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부메랑의 시대, 언어순화가 절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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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부메랑의 시대, 언어순화가 절실하다.
  • 법률저널
  • 승인 2013.12.13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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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2013년, 계사년이 저물어가고 있다. 폭설로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였다. 그 사이로 뱀의 해, 뱀이 자신의 꼬리를 감추려고 애쓰고 있다. 얼마나 뱀이 제 꼬리를 감출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땅꾼들의 눈에는 어디쯤에 뱀이 똬리를 틀고 있는지 다 보이는 법이다. 아마 의식 있는 이들은 한 해를 되돌아보며, 반성할 것은 반성하고, 다가오는 새해는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지 다짐도 하면서 계획을 세울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연말의 의미는 새삼스럽다. 필자가 머무는 시카고는 크리스마스트리 불빛이 도심을 밝히고 있다. 건물주인들이 서로 경쟁하듯 어둠을 밝히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트리를 장식한다. 평소에도 하늘을 찌를 듯 치솟은 빌딩숲 불빛이 만들어내는 조화로움이 너무 아름다워 서울에서는 한 번도 보지 못한 “별빛 도시”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별빛조차 저리도 아름다운데 먼 세월을 날아왔을 밤하늘 별빛을 쳐다보며 인간의 마음이 정화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상념에 젖어든다.

2013년 12월은 “부메랑”의 시기이다. 어리석은 이들은 시간을 쪼개려 한다. 연말이 되면 내년을 생각하며 올해를 단절시키며 내년에는 잘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을 쪼개 어제는 쓰레기통에 버리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으니 아무도 모르겠지 하며 거짓을 말하고, 오늘은 보이는 날이니 적당히 처세하면 살 수 있을 것으로 착각한다. 하지만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할 것은 시간은 결코 쪼갤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간은 스스로 쪼개지는 법도 없다. 어리석은 인간은 시간이 쪼개지는 것처럼 스스로를 호도하지만, 시간은 결코 쪼개지는 법 없이 “시간 그 자체”만으로 존재한다. 시간을 쪼개는 유일한 수단은 “인간의 망각”이었다. 인간은 망각을 통해 시간을 잊고, 그 잊혀진 시간 속에서 있었던 스스로의 행동을 잊는다. 아주 편리한 망각의 고마움이었다.하지만 21세기 인류사회는 이러한 망각을 허용하지 않는다. 오죽하면 “잊혀질 권리”라는 새로운 개념의 권리가 학계에서 주장되기에 이르렀을까? 그리고 잊혀질 권리를 위해 “기억을 지워주는 산업”이 점차 각광을 받고 있다. 필자가 수차 주장한 바 있지만, 21세기는 글쓴이가 잊고 사는 옛 기억을 타인이 찾아내어 반복재생하는 세상이다. 트윗과 리트윗을 통해, 퍼나르기를 통해 타인의 생각을 전파하고 보관하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그러기에 이제 인간은 오늘만을 기억하며 살면 되었던 예전의 패러다임을 확 바꾸어야 한다. 오늘만 기억하고 살던 세상에서는 거짓말도 무방하다. 오늘이 흘러가버리면 언제 그런 거짓말을 했던가 하며 오리발을 내밀면 무사통과되었지만, 이제는 글과 영상으로 철저하게 과거 속에 존재하는 오늘을 재생해낼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의 단절이 불가능하다는 철학적 명제를 인간의 과학이 입증”해버린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 이정현 홍보수석이 양승조 민주당 최고위원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선친의 전철을 밟게 될지도 모른다.”는 지적을 반박하면서 기자들 앞에서 그만 감정에 북받쳐 울컥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전 국민도 이 모습을 보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며, 저 사람은 참으로 맹목적 순정파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국가 최고 의견발표자로서 냉정심과 자제력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이 함께 들었다. 대한민국에는 “과정의 생략”이 난무하고 있다. 옛 속담에 “닭 잡는데 소 잡는 칼을 쓴다.”는 말이 있다. 대한민국의 입들은 너무 거칠다. 모두 소 잡는 칼을 휘두르고 있다. 필자의 변호사 시절, 의뢰인들이 수임료를 부당하게 깎아달라고 할 때 했던 말이 갑자기 생각난다. 그 말은 “내가 당신에게 향한 상대방의 모든 독기를 막아주는 방패역할을 하는데, 그 독기를 대신 받는 대가로 이 금액이 많다고 생각하십니까?”이었다. 소송을 대신 수행하다 보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상대방이 내 의뢰인을 향해 수많은 저주를 쏟아낼 때가 있다. 그 저주 섞인 독기를 변호사라는 죄로 묵묵히 받아내며 의뢰인을 보호하고 지켜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동료 변호사들에게 미안한 말이지만, 그래서인지 변호사 생활을 오래 한 이들을 보면 얼굴에 인자함이나 자애로움이 느껴지는 이들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런 선배들의 모습을 지켜보며, 오래전부터 필자는 저런 모습의 60대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다행히 학교로 옮겨 와 학생들에게 진실과 올바른 지식을 가르치는 교수생활을 하다 보니 변호사 때보다 얼마나 마음이 편한지 모른다.

