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세 모녀의 자살과 성북동 비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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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세 모녀의 자살과 성북동 비둘기
  • 오시영
  • 승인 2014.03.07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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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자살은 인간 존엄의 최후 수단이다. 자살자의 심리를 잘은 모르겠지만 더 이상 비참해질 수 없다는 마지막 절박함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아닐까 미루어 짐작해 본다. 더 이상 살아있다는 것이, 살아간다는 것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순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살아도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느낄 때 그냥 죽어버리는 것이 자살이 아닐까. 자살을 시도해 본 적이 있다는 동료 시인 중 한 분은 자살은 인간이 갖는 마지막 용기라며, 자살도 용기가 있어야 실행할 수 있는 행위라며, 살아 있음에 대한 소중함을 이야기해서 들었던 적이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에 대한 강한 욕구가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순간 “생명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면 생명 자체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 없을 것이기에 생명에 대한 경외심이나 욕구 자체를 가지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태어나면서 생명 그 자체였기에 생의 스러짐이 인간 자체의 소멸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잘 알아 죽음이 원천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자살의 경우에는 인간 스스로 그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져버린 상태가 되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고 삶의 포기행위를 실행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니다, 아니겠지, 사는 게 너무 힘들어, 더 이상 삶을 지탱할 수 없는 고통과 아픔이 있기에 그 고통과 아픔을 잊고자 잠들고 싶은 것이겠지.

대한민국의 2014년 3월, 봄은 오고 있는데 가족 단위의 집단자살이 늘어나고 있다. 자살이란 일 개인의 문제이기에 혼자 죽고 사는 문제를 결정하고 혼자 죽는 것이 일반적 형태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갑자기 가족 단위로 집단자살이 늘어나는 추세를 보면서 우리 모두 심각한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가고 있다. 창밖 세상은 여전히 화려하고 찬란한데, 유독 집단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이들의 창안 세상은 춥고 어둡다. 집단자살을 결심하기까지 그들 의식의 내면에서 휘몰아쳤을 번민과 고뇌를 어찌 하란 말인가? 누군가 그들에게 죽기 직전 용기를 주고 희망을 줄 수만 있었다면 한번쯤 더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돌려먹지 않았을까?

김광섭 시인의 “성북동 비둘기”가 새삼스럽다.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본래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가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 돈다.// 성북동 메마른 골짜기에는/ 조용히 앉아 콩알 하나 찍어 먹을/ 널찍한 마당은커녕 가는 데마다/ 채석장 포성이 메아리쳐서/ 피난하듯 지붕에 올라 앉아/ 아침 구공탄 굴뚝 연기에서 향수를 느끼다가/ 산 1번지 채석장에 도로 가서/ 금방 따낸 돌 온기에 입을 닦는다.// 예전에는 사람을 성자처럼 보고/ 사람 가까이서/ 사람과 같이 사랑하고/ 사람과 같이 평화를 즐기던/ 사랑과 평화의 새, 비둘기는/ 이제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었다.”(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전문)

김광섭 시인이 1968년에 저 시를 발표했으니, 저 시는 1960년 중반 성북동을 중심으로 한 서울이라는 도시개발에 대한 또 다른 사회문제를 고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저 성북동 비둘기를 보면서 저 자살자들이 바로 성북동 비둘기로구나 하는 생각에 잠긴다. 도시 개발에 따라 수많은 이들에게 번지가 생겼는데, 오래 전부터 성북동에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비둘기들은 오히려 번지를 잃고 허공을 배회해야 하는 고통과 슬픔에 내몰려야 했으니, 그러한 사회현상이 가족 집단자살이라는 작금의 사회현상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산도 잃고 사람도 잃고 사랑과 평화의 사상까지 낳지 못하는 “쫓기는 새”가 되어 버린 성북동 비둘기가 되어 더 이상 버틸 힘을 잃고 자살이라는 극단의 길로 내달린 것은 아닐까?

