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영화 “노예 12년” 그리고 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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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영화 “노예 12년” 그리고 총
  • 오시영
  • 승인 2014.03.14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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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총, 요즘 날 깊이 생각에 잠기게 하는 무기이름이다. 시카고에서 4개월을 지내면서 생각에 잠기는 것은 이 거대한 자유의 나라 미국이 어쩌면 총 한 자루에서 비롯되었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인간은 총을 통해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창과 칼, 활만 있던 전쟁터에서 총을 먼저 만듦으로써 먼 거리에 떨어져 있는 상대방을 조준사격거리 안으로 끌어들일 수 있게 되었고, 이를 통해 총 가진 자가 세상을 지배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결국 총은 세상을 지배하는 힘인 것이다. 이 총 앞에서 인간의 어떠한 말도 신념도 방패가 되지못하고 있다. 14-5세기 백인들이 먼저 총을 만듦으로써 수백 년간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영화 “노예 12년”을 보았다. 시카고의 한 극장에서 수많은 흑인과 백인 틈 사이에 끼어 앉아 그 영화를 보면서 이러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만 좌우가 돌아보아 졌다. 영화관을 가득 채운 어떤 흑인도 백인도 한 마디 말이 없었고, 모두 침묵 속에서 “노예 12년”을 관람하였다. 영화가 끝나고 마지막 엔딩 음악이 흐르는 사이로 누군지 모르는 관객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를 듣고 나도 모르게 나도 한숨을 내쉬었다. 숨 막힐 것 같은 목졸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한국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대부분이 황인종인 우리 사회 속에서 흑인과 백인의 이야기가 먼 이야기처럼 낯설게 느껴지고 관념적으로만 백인의 흑인에 대한 탄압과 착취를 이해했을 듯하다. 하지만 막상 수많은 흑인들과 백인들로 넘쳐나는 미국 현지에서, 그 노예의 땅 미국에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시간을 초월한 현실이 되었고, 백인과 흑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면서 영화관을 나설까 속으로 무척이나 궁금했다. 유심히 지켜보는 그들의 표정, 내 생각이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흑인들은 무척 충격을 받은 듯 눈빛이 심각했고, 백인들은 무언가 죄를 지은 듯이 조심스럽게 영화관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1840년대 미국, 흑인은 자유인과 노예 두 부류가 있었다. 북부 주에는 자유인인 흑인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남부 주에는 노예인 흑인이 대부분이었다. 자유인 흑인 솔로몬 노섭(치웨텔 에지오포 분)은 뉴욕 주에서 재능 있는 바이올리니스트로서 이웃으로부터 사랑을 받으며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백인 노예장수들의 거짓말에 속아 바이올린 순회공연을 떠나게 되었고, 워싱턴에서 인신매매범에게 팔려가 하루아침에 자유인 솔로몬에서 조지아주 출신의 흑인노예 플랫이 되어 루이지애나의 백인 농장주에게 팔려간다. 팔려가기 전 그의 자유인 주장은 무지막지한 노예장수의 채찍질에 공허한 메아리가 될 뿐이었다. 자유인에서 노예로 신분변화가 일어난 것은 바로 채찍질이었다. 아니라고 부인하면 패고 또 패고, 아니라고 부인하면 맞고 또 맞았다. 노예이기를 거부하며 자유인으로 살고팠기에 채찍질 앞에서도 살아남아야 했고, 자유인이 되는 순간을 기다리며 채찍질이라는 현실 앞에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던 솔로몬, 하지만 그의 정신은 노예 아닌 자유인이었다. 그는 솔로몬에서 플랫으로 이름이 바뀌면서 자유인에서 노예로 신분이 바뀌었다. 