를 눈물 흘리며 발표하였다. 하지만 참 슬프게도 그 담화 속에서 상징조작의 날카로운 비수를 발견한다. 발표문을 접한 순간 필자는 머리가 띵해져 왔다. 황당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표현대로라면 멘붕상태가 왔다. 세월호가 침몰했음에도 선박 안의 승객을 한 명도 구조하지 못한 해양경찰대에게 책임을 묻겠다며 “해경 해체”라는 극단적 해결방안을 제시하는 것을 보고서 말이다. 마치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부터 한꺼번에 많은 황금알을 얻고자 거위의 배를 갈라 거위를 죽게 하는 어리석은 자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응방법은 천암함사태발생과 관련하여 북한 어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해군의 책임을 물어 해군을 해체해야겠다거나, 북한 무인기에 대한 대응을 잘못한 책임을 물어 육군을 해체해야겠다거나, 화재진압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고 해서 소방서를 해체하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잘못된 대상을 해체시켜 공중분해시킴으로써 비난의 대상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발상은 참으로 후안무치한 상징조작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양궁경기장에서 과녁을 없애버리고, 축구시합에서 골대를 없애버리겠다는 이러한 발상은 “살리는 정책”이 아닌 “죽임의 정책”일 뿐이다. 말이야 “해경 해체” 한 마디이지만, 아마 조직 개편에 낭비되는 국가예산은 수천억 원이 소요될 것이다. 해경의 제복을 새로 맞춰야 할 것이고, 간판을 새로 달아야 할 것이고, 각종 시설 및 장비의 로고를 바꾸는 데만도 얼마나 많은 국가예산이 낭비될지 모를 일이다. 돈, 돈, 돈이 필요하다. 머리가 돌 일이다.

소설가 김민효는 ‘스타킹’에서 자기의 남자로부터 성폭행당한 딸아이에 대한 복수를 위해 자기의 남자를 파멸로 이끌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힘을 가진 자기의 남자의 아이를 자신의 몸에서 제거하는 수술대에서 여자는 “끝까지 버둥거리던 태아가 잘려진 채로 조각조각 질 밖으로 빨려나간다. 남자가 깨끗하게 비워진 자궁의 문을 닫는다. 그리고 마지막 판석으로 천장을 덮는다. 별빛이 모두 사라진다. 내 자궁 속은 오래된 무덤처럼 캄캄해진다.”라며, 잘못된 현실을 밀어내고 과거의 문을 닫는다. 하지만 슬프게도 약한 피해자의 복수는 복수가 끝나더라도 피해자는 여전히 피해자로 남아 있게 된다는 사실이다. 복수를 통해 피해는 결코 복구되지 않는다. 여기에 또 다른 현대인의 절망이 있는지 모르겠다. 작가는 ‘토로소’에서 어린 시절 동네 고교생에게 성폭행을 당한 20세의 모델이 엄마의 오해로 성폭행범으로 오인고소되어 나중에는 무죄가 밝혀지지만 모든 것을 잃게 된 엄마의 남자를 사랑하며 주인공 모델이 되어가는 과정을 통해 모델사회의 치부를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딸과 몸사랑을 나누는 엄마의 남자는 그 절정의 순간 죽은 엄마의 이름을 부른다. 맘사랑과 몸사랑은 어디에서 갈라지는가? 모델은 감독의 컨셉에 따라 나만의 성, 아이 캐슬(I Castle)을 읖조리며 자신의 감옥에 갇힌다. 작가에게 나만의 성이 性인지, 城인지, 聖인지 함의적이다. 하지만 거대한 자본의 소모품이 되어 미소를 팔아야 하는 모델은 죽은 엄마의 남자 품에서 여전히 슬플 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국민담화를 통해 세월호 참사의 모든 책임이 자신에게 있다면서 몇몇 희생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을 영웅이라 치켜세우고 눈물을 흘렸다. 어떤 이는 진정성 있는 안타까운 눈물이라 평하고, 어떤 이는 악어의 눈물일 뿐이라고 평가했다. 어떤 눈물이었든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들어 가장 많은 눈물을 흘린 것은 사실이니 그것만으로도 심리적 치유를 본인 스스로 많이 가졌으리라 싶다. 