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박근혜 대통령의 포옹과 변호인의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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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박근혜 대통령의 포옹과 변호인의 포옹
  • 법률저널
  • 승인 2013.12.31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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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추신수 선수가 텍사스 댈러스팀에 입단하였다. 수많은 부상과 좌절을 딛고 미국프로야구선수로 우뚝 선 추신수, 7년에 1억3천만불이 넘는 거액에 입단계약을 체결한 그의 인간승리에 존경을 보낸다. 어느 분야가 되었던 한 분야에서 진정 성공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과연 그의 7년 계약 기간 동안 지금처럼의 영광만이 있을 것인지, 아니면 또 먹튀라는 말이 나올 정도의 좌절의 시간이 있을 것인지 누구도 예측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그는 오늘 일단 성공한 야구선수가 되었다. 타자인 그는 내노라 하는 투수들이 던지는 공을 때려내기 위해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직구가 되었든, 커브가 되었든, 슬라이드가 되었든 공이 배트에 맞을 때까지, 안 되면 몸에 맞을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릴 것이다. 삼진도 수없이 당할 것이고, 데드볼도 수없이 맞겠지만, 그는 묵묵히 때리고 또 때리며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 나갈 것이다. 이 암울한 시기에 국민들에게 작은 희망과 기쁨이 되고 있는 그의 입단계약소식에, 마치 15년 전 아이엠에프 때의 박찬호, 박세리 선수가 위로가 되었던 그때가 연상되며, 절망 속의 작은 촛불 같은 위로를 받는다.

로마 교황청,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황 직위 후 첫 번째 성탄 전야 미사에서 사랑과 겸손을 강조하였다. 예수 탄생을 예언한 구약성경 이사야서를 빌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라는 말로 미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두려워하지 말라.”고 강조하였다고 한다. 어둠의 정신이 세상을 감싸고 있지만, 하느님(하나님)과 형제·자매를 사랑하면 빛 속을 걷게 된다고 강조하며 예수의 정신을 가르쳤다고 한다. “예수님은 위대하지만 스스로 작아졌고, 부유하지만 스스로 가난해졌으며, 전능하지만 스스로 약해지셨다.”라며, 겸손의 자세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2013년 마지막 주일이다. 계속되는 텍사스 여행길, 어제는 텍사스 오스틴의 오아시스라는 식당겸전망대에 들렀다. 호수를 끼고 펼쳐진 평원에서 일몰의 아름다움을 만끽할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고 하여, 선셑 시간에 맞춰 들렀다. 아니나 다를까 텍사스 넓은 평원 덕분인지 해가 지며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황혼의 모습을 아무런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모두 볼 수 있었다. 한강 하류나 김포나 강화쯤에서 보았던 수평선의 일몰과는 또 다른 지평선의 일몰을 보며, 느끼는 감회는 “아, 하루해는 저렇게 붉은 노을빛을 남기고 어김없이 지는구나.” 하는 작은 깨달음이었다.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지는 해, 매일 아침 해 뜰 때의 뜨거움과 자신만만함은 분명하게 저렇게 지는 해로 마무리하는구나 하는 사실을 새삼 깨달으며, 세밑에 사랑과 겸손을 가르친 교황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인터넷을 통해 한국의 소식을 접하며, 한국은 지금 “끓는 용광로”로구나 하는 안타까움을 어찌할 수가 없다. 싸우던 이들도 헤어질 때쯤 되면, 연말쯤 되면 싸우는 것을 멈추고 화해할 법도 한데 “어찌 저렇게 죽자 살자 싸움”을 더욱 더 격렬하게 해대는지, 그들의 강한 신경줄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다. 모두들 마지막 먹이 하나를 눈앞에 두고 싸우는 하이에나 떼 같다. 한정된 먹이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수많은 하이에나 떼, 어느 집단이 그 먹이를 낚아 채 갈 것인지 지켜 볼 일이지만, 양쪽 모두 만신창이가 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 어떻게 저렇게 철저하게 이분법적 사고방식을 유지할 수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지만, 사실 빼앗기면 아무 것도 가질 수 없음을 알고 있는 이들로서는 처절한 생존본능에 의한 쌈박질이라는 것도 잘 알겠다.

