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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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 법률저널
  • 승인 2013.08.22 2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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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 교수 / 변호사 / 시인

 

이 세상에 절대적 정의는 존재하는가? 해탈을 가르친 부처나 인을 가르친 공자 또는 천국을 가르친 예수쯤 되면 그들의 가르침 속에 절대적 정의가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 같은 필부의 세계에서 절대적 정의를 부르짖는 것은 대단히 위험스러운 일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절대적 정의와 상대적 정의를 한 자리에 놓아두고, 우리는 끊임없이 정의를 시험한다. 시험당하는 정의는 참으로 곤고하다. 외롭고 괴롭다. 절대적 정의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은 소중한 것이니 어느 누구라도 함부로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그래서 인간이 인간의 생명을 취하는 사형제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상대적 정의는 어떤 흉악범이 다른 많은 사람의 생명을 빼앗으려 할 경우 선제적으로 그 흉악범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다른 피해자의 생명을 지킬 수 있어 상대적 이익이 크므로 그 흉악범을 사전 차단하거나 사후 사형에 처하여야 한다며 사형을 정당화한다. 인간세상 자체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까닭에 절대적 정의를 정의한 후 그 절대적 정의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당위를 강요받게 되면 혼란스러워진다. 절대적 정의를 버릴 수 없으면서도 버려야 하고, 상대적 정의를 원하지 않으면서도 취해야 하는 까닭이다. 이처럼 정의는 언제나 정의 자체로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정의로 인해 혼돈케 한다.


이러한 절대적 정의와 상대적 정의의 틈새로 악한 자들의 불의가 기생하며 이익을 취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통제되지 않으면 오히려 불의가 기고만장하여 정의 위에 군림하기까지 한다. 마치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듯 불의의 세상이 당연시된다. 절대적 정의의 위험성 때문에 상대적 정의를 부르짖게 되면, 모든 사회적 가치는 결과론적인 크고 작음으로 평가받게 되고, 상대적으로 작은 가치는 보다 큰 가치에 밀리게 되어, 이 세상에 억울함이 생성되게 된다. 원세훈 전 국정원장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제18대 대통령선거에 대한 국정원의 불법관권선거 및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지휘 하에 이루어진 국정원의 국내정치관여 및 선거개입행위에 대한 수사결과조작에 대한 국회청문회가 지난 21일 사실상 끝이 났다. 어떻게 국정조사보고서의 내용이 작성될 것인지, 그래서 국정조사보고서가 여야 간의 합의로 제대로 채택이나 될 수나 있을런지, 아니면 보고서마저 제대로 채택이 되지 않고 정말 정치적 애매모호함과 무기력함으로 끝이 날지 지켜볼 일이다.


선서를 거부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 그리고 국정원 댓글녀로 상징되어 온 김 모 국정원 여직원과 관련 국정원 직원, 사건은폐에 조직적으로 관여한 것으로 기소된 경찰관들에 대한 증인신문절차가 종결되었다. 이러한 증인들이 가장 많이 했던 증언은, 자신들의 행위가 형사재판 중에 있거나 재정신청 중에 있어서 대답하기 곤란하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실은 그런 것이 아니다 등등이었다. 실체적 진실이 증언되지 않은 국정조사현장을 생중계로 지켜보거나 언론을 통해 전해들은 수많은 국민들은 또 다시 국정조사무용론을 들고 나온다. 이번 국정조사에서도 별로 밝혀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눈에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은 수많은 증인들과 그러한 증인들을 옹호한 정치세력은 이번 국정조사가 사실상 종결된 현시점에서 정략적 방어에 성공했다고 자화자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결과를 조장하고, 그러고 나서 그러므로 국정조사는 무용지물이니 하지 말자, 하자고 한 쪽이 잘못한 것 아니냐고 오히려 덤터기를 씌우려고 한다. 적반하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만 알고 둘은 알지 못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봄이 오고 있음은 강남에서 날아온 제비 한 마리로 알게 된다. 채 녹지 아니한 대지를 뚫고 솟아나는 새 잎 하나 돋음에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의식과 무의식의 공간 그 어디쯤에서 봄은 오고 있고, 우리 모두는 그 봄을 느낀다. 어제까지만 해도 무더웠던 한여름의 뜨거움이 새벽 문득 옷깃을 여미게 하는 공기의 차가움을 통해 가을이 오고 있음을 느끼듯 그렇게 뜨거웠던 여름은 가고 있는 것이다. 미세한 떨림 하나에서 우리는 우주 만물의 변화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거짓의 난무 속에서 진실은 그렇게 작은 틈새를 뚫고 빛살처럼 온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을 원칙으로 한다. 그렇다고 하여 다수결로 결정되면 그 것이 언제나 정의인 것은 아니다. 다수결로 결정되면 모든 것이 정의라고 믿는 것은 또 다른 오류를 만들게 된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기본명제는 진실은 결코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명제를 이번 국정조사과정에서 권은희 전 서초경찰서 수사과장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다. 그녀는 국정조사에 증인으로 나온 나머지 14명의 관련 경찰관들과 다른 대답을 하여, 14대 1의 부정과 인정의 상반된 증언내용을 접하는 국민들로 하여금 누가 거짓말을 하고 누가 참말을 하는지 느낄 수 있게 해 주었다. 하지만 그러한 와중에도 어리석은 인간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려 하는 경향이 있는지라, 억지로라도 진실에 마음을 걸어 잠근 채 자기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믿고 싶은 것만 취사선택하려고 하는 이도 있다. 여전히 미망의 세계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오류의 늪은 끈질기게 진실을 빨아들인다. 오류의 늪은 늪에 빠진 사람을 허우적거리게 만들고, 결국 그 늪에 빠져 죽게 만든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오류의 늪으로 빠지라고 강요하지도 않고, 밀어 넣지도 않았는데도, 오류의 늪에 빠지는 자는 스스로 자기결정으로 오류의 늪에 빠진다는 사실이다. 그러면서 오류의 늪이 모든 것을 빨아들여, 종국에 생명을 앗아갈 때까지 여전히 자신이 옳다고 강변한다. 스스로 갇힌 오류의 늪은 그렇게 무섭다.