호칭이 바뀌는 것은 참으로 무서운 결과를 가져옴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다.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 자신의 세 번째 작품인 노예 12년에서 그는 두 명의 농장주를 통해 노예주인들의 잔인함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었다. 첫 번째 농장주 포드(베네딕트 컴버배치 분)는 솔로몬에게 바이올린을 사 주고 연주케 하는 등 백인으로써 인정을 베풀기도 하지만, 솔로몬이 관리인에게 대들었다는 이유로 관리인이 그를 목줄에 감아 나무에 매달아 두는 것을 못 본 척 묵인한다. 솔로몬이 목줄에 매인 채 한나절을 죽음과 사투를 벌리도록 방치한 후 내심으로 그의 반항이 두려워 두 번째 농장주에게 팔아버린다. 어디까지나 솔로몬 너는 노예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가장 착한 듯하지만 가장 노예체제에 순응하는 악한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 번째 농장주 에드윈 앱스(마이클 패스벤더 분)는 노예들을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잔인함을 보이며 전형적인 노예주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노예들에게 폭력을 서슴치 않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는 여자노예들을 강간하기도 한다. 하지만 흑인노예 팻시(루피타 니용고 분)를 강간하면서 사랑에 빠지는 모순을 보인다. 아내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팻시에게 집착하는 자기모순의 연기를 통해 인간과 재산이라는 흑인노예에 대한 이중성을 잘 나타내고 있다.

솔로몬의 최대 목표는 살아남아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러기에 동료 흑인노예들이 주인으로부터 학대를 받거나 심지어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도 반항하지 못한 채 자신은 자유인이라며 오히려 흑인노예들을 외면한다. 주인공의 이러한 이중적 모습에서 측은함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게 된다. 하지만 솔로몬 그는 결국 자신이 노예인 흑인들과 마찬가지로 흑인임을 자각하며 그렇게 좋아하는 바이올린을 스스로 박살내며 흑인영가를 다른 노예들과 함께 부르며 현실을 직시하게 된다. 우연히 떠돌이 노동자 베스(브래드 피트 분)의 도움으로 자유인의 신분을 되찾게 된 솔로몬은 가족의 품을 돌아간 후 그의 체험을 1853년에 “노예 12년”이라는 제목의 소설로 발표하여 출판 18개월 만에 2만7천부 이상이 팔리는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링컨 대통령에 의한 노예해방정책에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흑인 대통령 오바마가 집권하고 이제 그의 임기 후반부에 접어드는 시점에 흑인 감독 스티브 맥퀸에 의해 만들어진 흑인노예영화 “노예 12년”은 오스카상 최고의 상인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그 영화적 가치, 사회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미국에서의 노예는 값싼 노동력을 필요로 했던 백인들, 총을 등 백인들에 의해 만들어졌다. 만일 그들에게 총이 없었다면 아프리카의 흑인들을 위협할 수 없었을 것이고, 납치하여 노예장사와 노예노동을 통한 부를 축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흑인들보다 먼저, 아니 아메리카의 인디언보다 먼저 총을 만든 그 하나의 힘으로 인해 “거리의 공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이 넓은 아메리카 대륙의 기름진 옥토를 점령하게 되었고, 인디언들을 쫓아내고 흑인노예를 강제노역시킴으로써 오늘의 부국의 기초를 다졌을 것이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고 나온 후 며칠 동안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솔로몬 노섭의 노예이야기는 불과 170년 전, 아니 160년 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고 보면 지난 160년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고, 인권에 대한 개념도 많이 변했다.