피해자를 위해 흘리는 눈물은 궁극적으로 눈물 흘리는 본인을 구원해 주는 것이니까 말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담화문을 통해 관피아를 근절시키겠다고 호언하였다. 그런데 그 담화 직후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재직하던 이중희를 서울고등검찰청 검사로 임용발령내었다. 검찰청법은 검찰의 정치적 독립을 위해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금지하고 있다. 그래서 현직검사이던 그를 청와대 민정비서관으로 임명할 때 이미 사표를 받았었다. 그런데 민정비서관을 그만 두자마자 친정인 검찰청으로 보내기 위해 검사로 재임용한 것이다. 이는 검찰청법이 금지하고 있는 현직검사 청와대파견을 피하는 교묘한 편법에 불과하다. 또한 대선 당시 현직검사를 청와대로 부르지 않겠다는 공약을 스스로 어긴 것이나 다름없다. 이러한 사실은 눈물 흘리며 담화를 발표하던 박근혜 대통령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자신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에 불과하였음을 스스로 증명한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이런 사실 앞에서 정상적 사고를 가지고 있는 일반인이라면 박근혜 대통령의 사고와 행동의 불일치에 고개가 갸우뚱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신의 행동과 언어의 불일치에 대한 인식부재현상은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심각한 상태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런 자가당착적인 모순된 행동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있다는 점이다. 세상 사람이 다 알고 있는 현상을 본인만 모르고 있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말이다. 오죽하면 유체이탈의 화법이라는 비아냥거림을 시중으로부터 듣겠는가 말이다. 알고서도 계속 이를 행한다면 이는 스스로 거짓말쟁이라는 것이고, 만일 인식하지 못한 채 하고 있다면 이는 심각한 오류상태이므로 신경정신의의 상담이 필요하지 않겠는가 싶어 염려스럽다는 것이다. 이를 방치하고 오히려 조장하는 청와대 인사참모진들의 무모함은 몰염치의 극치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준의 모호함은 미래예측가능성을 불가능하게 하여 불안정사회를 조장하게 되니 문제인 것이다.

소설가 김민효는 소설집 제목이기도 한 ‘이제, 낙타를 사자’에서 능력을 인정받던 남편이 S기업의 부정비리를 알게 되고, 그게 원인이 되어 아파트투신자살이라는 예상치 못한 타살성 자살 후 정신병동에 강제로 갇혀 지내다 퇴원한 삼십대 후반의 여주인공이 뇌종양으로 죽을지도 모를 수술을 거부한 채 학창시절 꿈꾸던 사막여행을 떠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남편이 죽은 후 그의 흔적들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정신병동에 갇혀 기억을 세뇌당한 여주인공이 거대한 자본과 죽음에 대항하는 유일한 방법은 사막으로 떠나는 것뿐이라는 사실이 현대인의 슬픈 자화상처럼 크로즈업 된다. 하지만 세상으로부터 내몰리면서도 자발적 주체성을 가지고 좌절하지 않고, 모래바람이 몰아치는 사막 한 가운데에서 “낙타를 아예 사자”고 부르짖는다. 자본에 억압된 개체적 인간들이 각자도생의 해체의 길에서 몰자아적 조무래기들이 되지 말고 모두 자아를 정립하여 작은 용기를 내어 각자의 남편이 감추어둔 S기업의 비밀장부를 공개하자고 주장한다. 그 비밀의 장부가 공개되면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진실이 승리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독자인 내 눈에는 그렇게 읽힌다.

