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사랑은 필통(feel痛), 세월호 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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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사랑은 필통(feel痛), 세월호 참사
  • 오시영
  • 승인 2014.05.02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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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사랑에는 진정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이 있다.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하라면 나는 필통(feel痛)이라고 대답한다. 상대방의 고통을 함께 해 주는 것 그게 사랑이다. 사랑에 빠지면 기쁘고 행복하다. 얼굴에 웃음꽃이 피고, 매사가 의욕적이고 즐겁다. 이러한 일상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든 거짓된 사랑이든 모두 같다. 하지만 거짓된 사랑은 평안할 때는 원 없이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대상에 대해 불편해 지거나 고통스러운 일이 생기면 어김없이 배신하고 만다. 반면에 진정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힘든 일에 처해지거나 고통스러워할 때 더더욱 측은지심이 발휘되고,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대상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고자 다가간다. 그리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라도 사랑하는 대상을 지키고 보호한다. 이처럼 두 가지 사랑은 무사 평온할 때에는 구별 없이 같아 보이지만 막상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확연하게 구별된다. 배신의 길을 걷는가, 아니면 계속해서 사랑하게 되는가 하는 결과에 의해 거짓된 사랑과 진정한 사랑은 구별된다고 하겠다.

거짓사랑보다 더 무서운 것은 진정한 사랑과 거짓된 사랑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무관심이다. 거짓되었든 진실되었든,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 있을 때는 감정이 살아 있어 인간답다는 평가를 내릴 수라도 있다. 하지만 무관심의 단계에 이르면 無痛의 상태가 되어 아예 감정이 반응하지 않는다. 이번 세월호 참사에서 피해 유가족들이 분노하고 국민들이 슬퍼하는 이유는 박근혜 정부의 무통의 상태에 이른 피해자들에 대한 사랑부재에 대한 분노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갈되어 버린 감정은 인간을 삭막하게 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 앞에서 유난히 세계 유수 언론들이 앞 다투어 한국사회를 집중조명하고 있다. 그들의 글에서 느껴지는 공통점은 “선진국 대열에 들어섰다고 자화자찬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통렬한 야유”라고 할 것이다. “그러면 그렇지, 네깟 것들이 별 수 있어?” 하는 조롱과 비아냥거림이라고 할 것이다. 이번 세월호 참사를 통해 우리 스스로도 우리의 민낯을 보았지만, 세계는 우리의 벌거벗은 모습을 보아버린 것이 아닌가 싶다. 조금 잘 먹고 살게 되었다며 자화자찬과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던 우리가 얼마나 추하게 살아왔는지 만천하에 공개된 느낌이다. 가면 속의 진면목을, 화려한 옷에 감추어진 추한 몸뚱이의 진실을 우리는 이제 직시해야 할 때가 왔다고 생각한다. 이번 세월호 참사는 우리가 그동안 등한시해 왔던 삶의 질, 발아래 깨지기 직전의 녹아내리는 한강의 얼음판 위에서 춤춰온 우리가 얼마나 위험한 행복을 추구하며 눈 뜬 장님의 삶을 살아왔는지, 그 얼음판이 깨어질 때 얼마나 무서운 삶의 보복이 가해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할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 때부터 우리는 그 전에 듣지 못했던 “국격”이라는 말을 귀가 아프게 들어왔다. 인격이라는 말에 익숙했던 우리 국민에게 이명박 대통령은 낯선 국격이라는 단어를 귀에 못이 박히게 읊어댔다. 국가의 인격 내지 국가의 품격이라는 의미일 텐데, 아마도 국가의 품격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단어 속에 전체주의나 집단주의사상 같은 국가지상주의사상이 엿보여 필자는 개인적으로 국격이라는 단어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명박 정권은 참으로 많은 국격훼손행위를 해왔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참사와 그 구조과정은 어찌 보면 대한민국 국격훼손의 최고대명사가 되었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시단 말석의 시인으로 살다 보니 직업인 법률가로서의 냉정함도 있지만 시인으로서의 통점도 있어, 이번 세월호 참사 앞에서 필자가 느끼는 고통 또한 극심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즐겁게 출발한 수학여행길 또는 새로운 삶의 여행길에 나섰던 수많은 여행객들이 세월호 침몰이라는 공포 앞에서 느꼈을 통점들이 가시처럼 비수가 되어 심장을 찔러 오니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마 이번 세월호 참사 앞에 모든 국민들이, 자기 책임모면에 잔머리 굴리고 있을 몇몇 사람을 빼놓고는, 필자와 동일한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기에 정부의 늦장구조와 책임회피를 위한 술수에 분노하고, 무기력증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이번 사태의 본질은 무엇일까? 물론 눈앞의 현상으로만 보자면, 돈독이 오른 선주가 낡은 배를 수입하여 위법한 구조변경 후 과적토록 하여 책임감 없는 선장 등 선원들로 하여금 무리하게 운행토록 하여 침몰하였고, 이를 감독해야 할 관련 공무원들이 이를 제때 감독하지 못하였고, 침몰 후 구조대가 제대로 구조활동을 입체적으로 수행하지 못한 것에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필자는 계속해서 눈앞에 보이는 현상이 아닌 보다 본질적인 원인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일까 하는 근원적인 사회현상에 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 이번 세월호 참사는 “사랑의 부재”에서 빚어진 종합적 인재였다는 결론에 이른다. 21세기 대한민국은 “사랑의 부재 완성”을 국가의 총체적 목표로 내세우고 매진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 앞서 필자가 말했든 사랑은 필통이다. 사랑의 대상에 대한 깊은 통증을 공유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통증을 느낄 경우 자기 생명도 내어놓게 된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의 행동이 그렇고,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연인의 모습이나 국가사랑에 대한 애국심이 그렇다. 하지만 이번 세월호 선원들을 보면 선박에 대한, 승객에 대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했다면 그렇게 쉽게 버리고 나올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승객의 탈출을 돕다가 끝내 숨진 여승무원 박지영씨나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네준 후 대신 죽은 단원고 정차웅 군 등에게는 타인의 목숨이 자기 생명처럼 소중했기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세월호 선장 이하 승무원들은 하나 같이 자기 목숨 살리기에 급급한 나머지 선장으로서, 선원으로서의 책임감이 없었다. 사랑은 필통이고, 책임감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하는 대상을 결코 버리지 않는다. 까닭에 사랑은 대상에 대한 고통의 공유와 책임을 이행케 한다. 무한한 능력이 되는 것이다.