대한민국 미래에 대한 의사결정권을 행사하는 이들의 입들이 너무나 거칠다. 그 거친 말로 인해 모두들 설화에 휩싸이지만 그 버릇이 고쳐지지 않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나쁜 버릇 중 하나는 불리하면 “말꼬리싸움”을 벌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 말꼬리싸움이 실재로 현장에서 먹힌다는 것이다. 그러한 잘못된 말꼬리싸움을 인정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본질이 왜곡되기 때문이다. 본질과 주변이 존재한다면 본질에 대한 치유가 우선적으로 이루어져야지 주변이 본질을 덮어서는 결코 안 된다. 지금 대한민국은 본질이 곪고 있음에도 주변이 워낙 두꺼워 본질이 비명을 지르고 있는 형국이다. 잘못을 저지른 이들은 그렇게 주변의 두께를 두껍게 하여 본질을 덮으려 한다. 하지만 본질이 썩고 있다면, 썩는 것은 썩는 과정에서 스스로 무서운 가스를 생산하게 되어 폭발시점을 찾게 된다. 그렇게 스스로 폭발하게 되어 있다. 물론 두께가 엄청 두껍다면, 그래서 핵연료시설을 밀봉시킬 만큼의 억제력을 갖고 있다면 핵폭발은 불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결코 잊어서 안 될 것은 “본질에는 시간의 영원성이 언제나 함께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 본질이 두껍게 둘러싸여 있더라도 내일은 주변이 허물어져 내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리석은 이들은 자신의 수명이 다 하는 오늘만 더러운 본질을 감추면 된다고 생각하지만, 역사는 그가 죽은 후에도 현재진행형이기에 본질을 결국 밝혀내게 된다.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이들의 입이 너무 거칠다. 입이 거칠다는 것은 생각이 거칠고 마음이 거침을 의미한다. 말은, 행동은 곧 그 사람의 의식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다 보면 정책결정권자들에 대해 비판적 의견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국가적, 사회적 파장이 크기 때문이다. 동시대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가장 궁금한 것은 박근혜 대통령의 생각이다. 그런데 그 생각 속으로 들어가 지지가 않아서 필자는 힘이 든다. 언제나 엇박자로 나가기 때문이다. 가진 자의 제일 큰 덕목은 베풂이다. 가지지 못한 자는 베풀지 못한다. 가진 자만이 베풀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많은 힘을 가지고 있는 대통령이 베풂의 미학을 실천한다면 대한민국이 요순시대나 에덴동산 같이 되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갈등이 최소화되는 이상적인 세상은 될 수가 있다. 인간은 탐욕의 동물이기에 이성의 자율성만으로 베풂을 실천하라고 방임해 둘 수가 없다. 그러기에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 그 일을 해야 할 이가 바로 대통령인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은 베풂의 최고실천자가 되어야 한다. 그 베풂이 특정집단이나 계층에 머물 것이 아니라 골고루 국민 모두에게 행해질 수 있도록 법과 제도를 정비할 책임이 있다. 그것이 바로 경제민주화이고 정치민주화이다. 필자는 학생들에게 학문외적으로 “자선사업가는 결코 밥을 굶지 않는다.”고 가르쳐왔다. 사업가는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탐욕을 부리다 밥을 굶을 때가 있지만, 자선사업가는 끝없이 베풀면서도 결코 밥을 굶지 않는다는 진리를 제자들이 알기를 원해서이다.