2013년 연말을 장식하는 쌈박질의 현장에서 몇 개의 단어를 떠올려본다. “안녕들하십니까?”, “변호인”, “국정원댓글”, “철도민영화와 철도노조의 파업”, “박근혜 대통령의 포옹”이 내게 떠오른다. 개봉 일주일만에 관객수 삼백만을 돌파한 변호인의 저력은 무섭다. 영화를 직접 보지는 않았지만, 수많은 글들을 통해 영화 내용이 대충 이해가 된다. 필자의 이십대 끝 무렵, 대표적 시국사건이었던 학림사건과 부림사건, 1979년의 10.26 사태에 이어 1980년대의 전두환 군부쿠데타세력에 의한 대표적인 용공조작사건들이다. 민주화 후 모두 재심을 통해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참으로 혹독한 불법연행과 고문의 무시무시한 조작사건의 피해사례라고 할 것이다. 한 발 앞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된 “안녕들하셨습니까?”는 곧바로 “변호인”으로 오버랩된다. 국민들이 영화 변호인에 열광하는 이유는 “안들녕하지 못한 자신들의 처지”를 누군가 변호해 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가슴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필자는 “안녕들하셨습니까?” 대자보가 사회현상으로 이슈화되기 전, 열 번에 걸쳐 “안녕하십니까, 박근혜 대통령님” 시리즈 칼럼을 연재하였다. 뭔가 시대적 상황이 송곳이 되어 필자의 가슴 속을 파고들며 묻지 않을 수 없게끔 만들기에 한 번도 아닌 열 번에 걸쳐 시리즈로 박근혜 대통령의 안녕을 물었다. 박 대통령의 안부를 묻는 필자의 질문 속에는 국민들이 안녕하지 못하다는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다. 그러니 안녕하지 못한 국민들의 아픔을 대통령이 이제는 집권한지 1년쯤 되어 가니, 어느 정도 국정에 대한 업무파악도 이루어졌을 것이니 좀 어루만져주어야 할 것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여전히 국정수행에 일방적이었고, 한 학생이 이제는 아픈 가슴을 어떻게 하지 못하는 국민들을 향해 “안녕들하셨습니까?”고 직접화법으로 묻자 말자 필자의 간접화법보다 직접화법이 더 가슴에 와 닿았는지 국민들은 서로의 안부를 묻기 시작했다. 모두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안녕한 줄 알았는데, 모두들 열 손가락 중 한 손가락이 곪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안녕한 줄 알았는데, 내 부모가 안녕하지 못하고, 내 자식이 안녕하지 못하고, 내 형제가 안녕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부모가 안녕한데 자식인 내가 안녕하지 못하고, 형이 안녕한데 동생인 내가 안녕하지 못하고, 결국 실핏줄처럼 연결되어 있는 우리 모두가 어딘가에서, 누군가에서 안녕하지 못하다며 가슴을 쥐어뜯어가며 아파하고 있음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아프지 않는 자들은 “안녕들하셨습니까?”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자신이 아프지 않는데, 자신의 주위가 실핏줄로 연결되는 공통점의 공감대가 없는데, 어찌 그 누군가의 아픔을 이해할 수 있고, 가슴으로 느낄 수 있겠는가? 오히려 인생낙오자들의 잠꼬대같은 소리라고 비아냥거리기 일쑤이다. 어린 아이가 운다, 그렇다면 부모가 아니더라도 아이를 달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어린 아이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보는 이는 어느 누구라도 뛰어들어 그 어린아이를 구하는 것이 측은지심의 발로이다. 그런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고 우리 모두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인 것이다.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인 진정한 사랑과 겸손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민영화에 반대하며 파업 중인 철도노조집행부를 검거하겠다고 경향신문사옥에 입주해 있는 민주노총사무실을 5,000여명의 경찰을 동원해 강제집행에 나선 경찰의 무모함은 집행부를 한 명도 검거하지 못한 채 출동한 경찰에 의한 믹스커피 두 통의 절도미수사건으로 희화화되고 말았다. 공권력의 행사는 과잉금지의 원칙에 의해 지배된다. 그런데 구속영장도 아니고 체포영장을 집행하겠다며 신문을 제작 중인 언론사건물을 침탈하여 신문제작에 불편을 주고, 어느 역대 정권도 결코 하지 않았던 민주노총 본부사무실을 침탈한 것은 “수색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된 상징성”에 비추어볼 때 과잉진압의 전형적 사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목적의 정당성을 위해 절차의 정당성이 무시되는 사회는 결코 건전한 사회가 아니다.