검경 합동수사본부의 발표에 의하면, 살아 도망쳐 구속된 선박직 직원 15명 중 6개월 미만 근무자가 10명에 이르고, 특히 차석의 지위인 1등 항해사 신모씨와 선박안전담당자인 조기장 전모씨는 세월호 출항 하루 전 입사자라고 한다. 15명 중 선장 등 세 명만이 1년 이상 근무자이고, 12명의 선원이 모두 단기계약직인데 선장도 1년 단위의 단기계약직이었다고 한다. 일반화의 오류라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계약직은 조직에 대한 충성도가 약하거나 아예 없을 비율이 높다. 언제든지 기업체로부터 짤리거나 본인 스스로도 언제든지 다른 안정된 직장으로의 이직을 꿈꾸고 있는 종업원들에게 그 조직에 대해 강한 유대감을 갖거나 충성심을 발휘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난망한 일이다. 하지만 이윤추구에 골몰하는 신자유주의시장경제이론에 함몰된 많은 기업들은 노동의 유연성이라는 과장된 거짓경제논리를 내세우며 비정규직, 임시직에 거의 환장한 수준에 이르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기업이 흥하면 종업원과 같이 흥해야 하고, 망하면 같이 망해야 하는 것이 정당하다. 그런데 대한민국은 언제부터인지 흥하면 기업과 자본가만 흥하고, 망하면 언제나 근로자가 먼저 망하는 이상한 원칙이 시행되고 있다. 언제나 기업은 살고, 국민은 망해 왔다. 아이엠에프 때부터 본격화된 이런 현상은 망해가던 많은 기업들이 막대한 국민세금투입으로 살아났으면서도 그때 쫓겨난 근로자들은 거의 비정규직으로 내몰리는 양극화의 출발선이 되었다. 이제는 비정규직에 의한 사회적 폐단이 사회의 기능을 마비시킬 역습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이 엄습해 온다.

