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일류국가는 “대통령이 국민의 변호인”이 될 때 성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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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일류국가는 “대통령이 국민의 변호인”이 될 때 성취된다
  • 법률저널
  • 승인 2014.01.03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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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새해 첫날 아침,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께 생떼 쓰는 기도를 드렸다 - 2014년부터는 노동자가 귀족처럼 사는 세상이 되게 해 달라고, 당신이 창조한 인간들에게 이 지구를 맡기며 세상만물을 다스리며 번성하라고 명령하셨으니 인간을 창조한 책임을 지고 당신께서 인간에게 그 권리를 보장해 달라고. 노동자는 사람이다. 평등하게 창조된, 태어난 사람 모두는 남의 노예나 종으로 살아야 하는 비극적 주인공이 아니라 귀족처럼 자기 삶을 행복하게 살 권리가 있는 행복한 주인공이다. 사람은 모두 각자가 제 삶의 주인공이다. 노동자는 생산의 주체이다. 노동자의 손과 머리를 빌리지 않고서는 이 세상에 새롭게 생산되는 것이 없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도 노동자이고, 유에서 더 큰 유를 확장재생산하는 것도 노동자이다. 노동자만이 이 세상의 가치를 창조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한다. 까닭에 노동자는 그 창출된 가치의 혜택을 누릴 권리가 있고, 분배받을 받을 권리가 있다. 그러기에 노동자는 존중받아야 하고, 귀족처럼 살아야 한다. 따라서 노동자를 천시하고 노예처럼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도록 “배반의 이념조작질”을 하는 자의 거짓속임수는 분명히 배격되어야 한다.

자본은 제 스스로는 죽어 있는 생명체이다. 그래서 자본은 노동자를 통하지 않고서 죽어 있는 자신의 생명을 되살릴 수 없다. 자본은 제 스스로 부를 창출하더라도 노동자의 노동이 가미되지 않는 한 제 스스로 썩어 사라지게 되어 있다. 인간의 노동력이 닿지 않는 아마존밀림지대를 생각해 보라. 제 스스로 생산했다가 제 스스로 썩어 제 영토의 밀도를 높일 뿐 그 생산의 알곡이 특정 인간에게로 전달되지 않는다. 거기에서 생산되는 맑은 공기와 물은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전달될 뿐이다. 기계가 멈추어버린 노동자 없는 공장을 상상해 보라. 노동자없이 새로운 생산이 가능한지를. 극단적 논리 전개의 잘못을 범하면서도, 필자는 노동자가 존중받고 노동의 정당한 가치를 분배받는 세상이 이 세상에서 가장 공평한 세상,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바랐던 세상일 것이라는 생각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에 성경은 돈을 빌려준 자에게 이자를 받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예수에게는 돈이, 자본이 새끼를 친다는 것이 용납되지 않았던 것이다. 오죽하면 프란치스코 교황마저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새로운 유형의 독재현상이라고 질타를 했을까.

2014년 새해가 밝았다. 갑오년, 말의 해는 주역 논리상 “천복”의 해로 이해되고 있다. 사주팔자 중의 한 자인 한자어 “오”는 재물복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나가는 이야기 같겠지만 갑오년, 말의 해에는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하늘의 복, 천복을 누리며 다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문화적으로 풍요로운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죽 세상살이 돌아가는 품새가 답답하면 이러겠는가마는, 정말이지 모두가 좀 잘 사는 세상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계사년과 갑오년을 연결 짓는 송구영신의 의미 있는 날, 41세의 노동자 한 사람이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서 제 몸에 쇠사슬을 감고 분신자살한 슬픈 소식이 전해진다. 서울역 고가도로에 “박근혜 사퇴”, “특검 실시”라는 두 개의 플랜카드를 내걸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남종씨의 처절한 절규 앞에서 문득 근로기준법상의 노동3권을 보장하라며 분신자살한 “전태일 분신자살사건”이 오버랩되어 온다. 전태일 열사가 분신한 1970년으로부터 43년이 지난 2013년 마지막 날에 그의 분신 이후에 태어난 이제 나이 41세의 한 남자가 분신을 시도했고, 2014년 첫날 아침에 운명을 달리했다는 이 슬픈 반역사는 지금 우리에게 다시 한번 “안녕들하셨습니까?”를 묻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43년 전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묻는 그의 죽음이 범상치 않은 이유이다.

