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고립무원의 섬이 되어가는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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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고립무원의 섬이 되어가는 청와대
  • 법률저널
  • 승인 2013.12.20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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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섬에 갇힌 바다”, 필자의 3권짜리 장편소설이다. 2002년도에 출간했으니, 어언 10년이 지났다. 바다에 갇힌 섬이 아닌, 섬에 갇힌 바다는 필자의 역발상적 생각에 의해 우리 모두가 바다에 갇힌 섬의 시각으로 세상을 살 때, 오히려 깊이 생각해 보면 섬들에 둘러싸인 바다가 몸부림치는 파도로 우리네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쓰게 된 소설이다. 필자의 의식 속으로 “요즘 청와대는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밀려든다.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안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단절된 섬”이 되어, 국민과의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스스로 문을 걸어 잠궈 버린 “밀폐의 성”이 아닌가 하는 측은한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섬과 육지를 연결하는 유일한 연육교가 끊겨버린 고립무원의 섬, 청와대가 왠지 국민에게 낯설고 국민들의 일반정서와 따로 노는 동물원이 되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국민들 대다수가 오늘은 청와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 하고 호기심으로 쳐다보는 동물원 같은 곳 말이다.

필자는 지금 텍사스에 머물고 있다. 일리노이주에서 미주리주, 오클라호마주를 거쳐 텍사스주에 이르는 약 1,900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이틀 동안 달려왔다. 일리노이주 시카고의 영하 15도의 추운 겨울나라에서 출발한 이틀 전에 비해, 지금 텍사스는 영상 15도 가까운 가을날씨이다. 같은 나라에서 계절의 변화를 맛보는 경험을 새롭게 한다. 그 장거리 여행길에 고속도로 좌우로 펼쳐진 것은 끝없는 평원이었다. 그게 밀밭이었을까 아님 옥수수밭이었을까, 소목장이었을까 아니면 말목장이었을까, 이십 시간 넘게 달리는 내내 평원, 평원, 평원뿐인 여행길에서 또 다른 평화를 맛볼 수 있었다. 저 평원은, 생명의 땅이겠지, 봄이 되면 수많은 곡식을 생산해내는 기름진 옥토로 바뀌겠지 하는 생각에 눈 덮힌 평원의 침묵이 내 심장을 콩닥거렸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네 시간 남짓 시간 동안, 산을 보고, 들을 보고(들은 아주 조금만 보지만), 물을 보고, 다시 산을 보고 들을 보고 물을 보며 수많은 변화를 체험하는 우리네 삶 속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평안함이 미국 평원에는 넘치고 있었다. 인도여행길에 십여 시간 기차를 타고 가면서 펼쳐지는 평원에서 가난을 보았다면, 미국의 평원에서는 풍요와 정갈함을 맛보았다. 고속도로 주변 휴게소에 들리면 동양인 내 체격은 왜소해지고, 감당이 되지 않을 거구의 비만인 서양인들을 보면서, 저 것은 또 다른 풍요의 그늘이로구나 하는 상념에 잠기기도 하였다.

오늘로 박근혜 대통령 당선 1주년이 되었다. 그 1년이라는 세월 동안 국민이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종북”이었을 것이다. 그 외에도 국정원불법관권선거개입, 국군사이버사령부의 대국민심리전을 빙자한 불법대선개입, 채동욱 검찰총장퇴진을 둘러싼 청와대를 비롯한 정치권개입설, 경제민주화정책의 후퇴,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북한 엔엘엘 포기발언 여부, 남북정상회담회의록을 둘러싼 여야 간의 대결, 어르신들에게 지급되는 노령연금지급액감축, 대학생들에 대한 반값등록금정책 연기 등등 참으로 많은 이슈들이 거론되었던 듯싶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지금 그 어느 것도 제대로 해결된 것처럼 보이지 않으니, 결국 일 년 동안 말싸움만 요란했을 뿐 제대로 한 것이 없지 않나 하는 의아심마저 생기는 것이다.