고등학생 몇 명이 10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산 빵 100개를 가지고 권은희 수사과장이 현재 근무하고 있는 송파결찰서를 방문하였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권은희 수사과장이 외압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는 증언을 통해 국정원 선거개입에 대한 수사과정에서의 문제점을 밝혀준 것에 감동을 받아서라고 한다. 수고하는 경찰관들에게 빵을 사들고 찾아가는 지혜로움이 요즘 어린 학생들에게도 있는 것이다. 그 어린 학생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자신들의 용돈을 모아 혹시라도 진실을 밝힘으로써 상부로부터 알 수 있는 압박에 시달리게 되어 권은희 과장이 힘들어할까 봐, 외로운 섬에 갇힌 것처럼 거대한 경찰조직으로부터 외면받아 고독해질까 봐, 그러지 말라고,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지지하는 학생들이 있으니 외로워하거나 힘들어하지 말라고 격려하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감대는 진실의 힘이 강하기 때문이다. 진실은 사람을 감동시킨다. 사람을 연대케 하고, 유대감을 조성한다. 반면에 거짓은 모래성 같은 것이라, 높이 쌓이고 외관상 튼튼해 보이지만 어느 순간 와르르 무너지게 되어 있다.


결국 박근혜 대통령의 침묵과 새누리당 국정조사 위원들의 국정조사과정에서의 억지는 믿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과 듣고 싶은 것에 골몰하지 아니한, 진실이 무엇인가를 알고 싶어 하는 대다수 깨어 있는 국민들의 눈과 귀와 가슴을 진실의 문 앞으로 끌어당기고 있다. 시국선언에 머물렀던 천주교측에서, 이러한 진실의 문을 열고자 지난 20일 천주교수원대교구 정자동성당에서 이용훈 주교의 집례로 국정원불법선거관여에 대한 시국미사를 개최하였다. 다른 교구에서도 계속하여 시국미사가 열릴 것이라고 한다. 침묵하고 있던 농어민들도 촛불을 켜기 시작하고, 어린 중고등학생도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첩첩산중이다. 산 넘어 산이고, 물 건너 물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유리한 국정원의 대선개입과 서울경찰청의 수사결과 조작발표에 대한 진실이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따라서 유일한 해결방법은 진실의 문을 열어 진실을 보여주는 것밖에 없다. 모바일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빛의 속도로 진실이 파급되는 현상을 수없이 경험하고 있다. 특정 메이저 언론의 일방통행식 여론형성은 이제 불가능하다. 21세기 스마트폰시대는 쌍방통행을 요구하고 있다. 진실이 밝혀지지 않고 그 요구는 멈춰지지 않는다. 꺼지려 하면 누군가 불씨를 다시 피우고 끝없이 타오르게 한다.


박근혜 정부나 새누리당은 민생경제에 ‘올인’해도 부족할 판에 이미 대통령 취임 후 반년이나 지난 이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이 되어 버린 제18대 대선과정의 국정원개입문제로 국력을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회유하고 여론의 물꼬를 바꾸려 하지만, 진실이 규명되지 않는 한 그러한 인위적 물줄기 변경은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4대강공사 후 녹조현상이 지난해에 비해 월등히 심각해지는 것을 올해 들어 직접 체험함으로써 이건 아니다라는 인식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민주주의의 본질을 침해한 국정원의 선거개입은 국민들의 “절레절레 고개돌림”으로 조용히 나타나고 있다.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이 건 아닌데!”하는 생각의 공감대를 이루고 있다. 이번 국회의 국정조사는 국정원과의 또 다른 연결축 기능을 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김무성 새누리당의원, 권영세 현 주중한국대사에 대한 증인채택무산으로 실체적 진실규명에 한계를 드러낸 것은 사실이지만, 국회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함으로써 특검을 통해서라도 실체적 진실규명의 필요하다는 또 다른 공감대를 불러일으키게 될지도 모른다.


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 진실을 다수결로 결정하려는 자는 진실의 파괴력을 모르고 있는 자이다. 진실은 그냥 진실일 뿐이다. 단 한 사람의 지지자가 없더라도 진실은 그냥 진실로 존재하는 것이다. 영원히 묻히거나 언젠가 세상에 나타나거나 둘 중의 하나이겠지만 진실은 그냥 진실로 존재할 뿐이다. 수만 년 전의 공룡이 화석을 통해 우리에게 그 실체를 알려주듯, 언젠가 밝혀질 것이다. 그래서 진실은 위대하고 강한 것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진실은 다수결로 결정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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