서울에서, 아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사람과 차들이 왕래하는 서울역 앞 고가도로에서 자신의 몸에 기름을 붓고 분신자살하는 사람을 지켜본 사람이 얼마나 되었을까? 그의 분신을 지켜보며 놀라 발을 동동 구르며 얼마나 안타까워 했을까? 아무 영문도 모른 채 한 사람이 스스로 불에 타 죽어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멀리에서 바라보며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수많은 시민들의 정신적 트라우마를 또 어떻게 치료해야 할까? 지나간 한 해를 반성하며, 새로운 한 해에 대한 남다른 각오를 해야 할 시간에 우리가 경험한 이 슬픈 현실을 이 국가와 사회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인가? 그의 유서와 메모장에는 안녕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슬픔과 가족들에 대한 미안함과 정의롭지 못한 사회의 개혁 필요성에 대한 내용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개인적 채무관계와 삶의 실패로 인한 자살, 또 다른 개인적 일탈일 뿐이라며 사건의 의미를 축소하려는 시각도 있지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그 빚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느꼈을 절망감과 사회적 관계망의 무력함에 좌절하면서 사회제도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정의가 바로서지 않고서는 해결방법이 없겠다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 처절한 절규소리가 환청처럼 귓가에 들려온다. 심장을 후벼 판다. 지방에서부터 차를 렌트하여 서울까지 운전하고 오면서 얼마나 많은 번뇌에 시달렸을까? 두 개의 프랜카드를 내걸며 외치는 외마디 소리가 스스로 얼마나 공허하게 느껴졌을까? 산 자의 몸이 불에 타들어갈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냥 모든 아플 뿐이다.

시를 좋아했다는 분신자살자 이남종씨, 필자의 시 死海를 뒤늦게나마 들려주고 싶다. “누가 이 바다를/ 죽음의 바다라 하였던가// 절망의 땅에서 버림받은 자/ 추락하며 날개를 잃어도/ 마지막까지 안아 지켜 주던/ ‘그 누구’를 그대는 아는가// 죽음의 세상, 물에 빠진 영혼들/ 다 죽어나가는데/ 모른 척 버리지 않는다/ 마지막까지 품는다/ 아무도 가라앉지 않는다/ 구원자가 저기 있다/ 세상의 소금이 되려면/ 이 정도 짜야 한다고// 사해는 생명의 바다/ 아무도 빠져 죽지 않는다/ 지구에서 가장 낮은 땅이다// 저 멀리 예수/ 아주 저 멀리 예수”(필자의 졸시 “사해” 전문). 필자가 이스라엘 여행길에 들렀던 사해바다의 경험을 써 발표한 시이다. 바닷물 속에 들어가 아무리 몸을 가라앉히려 해도 가라앉지 않았다. 물에 빠져 죽는다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사해는, 당시 내 눈에는 마치 이 세상 곳곳에서 빠져 죽어가는 자들에게 보여주고픈 생명의 바다였다. 소금 염도가 너무 높아 어쩌다 물 한 방울이 눈에 잘못 들어가는 바람에 눈알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통증을 느끼면서, “이 세상 빛과 소금”이 될 것을 가르치는 성경말씀이 가슴속 깊이 새겨들어오기도 했다. 이 시처럼 우리 모두가 사해가 되지 못해, 소금과 빛이 되지 못해 한 사람의 죽음을 예방하지 못한 것이 죄송할 뿐이다.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하루에만도 50명 가까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어찌 보면 자살은 참으로 흔한 일 중의 하나가 되어 버렸고,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또 오늘도 50명 가까운 사람들이 제 스스로 제 스스로의 생명줄을 자를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자살은 어떤 이유로도 미화될 수 없다. 성경은 천하를 얻은들 제 생명 잃으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삶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있다. 어디 성경뿐이겠는가? 어느 누구도 타인의 자살을 이용해서도 안 되고, 섣불리 동조해서도 안 된다. 하지만 그 극단의 결론에 이를 때까지 누군가가 도와주는 자가 있었다면, 그의 죽음은 방지될 수 있었을 것이다. 50명 가까운 생명들이 매일 제 스스로 목숨을 끊으면서 가장 절실히 바랐던 것은 자신을 누군가가 이해해 주는 것이지 아니었을까? 소통의 부재가 죽음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지, 우리는 문득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을 한 번 되돌아 볼 일이다. 우리 모두가 필자의 졸시 “사해”처럼 타인이 물에 빠질 때 받혀주는 등받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영화 “변호인”이 개봉 2주만에 관객 600만 명을 돌파하고 700만 명을 향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다. 이 기세가 계속 된다면 관객수가 얼마에 이를지 예측하기조차 겁이 날 정도이다. 왜 이렇게 많은 국민들이 “변호인”이라는 영화에 열광하는 것일까? 영화후기의 상당 부분이 “울었다, 가슴이 먹먹했다”로 집약되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1970년의 전태일 열사의 분신과 2013년ㆍ2014년의 이남종씨의 분신이 43년의 간극 속에서 연결되어지는 사회적 상황에서 찾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필자가 머물고 있는 시카고에는 송구영신의 시간에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천지가 흰 눈으로 덮여 버렸다. 이 글을 쓰며 내다보는 창문 밖 세상도 온통 하얗다. 지금도 약하지만 눈발이 흩날린다.