최저임금이 제대로 된 것이라면 그 임금을 받아 근로자의 최저생활이 보장되어야 한다. 하지만 최저임금으로는 근로자의 평균적인 최저생활이 불가능한 것이 현실이다. 최저문화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 사회에 대해 만족하며 충성심을 발휘할 리가 없다. 그 극단적 현상이 세월호에서 총체적으로 발현되었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조직을 사랑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사랑해 봤자 근로계약기간 중에는 정규직에 비해 낮은 임금으로 차별받고, 근로계약기간이 끝나면 차갑게 내쫓길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행동은 그렇게 반응하였던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인간의 본질적 문제이지만, 환경이 만드는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으면 자식을 내다버리는 부모도 있고, 죽이는 경우도 있다. 사랑은 인간 본질의 것이지만, 사랑의 행위가 불가능한 환경 또한 사랑을 버리게 만들기도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건설, 운송, 화학, 자동차, 전자공장 등 많은 위험한 작업장에 비정규직이 넘쳐나고 있다. 저임금의 근로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하루하루 먹기 살기 힘든 이들에게서 그 조직에 대한 충성도와 사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노동의 유연성과 기업의 지불능력 등도 중요하지만, 이제 적정한 임금보장과 근로기간 보장이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고, 더 나아가 수요가 공급과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소득증대경제성장이론을 새롭게 정립할 시기이다.

4년 전 천안함사태를 교훈삼아, 1,600억 원을 들여 건조하고서도 필요할 때 써먹지 못한 통영함보다 당장 구조현장에 쓸 수 있는 커다란 바지선 몇 척만 준비할 수 있었더라면 보다 많은 승객을 구조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안타까운 상상을 해본다. 그 바지선에 수중으로 깊이 내릴 수 있도록 사다리형 고정폴대를 설치하거나 앞으로 길게 뻗어나가는 로봇팔 같은 시설물을 설치할 수 있었다면(그래서 침몰선박 가까이에 접근한 상태에서 잠수사들의 작업이 안정적으로 시작될 수 있었다면), 그 로봇팔에 선체를 절단하거나 유리창을 깰 수 있는 기능을 부여했더라면, 바지선 하단에 조류를 차단할 수 있는 차단벽을 설치하여 잠수사들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었다면, 빛이 집중조명되는 레이저광선의 수중조명등을 설치할 수 있었다면, 그러한 여러 대의 바지선들을 도하작전에서 공병부대가 설치하는 부교처럼 서로 접목하여 넓게 안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더라면 하는 상상을 해 본다.

세월호 참사 앞에서 국민들은 할 말이 참 많을 것이다. 그러면서 모두 또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비참할 뿐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자꾸 국민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할 것이 아니라 먼저 무엇을 해 줄 것인지를 생각할 때가 왔다. 케네디 대통령이 했던 말과 반대로 우리 국민은 국가에게 요구해야 한다. 착한 대한민국 국민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만을 교육받아 왔다. 그래서 그 임무를 여태까지 성실하게 수행해 왔다. 이번 사태에도 자발적으로 성금을 걷고, 미안해 하고 눈물 흘리고 있다. 이제는 국민이 국가를 향해 “국가, 너는 도대체 국민을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이제부터는 “사랑의 부재”를 조장하고 재촉하는 국가의 모든 정책은 재고되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위한 정책을 개발하여야 한다. 선장과 선원들에게 사랑의 필통이 있었다면 생떼 같은 어린아이들을 그렇게 죽도록 방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피해자와 그 가족들을 어떻게 위로한들 위로가 되겠는가마는 함께 아파하는 많은 국민들, 세계인들이 있음은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진정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실종자들의 무사생환이라는 기적을, 올바른 시신만이라도 구조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사랑이 실종된 무능한 박근혜 정부의 뒷북치기가 역겨울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뒤늦게라도 같이 아파하는 것이다. 같이 울어주는 것이다. 같이 울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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