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19 / 영역 다툼의 종착점은 어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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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 산책 19 / 영역 다툼의 종착점은 어디
  • 법률저널
  • 승인 2013.09.06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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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문명의 발상지인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역사를 주변인의 관점에서 보고 있는 구약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작은 나라가 족장시대에서 출발해 왕정시대로 발돋움하는 과정을 사무엘서에서 짧게 다루고 있다. 저자인 사무엘은 초대 왕 사울의 등장과 몰락의 과정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내리막길에선 사울의 월권(越權)사건이 그 핵심에 자리 잡고 있다. 내용인즉, 정적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해변 모래같이 밀려든 적군을 보고는 군급하여 사무엘이 집전해야 할 제사를 본인이 나서서 드린 것이다. 사무엘의 책망에 ‘적진의 위세에 두려워하는 백성이 뿔뿔이 흩어질까 봐 어쩔 수 없었다.’는 사울왕의 변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단순한 월권(越權)사태로 끝나지 않은 건 자격 없는 자의 제사 행위를 신에 대한 범죄로 단정했기 때문이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지난달 23일 "감정평가업자가 아닌 자가 감정평가 업을 영위한 것은 위법"이라며 삼정KPMG어드바이저리 공동대표인 이모씨와 업무 수행자 정모씨, 손모씨에게 각각 500만원의 벌금형을 판결했다. 이들은 2009년 국내 굴지의 기업체 사옥과 사업장, 물류센터 등의 부지에 대한 자산재평가 업무를 의뢰받아 장부가액 약 3조 4천 억 원인 토지의 경제적 가치를 약 7조2천 억 원으로 표시하고 이에 대한 수수료 1억5천400만원을 받아 실질적인 감정평가업무를 수행했다. 당시 감정원은 ‘자산재평가 업무를 할 자격이 없는 회계사의 자산평가 행위는 위법’이라며 삼정KPMG어드바이저리와 대표 등을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고 금번 법원이 "해당 사안은 '부동산 가격공시 및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 상 감정평가업자가 아닌 자로서 감정평가 업을 영위한 것에 해당한다."고 판시한 것이다. 해당 회계사들은 “2009년 도입된 한국채택국제회계기준(K-IFRS)에선 자산재평가 수행주체를 '전문적인 자격이 있는 평가인'(professionally qualified valuers)으로 규정한 만큼 회계사도 평가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며 즉각 항소해 지리멸렬한 법정다툼은 좀 더 이어질 전망이다.

 

‘전문적인 자격이 있는 평가인’의 범위를 얼마나 폭넓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최종 판결이 달라지겠거니 생각할 수 있지만 필자는 감정평가사의 신분을 떠나 현 판결이 지극히 타당하다는 입장이다. 감정평가사 외에도 부동산 전문가는 무수히 많다. 애널리스트를 능가하는 주식 전문가가 허다하고 호텔 조리사를 민망케 하는 시골집 할머니 요리사도 부지기수다. 실력으로만 따지자고 들면 교육부 장관을 대신할 재야 교육 전문가가 적지 않을 것이고 회계 감사 업무를 대신할 수 있는 기업 재무 컨설턴트도 무수히 많다. 그럼에도 재야 교육 전문가에게 정책 입안과 집행을 위임하지 않고 기업 컨설턴트에 회계 감사 업무를 허용하지 않는 건 자격 있는 자의 업무 수행이 최선이라는 판단에서다. 법에서 정하고 있는 자격자에게 해당 업무를 독점하게 하는 것이 업무의 효율성, 절차적 타당성, 책임소재의 투명성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다.

 

필자가 분기별로 참여하고 있는 NPL투자자문 업무에서도 감정평가법인은 자신의 업무 범위를 분명히 구획하고 있다. 감정평가는 부동산의 시장가치를 추계하는 것이지 특수한 시장의 하나인 경매시장에서 대상 부동산의 적정한 낙찰금액, 즉 인수금액을 저울질하는 영역까지 미치지 않는다. 감정평가법인은 자산의 실사를 통한 시장가치를, 회계법인은 각종 권리 등의 분석 과정을 거쳐 부실 자산의 매각 시 예상되는 현금흐름 자료를 넘겨주면 부실자산 투자기관에서 경매시장에서의 낙찰관행과 오랜 투자경험을 바탕으로 매수금액을 결정해 입찰하게 된다. 현금흐름에 대한 예상과 투자집행을 감정평가사라고 못할 바 없지만 투자 실패의 책임소재로부터 자유로워지려면 업무분장은 분명해야 한다. 회계법인 혹은 회계법인 자회사의 감정평가 업 영위도 이런 측면에서 자체적으로 검토해 볼 만한 일이다.

 

인간도 텃새동물(territorial creature)의 하나라 고유 영역을 침범당하면 맞서 싸우게 된다. 계속되는 평가업계와 회계업계의 업무영역 다툼이 밥그릇 싸움으로 비쳐질 수도 있지만 평가업계 입장에선 이미 발급받은 독점적인 양식장 면허 업을 근해 어업권자와 공유할 생각은 없을 것이다. 얼마 전 미국증권거래위원회(SEC)는 한 기업체의 자산재평가 결과에 대해 제 3의 감정평가법인으로부터 검토보고서를 받아 제출하라는 요청을 했다. 기업체와 이를 감사하는 회계 법인이 공조하여 선정한 감정평가법인의 자산재평가 결과가 혹시 회사 측에 유리하게 결정돼 일반 주주의 이해관계에 반할 수 있으니 이를 확인해 달라는 것이다. 하물며 회계감사의 독점권을 가진 회계 업계에서 그들 스스로 조정한 장부 가치를 감사하는 모양새가 얼마나 위태하게 보이겠는가. 원 업무의 공정성까지 의심받을 염려가 있는 부업이라면 재고해 봐야 할 것이다.     

이용훈 감정평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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