많은 이들은 눈처럼 살고 싶어 한다. 그렇지만 눈은 참으로 허망한 것이다. 아마 세상에서 가장 깨끗했다가 가장 더러워지는 것은 눈과 인간뿐이지 않을까 싶다. 눈은 제 스스로 세상의 더러움을 덮었다가 제 스스로 가장 더러워져 세상에서 사라진다. 인간 역시 가장 순수하게 태어났다가 세상 때 다 묻혀가며 살다가 마지막에 가장 지은 죄가 많은 상태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눈과 인간은 이렇게 닮은꼴이어서 인지 더러움을 덮기 위해 별의 별 묘수, 꼼수를 다 부리곤 한다. 하지만 눈은 마지막까지 세상을 가릴 수 없다. 많은 이들은 극지대의 만년빙하 처럼 언제나 얼어 있어 감출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하지만, 결국은 밝혀지게 되어 있다.

2014년 새해가 밝았다. 평소에 새해 바뀜을 그냥 어제와 오늘과 다를 바 없는 하루일 뿐이라고 생각해 큰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지만, 2014년에는 노동자들도 귀족처럼 사는 세상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 소수 독점자본에 치우쳐 다수의 노동자가 반노예가 되어 어렵게 사는 것이 아니라, 모두들 자신의 삶을 풍요롭게 살아가는 존중받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위 자본가들이 귀족노조라며 상대적 급여가 높아 보이는 일부 노동자집단을 공격하는 것에 대해, 노동자는 귀족처럼 살면 안 되는지, 저임금에 시달리는 수많은 노동자들의 급여가 자본가들이 말하는 귀족노조 수준으로 평균적으로 상향되는 세상이 오면 안 되는가 반문하며, 자본의 알곡을 너무 과대평가하여 자본가에게 과대분배되지 않는, 조금은 아름다운 불평등이 존재하는 평등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사회에 정의가 살아 있을 때, 인생의 실패자가 되었든 열사가 되었든 분신의 극단으로 치닫는 행동이 사라지는, 아무도 “자신의 변호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국가가 할 일은 자본의 논리에 함몰되어 귀족노조를 탓할 것이 아니라, 노동자 모두가 귀족처럼 대접받는 세상이 될 수 있도록 사회안전망 확보에 주력해야 할 것이다.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노동자들, 바로 사람이 스스로 약한 자신을 변호해 줄 변호인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세상은 결코 아름다운 세상이 아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금 할 일은, 청와대 참모들과 고위 공직자들, 특히 비서실장과 국정원장, 검찰총장, 경찰청장, 국세청장을 대동하고 서울에서 가장 큰 영화관을 찾아 “변호인”을 관람한 후, 스스로 “국민의 변호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국민의, 노동자의, 사람의 변호인이 될 때 대한민국은 진정한 일류국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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