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어둠이 넘치는 대한민국, 빚과 빛의 전환 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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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어둠이 넘치는 대한민국, 빚과 빛의 전환 필요
  • 오시영
  • 승인 2014.01.1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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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새해 아침, 대한민국은 어둡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주위는 어둡다. 하지만 이 어둠은 없는 듯한 태양이 떠오르면 밝아질 것이기에 희망이라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에 항시 있는 태양조차 제대로 빛을 발하고 있지 못한 현재 대한민국의 어둠은 절망적이다. 절망적인 이유는, 첫째가 가계부채가 물경 1,000조 원을 넘었다는 사실 때문이고, 둘째가 대기업 등에 쌓인 내부 유동성(현금화자산)이 500조 원을 넘었다는 사실 때문이고, 셋째가 유명 연예인의 아버지가 빚에 쪼들리다 치매에 걸린 노부와 폐암 말기에 이른 노모에 대한 치료를 포기하고 그들을 살해한 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비극적인 사실 때문이고, 넷째가 박근혜 정부의 국가경영철학의 부재 때문이다. 네 현상은 서로 낯선 듯 하지만 어느 한 꼭지점에서 만나는 운명적 일치점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해 이 네 현상은 서로 다른 현상처럼 보이지만 근원은 하나의 원리, 즉 상생으로 만나야 서로 해결되고 치유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들을 모두 만나게 해 우리의 어두움을 몰아내야 할 운명체적 공동숙제를 우리가 부여안고 있다고 하겠다.

빚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새로운 투자를 위해 부족한 자금을 외부로부터 끌어다 쓰는 것이고, 하나는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끌어다 쓰는 것이다. 투자를 위한 빚은 투자한 실물자산이 그대로 남아 있기에 빚이지만 감당할 여력이 있어 괜찮지만(물론 형해화된 기업이나 잘못 투자되어 망한 경우는 그러하지 못하겠지만), 부족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늘어난 빚은 말 그대로 호환보다 더 무서운 삶의 족쇄일 수밖에 없다. 가계당 평균부채가 5,800만 원을 넘어 섰다니 국민들이 은행 이자 등을 감당하다가 골로 갈 단계에 이르렀다고 하겠다. 이러한 가계부채 통계에는 호랑이보다 더 무섭다는 악성 사채 등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을 것이니, 실제로 서민들이 가계부채로 인한 고통은 두 다리가 절단될 단계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빚이 이처럼 늘어난 데에 대한 근원적 책임은 빚을 무분별하게 끌어다 쓴 국민 개개인에게 있다. 도덕적 해이도 있을 것이다. 게으름과 무능, 도박과 잘못된 투기 등으로 탕진된 재산도 상당히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국민 전체, 가계부채가 증가일로, 그것도 점차 가속도로 급증하는 현상은 빚을 내어 쓸 수밖에 없는 국가적, 사회적 환경에서 빚어진 책임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부동산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허황된 경제청사진을 국민에게 제시하며 빚을 내어 부동산을 사게 한 정부의 책임(그 후 부동산가격 하락으로 인한 하우스 푸어의 양산), 무차별적인 기업구조조정 등으로 인한 대량해고사태로 빚어진 경제적 무능력 계층 양산, 비정규직 등 상대적 하위 소득계층을 양산함으로써 절대소득 부족으로 인한 가계부채 증가, 부자감세로 인한 빈부격차의 양극화, 주택 및 상가건물 등에 대한 전월세가격의 급증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 등 그 원인을 따지려면 몇 날 며칠이라도 부족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학교를 졸업한 젊은이들의 취업문이 지나치게 좁다는 것은 심각한 사회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졸업하고서도 취업이 안 되니 생활이 독립되지 않고, 생활이 독립되지 않으니 결혼 등 가정을 꾸릴 수 없고, 그러니 출산율이 저하될 수밖에 없고, 인격적 비독립으로 인한 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이 깊어질 수밖에 없고.