이런 때에 터져 나온 한 대학생의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초등학생에서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전 국민의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니, 이 현상을 어떻게 파악해야 할 것인가?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말은 우리네 일상에서는 언제나 스쳐지나가는 바람이었다. 안녕하세요는 정지되는 말이 아니었고, 우리의 심장을 파고드는 말이 아니었다. 진짜 말 그대로 바람처럼, 물결처럼, 소리로 왔다가 소리로 스쳐지나가는 무망의 몸짓이었을 뿐이다. 그런데 그 안녕하십니까가 우리 모두의 삶에 박히는 비수가 되어 우리 심장을 폭발케 하는 촉매제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한 마디로 “어린 아이의 울음현상”이다. 구멍가게에서 풍선을 사가지고 엄마, 아빠에게 불어달라고 기뻐 뛰어왔던 아이가, 엄마가, 아빠가 풍선에 바람을 불어 넣을 때 팽창하는 풍선을 바라보며 가슴조이다가 임계점을 넘어 풍선이 터져버릴 때 모든 기대가 허물어져버렸을 때 터뜨리는 울음현상과 같은 것이다. 모든 기대가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순간, 참고 참았던 한숨이 통곡으로 변해 버리는 그 변곡점인 것이다. 이때 당황한 부모는, 현명한 부모는 아이를 달래고, 더 큰 풍선을 사다가 아이 손에 들려줘야 하는 것이다. 물론 알사탕 하나 추가하는 것은 당근이고 말이다.

이런 현상에 대한 중앙일보 김진 위원의 팩트에 기초하지 않은 C학점짜리 답안지라거나, 새누리당 하태경 의원의 팩트에 기초하지 않는 대자보에 대한 비판은 잘못 되어도 한참 잘못된 반응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마치 풍선이 터져버린 현장에서 공기를 주입한 부모를 향해 그 터지기 바로 직전에 공기주입을 멈추었어야 한다고 훈계하여 더 열 받게 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는 것이다. 본질은 풍선이 터져버렸다는 것이다. 그래도 언젠가는 “안녕해지겠지...”라는 기대감이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 “목에 칼이 되어 버린 현상”이 바로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현상”임을 인식한다면 그런 지엽적 내용에 목맬 일은 아닌 것이다.
소박하게 안녕하냐를 묻는 이 글이 이렇게 국민들에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현상 앞에서 국민이 진정 원하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 문을 열고 나와 광화문 큰 길에서, 아니면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서울역 광장에서 “사랑하고 존경하는 국민 여러분, 대통령으로서 국민 여러분을 안녕하게 해 드리지 못한 제 무능함을 용서해 주십시오, 지금부터라도 국민들의 안녕하심을 위해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제발 용서해 주십시오. 저를 믿고 저와 함께 국민 모두가 안녕한 길로 걸어가십시다.”라는 “눈물의 참회와 결단”이 아닐까? 내가 대통령 비서실장이라면, 아니 청와대 홍보수석이라면, 아니 청와대 수위만 되더라도 그렇게 박근혜 대통령에게 권유하겠다. 지금은 안녕하지 못한 국민들의 가슴을 부여안고 어깨를 껴안고 함께 울어야 할 타이밍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청와대의 반응은 어떠한가? 또 일부 보수언론의 태도는 어떠한가? 그 글을 처음 게시한 학생에 대해 순수한 대학생이 아니라 노동당 당원이었다거나, 정치권의 보이지 않는 기획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종북세력의 치밀한 대국민선동행위에 불과하다는 논지를 피력하며 또 다시 “종북몰이”로 반격을 가하고 있으니, 이러한 대응방법을 지켜보는 필자는 이제 이러한 파블로프반응을 보이는 그들이 불쌍해지고 측은해지면서, 정말 가망이 없는 사람들이로구나 하는 절망감마저 드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다. 누군가를 내칠 때가 있다. 누군가를 품어야 할 때가 있다. 내칠 때 품고, 품을 때 내치면 혼란스럽다. 지금은 전 국민에게 힐링이 필요한 시기이다. 한 대학생의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에 고등학생이 답하고, 중학생이 답하고, 초등학생이 답한다. 대학교 청소부 아줌마가 답하고 교수가 답하고 할아버지가 답하고, 할머니가 답한다. 모두의 심장을 관통하는 동일한 공감대가 있는 것이다.