하지만 이러한 차별의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지난 1일 미국 최고의 명문대학으로 꼽히는 하버드대 2학년생 키미코 마츠다-로렌스가 참다 못해 “나도 하버드 학생이야(I, Too, Am Harvard.)”라는 글을 SNS에 올린 후 백인학생들에 의한 흑인학생차별 및 멸시에 대한 거부운동이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인종차별이 우리 인간 의식 깊숙한 곳에서 짙은 염색체로 남아 있는 것은 아닌지 고통스러워진다. 마츠다-로렌스는 “이 캠페인이 흑인 학생을 넘어 유색 인종 학생 모두를 대상으로 하는 광범위한 운동으로 확산되길 바란다.”고 밝힘으로써 단순히 흑백의 문제가 아닌 모든 인류의 문제임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어떤 흑인학생은 “너는 내가 아는 흑인 중 가장 하얄 뿐이다.”라며 백인을 향해 인종차별적 행위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하고 있다. 영화 노예 12년과 하버드생들의 인종차별항의운동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됨으로써 앞으로 어떤 시너지 효과를 가져 올지 지켜볼 일이다. 유형적인 것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있지만, 무형적인 것은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나도 쉽게 바뀌지 않나 보다. 인간이란 참으로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채찍과 총으로 유지되었던 노예제도는 이제 사라졌다. 하지만 우리 앞에는 그보다 더 무서운, 형체가 존재하지 아니한 “계약이라는, 자본이라는 무형의 채찍에 의한 노예제도”가 거대하게 자리하고 있다. 총을 대체한 자본이라는 거대한 총구 앞에 가지지 못한 자들은 벌거벗기운 채 자유인이라는 주장을 하지 못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노예상인에게 붙잡혀 밀폐된 공간에 쇠사슬에 묶인 채 갇히게 된 솔로몬, 그에게는 무조건적인 채찍질이 가해졌다. 아무리 자유인이라고 외치며 몸부림쳤지만, 노예상인들이 내려치는 채찍질 앞에 솔로몬의 육신은 고통스러워야 했고, 정신은 고갈되어야 했다. 살아남기 위해 시키는 대로 일해야 했다. 반항하면 맞아야 했다. 목줄에 묶여 나무에 매달려야 했고, 죄 없이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가 12년의 노예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던 것은 의로운 떠돌이 노동자 베스의 정의로운 신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베스가 뉴욕주에 거주하는 솔로몬의 친구에게 그 사실을 알렸기에 그가 찾으러 왔고, 솔로몬은 노예에서 자유인으로의 신분을 회복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정의로운 법집행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본의 힘은 위대하다. 자본 앞에 모든 것은 왜소해진다. 정치도 왜소해지고, 정의도 왜소해진다. 주인의 채찍질보다 더 무섭게 사람을 노예화시키고 있다. 기업주에게 잘못 대항하면 그 자리에서 해고당한다. 동종 직종에서 열심히 일을 하지만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로 임금은 쥐꼬리만해 진다. 주가조작과 환율조작, 사소한 경영상의 이유를 앞세운 무차별적인 집단해고와 임금동결 등을 통해 자본은 거대한 산맥이 되어가고, 노동력밖에 없는 수많은 근로자들은 점차 노예화의 길을 걷고 있다. 누군가 정의로운 자의 고발과 법집행이 필요하다. 그 일을 정치가 담당해야 한다. 6.4지방선거를 앞두고 여야 정치권이 소란하다. 그들의 행동들을 분석하면 할수록 국민은 없고 오직 권력장악에만 몰두하는 모습이 보일 뿐이다. 부끄러움도 없고, 자신의 잘못에 대한 과거반성도 없다. 오직 앞으로 잘 하겠다는 과장광고만 난무할 뿐이다. 수많은 자유인이여, 솔로몬들이여. 이번에는 제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 노예상인에게 속아 노예로 팔려가는 솔로몬이 아니라, 지혜의 왕 솔로몬이 되어 정치꾼들의 선동정치에서부터 빠져나오기를 바란다. 잘못 속아 12년의 노예생활을 해야 했던 솔로몬의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진정한 투표의 자유인이 되기 위해 귀를 열고 입을 열고 눈을 열어야 할 것이다.

“노예 12년”의 엔딩곡으로 흐르는 “Nothing forgive”처럼 잘못한 자들에 대해 아무 것도 용서하지 말고, 현실을 직시하고, 노예가 아닌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지혜의 왕 솔로몬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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