박근혜 정부는 이 비정상의 대한민국에 대해 “비전 있는 국정철학”을 제시하여야 한다. 그러한 기조 위에서 앞의 세 가지 연결고리를 융합적으로 풀어나가는 특단의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대기업에 넘쳐나는 유동성을 자금이 고갈된 중소기업이나 가계로 흘러들어가게 하는 유인책을 수립해야 한다. 그 정책 중의 하나로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부자감세를 과감하게 철회하고 부자증세정책을 수립하여야 한다. 그리고 하청업체에 대한 무리한 단가후려치기나 계열기업에 대한 일감몰아주기 등의 불공정 사례들을 과감하게 적발하여 시정토록 해야 한다. 근로시간의 단축을 통한 새로운 고용창출의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 내가 머무르고 있는 이곳 시카고는 오후 네 시에서 다섯 시 사이만 되면 퇴근하는 사람들로 거리가 활기차다. 이 곳이라고 해서 야근하는 직장인이 왜 없겠는가마는 평균근로시간이 적기 때문에, 넘치는 업무를 충당하기 위해서 많은 근로자를 고용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이 작동되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가계소득을 높이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하나의 예로 최저임금제의 하한선을 과감하게 높일 필요가 있다. 최저임금제의 하한선을 맞출 수 없는 한계기업들에 대하여는 정부지원정책을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 예를 들어 지금의 최저임금이 시간당 5,210원인데 적어도 이 수준을 8,000원 정도로 과감하게 인상하고, 지불능력이 되지 않는 기업들에 대해서는 그 차액을 세제나 직접지원을 통해 지원해 줄 필요가 있다. 어차피 실업자나 생계보호대상자들에 대한 정부의 각종 지원금이 나가고 있는 판에 실업자를 만들어 실업수당만을 지급할 경우 국가재정부담은 늘어나면서도 그 실업자가 받는 절대액은 몇 푼 되지 않아 생활이 더 곤궁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지만, 정부가 보조금을 주어 기업으로 하여금 그를 고용토록 한다면 그는 기업에서 지급하는 임금과 정부보조금을 합해 많은 임금을 받게 되어 생활수준이 향상될 것이고, 늘어난 임금만큼의 가용소득이 늘어나 내수가 진작될 것이고, 늘어난 소득으로 가계부채의 일부를 갚아나갈 수 있는 여력이 생길 것이고, 기업도 생산성이 높아질 것이고, 경제활성화로 국가의 세수가 높아지는 선순환의 경제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당구를 쳐본 사람은 안다, 쓰리 쿠션의 묘미를. 당구공의 한 곳을 큐로 잘만 치면 그 공은 앞으로, 뒤로,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잘도 굴러가 공과 공 사이의 경계를 허물고 맞추고자 하는 공을 맞추어낸다. 정부의 경제정책은 당구의 쓰리 쿠션 같은 것이어야 한다. 대기업 등이 보유하고 있는 유동성 500조 원은 한 마디로 말해 고인 물이다. 예부터 고인 물은 썩는다고 했다. 아니 진짜로 고인 물은 썩는다. 안 썩으면 오히려 그것이 더 문제이다. 정부는 대기업들에게 투자를 통한 고용창출을 주문하는데 반해, 기업들은 투자할 곳이 없어 투자하지 못하겠다고 반발이 극심하다. 맞는 말이다. 국민들의 고혈을 빨아 먹을 만큼 빨아 먹어 1,000조 원의 가계부채를 지워 놓았으니, 서민들이 무슨 여력이 있어 새로운 수요창출에 나설 수 있겠는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부동산시장붕괴의 카운트다운이 10에서 이제 1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판단된다. 우리는 통상 이런 짓을 한다. 마지막 숫자 1에서도 해결책이 찾아지지 않을 때 통상 쓰는 편법, “반의 반”, 그것으로도 해결되지 않으면 “반의 반의 반” 하면서 종말의 시간을 유예시킨다. 그렇지만 우리가 반의 반을 찾을 때는 자식이 부모의 목숨줄을 조이기 시작하는 단계임을 유념해야 한다. 경제적 궁핍으로 치매의 노부를 요양원에 제대로 보내지 못하고 폐암 말기의 노모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하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지금 2014년 초반 벽두 대한민국 국민은 집단우울증단계로 내몰리고 있다. 