지금 국민들 대다수가 느끼는 공통적 사항은 박근혜 정권의 불통에 대한 답답함이다. 그 답답함이 점점 심장을 눌러 통증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 통점이 임계점을 넘어 심장에서 피가 넘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분수처럼 터져 나오는 심장의 핏줄기를 보며 더 큰 보자기로 덮어버리면 된다, 더 두꺼운 포장지로 감싸버리면 된다고 보는 저 청와대 참모진들의 대응태도는 참으로 무지몽매의 단계를 넘어 “죽은 참모의 세계”라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필자의 장편소설 “섬에 갇힌 바다”로 간다. 국민이라는 바다가 끊임없이 파도를 만들어 섬으로 다가간다. 그렇지만 섬들의 높이가 갈수록 높아지고 견고해진다면 섬은 파도소리를 들을 수 없다. 그렇지만 섬은 조금씩 조금씩 파도에 깎여 그 부피와 면적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청와대가 스스로 섬이 되기로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청와대의 문을 열어야 하고, 스스로 “열심히 소통을 하고 있는데 왜 국민들이 몰라주는지 모르겠다.”는 궤변을 늘어놓아서는 안 된다. 상대방측에서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고 하는데, 본인 혼자 소통이 잘 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개콘의 소재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 점을 누누이 지적해도 여전히 청와대 참모진들의 불통은 여전하니 답답한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알아야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자신들의 목줄이 붙잡혀 있는 일부”일 뿐, 대부분의 국민은 박 대통령을 무서워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박 대통령이 임명해주는 한 자리를 바라고, 임명받은 그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박 대통령에게 충성 봉사하는 이들은 박 대통령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할지 몰라도, 별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국민들은 그냥 냉정한 관찰자에 불과할 뿐이라는 사실을. 그 관찰자로 만족하는 국민들을 향해 아무리 강한 톤으로 어떠한 지시나 의견을 제시하더라도 그 제시안이 합리적이고 공평하지 않다면 동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까닭에 대통령은 누구보다도 공평해야 하고, “안녕들하십니까”라는 한 마디에 눈물짓는 국민들을 껴안아야 하는 것이다. 종북을 꺼내 가슴에 대못질을 할 것이 아니라 “미안하다, 용서해 달라”라고 국민의 아픈 가슴을 어루만져야 하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님은 진짜 사랑을 아시나요? 상대방이 잘할 때 하는 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지요. 상대방이 못할 때 잘 하는 것이 진짜 사랑 아니겠어요? 젖먹이 아이가 밤새 잠 안 자고 울 때 같이 잠 안 자고 아이를 안아주는 것이 어머니 사랑이지요. 자신의 고모부 장성택을 단 한 번의 군사재판으로 숙청하는 김정은의 북한을 남한 백성 누가 따르겠습니까? 국민들은 합리적인 것이지 종북이 아닙니다. 멀쩡한 사람을 종북이라 몰았던 정미홍 전 케이비에스 아나운서가 자꾸 손해배상소송에서 패소해서 돈을 물어주고 있지 않습니까? 만약 멀쩡한 국민이 청와대나 새누리당의원들에 의해 종북주의자로 찍힌 후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하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하시겠습니까? 모든 국민은 대한민국의 국군을 믿고,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는 굳건한 방위태세를 믿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은 북한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미군사동맹체제 하에서 굳건한 방위력과 경제력이 우위에 있음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멀쩡한 국민을 자꾸 종북주의자로 모는 것이 마치 “경북(驚北)”같이 느껴져 기분이 별로거든요. 북한에 놀래서 두려운 경기를 일으키는 경북 말입니다. 너무 경북에 사로잡힐 것이 아니라 억북하고 승북해야겠지요.

청와대는 더 이상 국민들로부터 유리된 고립무원의 섬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안녕들하십니까를 종북으로만 몰 것이 아니라 청와대 문을 열고 나와 국민을 다독거려줘야 하는 겁니다. 이번에는 기대를 해도 되겠지요? 역시 무망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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