지난달 26일 서울 송파구 석촌동의 단독주택 지하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60대 어머니가 몸을 다쳐 일을 못하게 된 후 두 딸과 함께 자살을 했고(그러면서도 현금 70만원을 남겨놓고 주인아주머니께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미안함을 아는 사람이었고), 지난 2일 동두천시 상패동 한 아파트 화단에 30대 어머니가 4살 된 성장장애아들과 투신자살을 했고, 3일에도 경기도 광주 초월읍 한 다세대주택에서 40대의 어머니가 장애를 가진 딸과 아들과 함께 세금고지서에 미안하다는 말을 써놓고 자살을 했다. 이들 모두는 이 사회로부터 도움을 받지 못한 채 삶의 번지를 잃어버린 성북동 비둘기였던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자살 규모가 표준 인구 대비 29.1명이라는 가장 높은 수치가 나왔고, 반면에 GDP 대비 사회복지비용은 최저 수준으로 밝혀졌다. 결국 국가예산 중 사회복지비용이 최저에 이르다보니 빈곤 사각지대의 빈곤층들이 국가의 도움을 받지 못한 채 혼자 고통당하다가 결국 가족집단자살이라는 형태로 발현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시카고 거리를 다니다 보면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 속에서도 “Homeless”라는 팻말을 들고 구걸하는 이들을 자주 보게 된다. 시내 곳곳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숫자도 상당하지 않을까 싶은데, 또 지나가는 행인들이나 자동차를 운전하고 가는 이들이 심심찮게 동전을 그들에게 쥐어주고는 한다. 이런 추위에도 얼어 죽지 않고 사는 홈리스들을 보면서 신기하다는 생각과 함께 부자나라라는 미국도 개인의 가난은 어찌할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62세가 넘은 사람은 집이 없을 경우 주택국에 주택신청을 하면 순서에 따라 아파트를 국가가 대여해 준다. 개인이 세를 얻으면 월 100만 원 이상을 호가하는 주택을 월 10만 원 남짓의 관리비만 부담하면 죽을 때까지 거의 무상으로 살도록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자녀를 돌볼 수 없는 형편인 경우에는 아동국에서 아이들을 강제적으로 데려다가 보육을 책임진다고 한다. 이처럼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미국에서는 우울증 같은 병적 원인으로 자살하는 사람은 있지만 먹고 사는 문제로 시달리다 자살하는 이는 거의 없다고 한다. 이런 사회적 안전망이 갖추어져 있는 것을 보면서 이런 사회가 선진사회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사회는 어찌 보면 한 달 먹을 것을 벌 능력만 있으면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닐까 싶다. 한 달 집세를 내고, 하루 먹을거리를 사면 어느 누구도 간섭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나라, 사는 걸 얼마나 마음 편해들 하는지 한국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편안함이 미국사회에는 넘치고 있었다. 남의 일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는 사회가 어찌 보면 건전한 사회인지도 모른다. 모두들 남의 일에 간섭하고 시시콜콜 개인의 의사를 표명하며 얼굴이 어떠니, 옷이 어떠니, 집이 어떠니 하면서 남의 일에 열을 내다가도 막상 사회적 제도 개선을 위해 의견을 모아야 할 문제에 대해서는 오히려 무심한 듯한 사람들이 넘쳐나는 사회는 어찌 보면 참 이상한 사회이다. 이상하게도 티브이 드라마 상당수는 정신이상자 같은 성격파탄자들이 주인공으로 나와 왜곡된 현실을 선도하고 있고, 대부분의 오락프로는 연애인들의 신변잡기 이야기로 도배를 하고 있는데도, 진짜 이상한 것은 그럴수록 이런 프로들이 인기를 얻고 있다는 사실이다.

60대 세 모녀 자살사건에 대해 박근혜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자살한 세 모녀가 기초수급자 신청을 했더라면 지원을 받았을 텐데 안타깝다.”고 지적하며, 이런 제도가 있어도 국민이 모르면 이용할 수 없으니 널리 홍보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국민들은 그러한 기초수급 대상자로 지정될 수 없는 복지사각지대에 방치된 사람이 세 모녀였으며, 지정신청을 해도 아예 받아주지 않을 영역이어서 그러한 방치가 자살로 연결된 것인데 이러한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며, 대통령의 안일한 현실인식을 비판하고 있다. 옛 말에 가난은 나라도 어찌할 수 없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한정된 국가예산으로 어찌 모든 사람을 다 구제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적인 원인도 있지만, 개인의 무능력과 사행심 등도 한 원인이 되어 가난의 굴레를 뒤집어 쓴 경우도 있을 것인데, 스스로가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계약사회에서 어떻게 국가가 모든 것을 책임질 수 있겠는가 하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한 반론 역시 맞는 말이다.

하지만 우리가 직시해야 할 점은 “파이의 절대풍족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2013년 대한민국 국민소득이 24,044불이니 개인당 2,500만 원 정도의 연간소득을 얻는다는 단순통계에 따르게 되면 저 자살한 세 모녀가 7,500만 원 가량의 소득을 얻는다는 계산이 나오지만, 실제 저 세 모녀가 얻은 연간소득은 2,000만 원이 되지 못했고, 도시민 최저생계에 절대적으로 부족한 빈곤층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러한 허위의 숫자놀음에서 벗어나려면 결국 국민 전체의 소득불균형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일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정부와 국회가 나서서 제도적 개선책을 마련해야 할 사항이라는 것이다.

결국 그 방안은 더 많이 버는 소득계층의 분담비율을 높일 수밖에 없고(동일한 노동에 대해 더 많은 소득을 올리는 것은 결국 타인의 부에 대한 착취나 과다한 부당이득의 수입구조가 장기화된다는 것 아니겠는가?), 적게 버는 소득계층의 소득이 높아질 수 있는 사회적 안전장치, 즉 최저임금수준의 인상, 동일직종 동일급여체계의 정비, 비정규직의 정규직으로의 전환 등등 사회적 제도개선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 정치의 제일순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대한민국은 성북동 비둘기들에게 번지를 부여해 주어야 하고, 비둘기들이 날개가 부러질 때까지 허공을 배회하도록 방치할 것이 아니라, 지상에 발을 딛고 살 수 있도록 쉼터를 마련해 주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야 하겠다. 정의가 개인별로 다르니 정의를 가지고 다툼이 벌어지는 사회는 진짜 해결책이 없다. 성북동 비둘기가, 콩 한 알을 집어 먹기 위해 성북동 1번지에 내려 앉을 때 우리 모두 쫓기는 새에서 사랑과 평화의 사상을 회복하고 잃어버린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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