집이 없는 서민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세금을 충당하지 못해 빚을 내고 또 빚을 내고, 집이 있는 서민은 언제 부동산시장붕괴로 하우스푸어의 신세로 전락해 집도 잃고 전세금도 돌려주지 못하는 빛 좋은 개살구 신세가 될지 몰라 전전긍긍하고 있다. 물론 경제적 여유가 넘쳐나 이러한 사회현상이 오히려 더 오래 가기를 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악조건 속에서 오히려 가진 자의 얼굴은 광채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흡혈귀 같은 제로섬 게임은 중단되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지 않고서는, 반의 반을 세는 마지막 숨결이 멈추는 순간 모두 자멸하기 때문이다. 반의 반을 세어야 하는 절박한 순간, 우리 모두는 통합, 융합의 정신으로 공동체 의식을 회복해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의 취임 후 사실상 첫 번째 기자회견을 뒤늦게 접한 소감은 “어떻게 이렇게 알맹이가 없을 수 있을까?”였다. 경제적 궁핍과 사회적 소외 속에서 수많은 국민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정의에 목말라 하며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고 외치는 함성소리에 대해 시원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정말 “깡통정부”인가. 대통령의 기자회견문에서 국민들에게 희망과 용기라는 설렘을 주는 문장 한 구절을 뽑아내지 못하는 청와대 참모들은 도대체 이렇게 직무유기를 해도 괜찮은 것인가? 대학교 신입생 정도의 레포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기자회견내용은 진짜 문제이다. 정치는 상징놀이이다. 언어는 상징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연설을 들으면서 외국인인 필자가 얼마나 가슴이 설레며 콩닥거렸는지 모른다. 긍정과 희망, 구체적 해결책 제시를 통한 국민에 대한 이해의 촉구 등 오바마의 연설은 듣는 이를 감동케 하는 힘이 있다. 연설은 설득이다. 언어의 상징을 통해 지지자와 반대자들에 대한 교감의 다리를 잇는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대통령의 기자회견은 자칭 언어쟁이인 필자의 소견으로는 낙제점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국민을 설득하고 납득시키려 나온 기자회견에서 “타협은 소통이 아니다.”라고 오히려 반대자의 의견을 전혀 듣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으니 말이다. 불타고 있는 섶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고 할 것이다. 물론 앞에 “불법적인 요구”라는 단서를 붙이기는 했지만, 이 불법에 대한 견해가 박근혜 대통령과 반대자가 서로 다른데, 자신이 생각하는 불법개념만을 원칙으로 내세워 반대자들에게 타협불가를 선언하는 것은 진짜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회견 후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기자회견은 무의미한 기자회견일 뿐이고, 오히려 분쟁을 양산할 뿐이다.

“하나의 정답이 아닌 다양한 해답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채현국 선생의 철학적 명제가 가슴에 와 닿는다. 박근혜 정부는 하나의 정답만을 요구하는 이상한 국정철학에 함몰되어 있다. 서울에서 부산 가는 방법이 어디 비행기뿐인가? 고속철도 있고 고속버스도 있고, 승용차도 있다. 어떤 이는 아예 걸어가겠다는 이도 있다. 이 모든 것은 서울에서 부산을 찾아 가는 해답이 된다. 비행기만이 정답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자. 어두운 대한민국을 밝음으로 인도하는 지혜를 모을 수 있도록 박근혜 정부는 더욱 노력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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