이정현 홍보수석의 눈물을 참지 못하는 격한 대응에 빗대어 박근혜 대통령의 의식상태를 추정해 보면, 박 대통령이 지금의 시국상황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어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심히 염려스럽다. 제18대 대선과 관련된 국정원사태가 밝혀지면 밝혀질수록 박 대통령에 대한 사퇴나 책임추궁문제가 더 강하게 요구되어질 것이다. 국민적 저항은 어쩌면 유신반대투쟁이나 1980년도의 서울의 봄이나 1987년도의 호헌반대투쟁에 버금가게 될지도 모른다. 박근혜 대통령과 여당이 우려하는 최악의 시나리오이다. 그게 두려워 감추려 하고 속이려 한다. 그렇지만 그렇게 해서는 타율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이를 초기에 차단하려고 문재인 전 야당대선후보나 장하나, 양승조 민주당 의원들의 한 마디 말에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지난 호에서도 주장했듯이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주도적으로 국정원개혁을 비롯해 관련자들을 처벌하며 여ㆍ야 대타협의 정치선언을 주도하는 것이 마지막 해결책이지 않겠나 하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조자룡 헌 칼 쓰듯 국회의원 제명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생생하게 기억할 것이다. 1979년 10월 4일 김영삼 전 신민당 총재를 유정회 의원들이 앞장서 제명시킨 후 이에 저항하여 부산과 마산시민들이 중심이 된 부마사태가 일어났고, 그리고 며칠 후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비극적 역사가 전개된 사실을. 그런데 지금 이석기 의원, 장하나 의원, 양승조 의원 등에 대한 제명안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국회의원 제명은 국회의원 제적 3분의 2 이상이 찬성해야 되는 것으로, 국회의원 3분의 2가 되지 못하는 새누리당이 아무리 제적안을 국회에 내놓은들 야당의 협조 없이 가결될 리는 만무하다. 그런 것을 뻔히 알면서 계속해서 제명안을 상정하는 것은 “국회의원 제명안을 희화화”시키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스스로 정치적 웃음거리를 자행하는 일에 죽자살자 매달리는 꼴이 되고 마는 것이다.

21세기는 부메랑의 시대이다. 상대방의 말꼬리를 잡으려면 자신이 예전에 한 말 중에 꼬리 잡힐 일이 없는지 되돌아봐야 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너는 예전에 이랬잖아 또는 더 했잖아?” 하면서 조롱을 받게 된다. 그러니 서로 조심하며 언어를 순화할 일이다. 무슨 말을 한들, 그 말이 진실이 아니거나 상식에 부합되지 않으면 그 말한 자는 “순간적으로 동물원 원숭이가 되어 국민의 조롱거리”로 전락한다는 사실을 정치인들은 명심했으면 한다.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이 감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1970년대 중후반, 죄를 지은 아들을 살리려고 다시 범죄자로 되돌아가던 프랑스 영화 “부메랑”의 미남배우 알랑드롱의 우수에 찬 눈빛이 갑자기 떠오른다. 부메랑이 자신의 목에 칼을 들이대는 부메랑이 아니라 국민의 상처를 치유하고 아픔을 위로하는 “사랑의 부메랑”이 실현되는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다. 국가 공무원들이 대통령을 위한 눈물보다 국민을 위한 눈물에 더 의미와 가치를 두는 대한민국이기를 소망한다. 2014년 갑오년에, 갑오경장의 새 역사가 펼쳐지기를 희망한다. 성탄을 앞두고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나이다.”라는 마지막 말씀이 기도 중에 자꾸 떠오른다. 그대는 그대가 하는 일을 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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