이번 세월호 참사 보도과정에서 KBS 길환영 사장이 청와대의 지시에 따라 세월호뉴스를 보도통제하였다는 김시곤 전 보도국장의 자폭적 폭로로 언론이 시끄럽다. 진실을 밝히지 못하도록 사람을 움츠리게 하는 가장 큰 동기는 두려움이다. 그런데 두려움은 남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경우가 더 많다. 물론 외부적 압력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경우에는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없겠지만, 어느 순간 “그래, 내가 죽자”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그러한 두려움마저 사소한 것이 되어 버리게 된다. 박근혜 정부의 언론통제는 없는 듯 알게 모르게 시행되었던 듯싶다. 하지만 아이폰으로 상징되는 현대사회는 더 이상 감추어질 비밀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라는 점을 우리 모두가 자각했으면 한다. 특히 언론조작의 유혹 앞에 놓여 있는 청와대 참모진, 일부 권력자들이 절감했으면 싶다. 대한민국은 5천만 명의 기자와 고발꾼이 존재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모두가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찍고, 녹음을 한다. 깨어진 언로를 통해 각자 의견을 개진한다. 예전 같으면 다 감추어질, 밝혀지지 않을 사실들이 세월호 침몰과정에서 학생들이 찍은 동영상과 문자메시지로 살아나고 재구성되어 밝혀지고 있다. 거짓이 통하지 않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모든 국민이 이제 낙타를 사야 할 때가 되었다고 들고 일어서고 있다. 스스로 낙타를 사서 사막을 건너겠다는 것이다. 이를 방해하는 자를 용서하지 않겠다며 촛불을 밝히고, 시국선언에 동참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해경을 해체하여 버리겠다는 박근혜 대통령의 담화는 “과녁을 없애버린 양궁경기”를 하겠다는 하책 중의 최하책을 발표한 셈이 되어 국민의 비난을 고조시키고 있다. 소설가 김민효는 소설의 말미에서 담담히 말한다. “해는 모래언덕 너머로 완전히 기울어진다. 사막에는 바람 무늬가 다시 새겨진다. 사람의 길은 보이지 않는다. 낙타의 길도 보이지 않는다. 사람을 태운 낙타의 발자국이 바람 무늬를 헝클며 길을 만든다. 다시 바람은 그 길을 지우고 자신의 무늬를 새긴다. 밀봉된 봉투도 그곳에 도착해 있을 거라고 믿는다. 여자의 몸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길잡이가 되어줄 별은 아직 뜨지 않았다.”라고. 하지만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 국민은 길잡이가 되어 줄 별이 뜰 것을 기대하고 있다. 특검을 통해 밀봉된 봉투가 열리고, 관피아의 누적된 적폐가 밝혀지고, 해결책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런 믿음마저 없다면 슬퍼서 어찌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작가는 중편 “화이트아웃”에서 대필작가로 살아가는 여주인공을 통해 자신들의 위인전을 대필해 달라는 가짜인생들의 “화려한 가장행렬”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고 있다. 마지막 순간 가짜인생의 늙은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대리부인역할”까지 대행하며 권력과 금력이라는 허위의 성공탑을 향해 거짓과 위선 속에 살아가는 속물들을 비웃고 있다. 하지만 의지를 세우는 대필작가는 현실에서 슬프다. 힘이 없다. 뇌까리듯 인용하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그래도, 가장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았으리. 우리의 출발은 오직 그것을 위해 …….”라는 시 한 구절을 붙든다. 도덕적 우위에 서 있는 대필작가이지만, 가장 좋은 것은 앞날에 남아 있다는 희망을 스스로에게 세뇌시키지만, 현실 속의 대필작가는 미약하고, 가짜인생은 강하다.

하지만 작가 김민효는 말한다. 그 까짓 죽음이 대수냐, 밀봉된 봉투를 열고, 감추어진 우리를 드러내고, 낙타를 사면된다고. 6ㆍ4지방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 국민에게는 다시 한 번 어떤 낙타를 살 것인지 결정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미개한 국민이라는 말이 未開한 국민과 美開한 국민 중 어느 미개한 국민이 되는지 지켜볼 일이다. 사람의 길이 사라진 것 같지만, 모래사막에조차도 그 길은 살아 있을 것이라 믿는다. 어두운 밤 어김없이 별이 뜨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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