또 다시 수많은 근로자가 해고될 듯싶다. 28일, 민주노총사무실에 대한 경찰의 과잉진압을 보다 못해 친정부성향의 한국노총까지 합세하여 총파업투쟁을 하겠다고 한다. 정부는 또 강경하게 나갈 것이다. 타협을 모르는 박근혜 정부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더 강경해질 것이다. 영국을 지금 양극화로 몰아버린 주범으로 몰려 비판을 받고 있는 대처 전 수상을 가장 존경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이다 보니, 아마 양보함이 없이 또 일방적 밀어붙이기가 강행될 것이다. 아니면 너무 좋겠지만 말이다. 국가가 그렇게 하면 할수록, 영화 변호인을 찾는 국민은 늘어날 것이다. 지금 개봉 일주일만에 삼백만 명이지만, 이주, 삼주가 되면 오백만, 칠백만, 천만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안녕하지 못한 국민들이 자신들의 변호인을 찾기 때문이다. 국정원불법관권선거개입으로 정의가 초토화버린 대한민국, 경제정의의 불공정으로 안녕들하지 못한 국민들로 넘쳐나고 있는 추락직전, 폭발직전의 대한민국은 자신의 아픈 가슴을 쓰다듬어 주고, 대신 변론하며 위로를 아끼지 않을 변호인이 필요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연이틀에 걸쳐 군부대를 방문하여 젊은 군인과 포옹하고, 어린이집을 찾아 어린이와 포옹하는 홍보용사진이 연합뉴스를 통해 대서특필되고 있다. 젊은 장병을 껴안고, 어린아이를 껴안고 활짝 웃는 박 대통령의 모습이 영화 변호인 속의 변호인 모습과 오버랩되면서, 진정 포옹이 필요한 곳에서는 왜 포옹을 하지 않고 등을 돌리는 것일까 하는 의아심이 생긴다. 한쪽에서는 가슴 한켠이 무너져 내려 아파하며 누군가의 위로를 필요로 하는데, 포옹이 필요한 노동자를 체포해 잡아넣지 못해 수천 명의 경찰을 동원해 신문사와 민주노총사무실 출입문을 부수고 들어가고, 다른 한쪽에서는 별로 아파하지도 않는, 명령에 복종하여 꼼짝하지 못하고 서 있는 군인과 어린아이를 너무 쉽게 포옹하는 이 이중성 앞에 국민들은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당근과 채찍 양 날의 칼을 보면서, 포옹하는 모습을 홍보함으로써 대통령의 이미지를 좋게 보이게 하겠다는 홍보전략을 세운 참모들이 오히려 “박근혜 대통령의 이중성”만 부각시키는 부정적 역효과를 가져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만 드는 것이다.

“변호인은 포옹의 영화”이다. 국가권력에 의해 불법체포된 후 밀실에서 영문도 모른 채 수십일씩 고문을 당하며 개처럼 기어 다니며 살려달라고, 아니 차라리 죽여달라고 절규하다가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던 억울한 이들을 따뜻하게 포옹하는 영화이다. 변호인이야말로 진정한 포옹의 영화인 것이다. 그러면서 속삭이는 영화이다. “내가 마지막으로 네 편이 되어 줄게, 너를 포옹해 줄게.” 위로하는 영화이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두려워하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는 영화인 것이다. 철도노조파업으로 상징되는 안녕들하지 못한 국민들에 대한 대응이 대화와 타협이 아니라 강경진압일변도로 계속된다면, 아이러니하겠지만 영화 변호인의 관객수는 계속 늘어날 것이다. 점차 심장을 옥죄어 들어오는 무시무시한 국가공권력 앞에 국민들이 두려움을 느끼면 느낄수록 “두려워하지 말라.”는 교황 프란치스코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일 것이며, 영화 변호인의 변호인에게 의지하는 이가 늘어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유일한 해결방법은 포옹뿐이다. 젊은 군인과 어린 아이에게 했던 그 포옹을 국가발전을 저해하는 반대세력으로 규정지은 파업노동자들에게 할 때만이 모든 문제가 아주 쉽게 해결이 될 것이고, 진정한 국가발전이 이루어질 것이다. 아주 따뜻하게 포옹하라. 서로서로 포옹하라. 그러면 네 마음 속의 두려움이 안개처럼 사라질 것이다. 포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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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규 2014-01-07 17:40:39
텍사스 달라스라니? 무슨 풋볼팀인가?

이용규 2014-01-07 17:40:39
텍사스 달라스라니? 무슨 풋볼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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