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평가 산책 11 / ‘감정평가서’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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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 산책 11 / ‘감정평가서’의 목소리
  • 법률저널
  • 승인 2013.06.28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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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평가 산책 11입맛에 맞는 드라마 한편이 분주한 일상의 피로감을 해소하는 청량제이긴 한가 보다. 매번 ‘본방 사수‘하는 드라마 한 편 씩을 꿰고 있는 아내의 요즘 타깃은 수목극의 대세인 ’너의 목소리가 들려‘다. 눈빛만 보면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자 학생과 속물근성이지만 나름 귀여운 매력을 선보이는 국선변호사, 그리고 그와 대비를 이루는 선량한 국선변호사가 주인공이다. 짜임새 있는 진행과 살아 있는 캐릭터가 시청자를 흡입하며 고공행진중이라고 아내가 열심히 선전한 터라 손에 이끌려 한두 편을 재방으로 시청했다. 재미와 긴장감이 묻어 나오는 게 한동안 아내를 포함한 여러 사람 폐인 만들겠다 싶었다.      

 

근 5년 가까이 감정평가사 수험생을 대상으로 감정평가실무 강의를 진행해 오고 있다. 1년 내내 쉬지 않고 강의하는 적은 없었고 적게는 한 달, 많으면 4개 월 정도 진행해 왔다. 강의의 목적은 현업에 매몰되면서 자연스레 이뤄지는 이론적인 배경지식의 침식현상을 방지하자는 것이었다. 물론 부수입이 창출됐으니 해를 거르지 않고 지속할 수 있었다. 매년 수강생은 바뀌지만 강의하며 필히 당부하는 내용은 한결같다. 채점자가 알아주겠거니 하고 정신없이 답안을 채우지 말고 일목요연하게 목차와 내용을 구성하라는 것이다. 경중이 일반인 것, 선후가 역전된 것, 괴발개발 글씨체에 주술구조가 엉망인 문장으로 채워진 답안에서  ‘합격시켜도 충분한 실력을 갖춘 수험생의 답안입니다.’라는 수험생의 목소리를 들을 가능성은 희박하기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공시 및 감정평가에 관한 법률」제 43조는 ‘고의로 잘못된 평가를 한 자’에 대한 벌칙을 담고 있다. ‘신의와 성실로써 공정하게 평가하지 않고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잘못된 평가를 한 자’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3천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는 내용이다. 감정평가서에는 간혹 오기나 오산이 발견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전체 평가금액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미미한 사항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고의 또는 중대한 과실로 작성된 평가 보고서는 사정이 다르다. 평가 산식에 등장하는 숫자를 임의로 조작하거나 평가 대상을 확인할 수 있는 현장사진을 바꿔치기 한다. 내부 통제기관이 이을 묵인하거나 더 나가 적극 가담하게 되면 버젓이 위조된 평가 보고서가 시중에 떠돌고 기어코 사고로 이어진다.

 

지난주에 위조 감정평가서로 인한 사고 소식이 들렸다. 기획부동산업자와 농협 임직원 등이 결탁해 100억 원대 부당 대출을 받는 과정에서 임야 평가금액을 정상 금액 대비 4배 부풀리는 데 평가법인이 적극적으로 가담했다는 내용이다. 해당 법인에 대한 세간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는데 이런 대출사고에 연루되었다 하니 떡잎부터 알아봤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들끓는다. 말도 안 되는 평가금액으로 부풀리려면 필시 고의로 숫자를 조작했을 것인데,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들통 날 일을 겁 없이 저질렀다는 점이 놀라웠다. 필경 수 십 억 원의 손해 배상을 감수해야 할 터인데 부당하게 착복한 평가 수수료는 기껏 몇 천 만 원이었으니 소탐대실(小貪大失)그 자체다. 

 

감정평가서에도 작성한 평가사의 목소리가 들린다. 대출금액을 맞추기 위해 적극적으로 담보평가금액을 시세에 근접시킨 평가서는 “진짜 최선을 다해서 올린 겁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보상투기로 과밀 식재한 나무를 보수적으로 평가한 보상평가서는 “보상투기로 꾸역꾸역 나무 옮겨 심은 거 알고 있습니다.” 라고 속삭인다. 법정지상권 성립 여지가 불확실한 토지를 평가한 경매평가서는 “법정 지상권 판단은 평가사 몫이 아닙니다. 혹시 성립될 경우에는 ‘비고’란 가격을 참고하세요.” 담담히 말하고 있다. 이런 세미한 음성은 감정평가사만 들을 수 있는 영역일지 모른다. 그렇지만 적어도 신의와 성실로 공정하게 평가했다는 목소리는 모든 이에게 들려줘야 한다. 이런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평가보고서는 소음만 양산할 뿐이다.

 

감정평가사는 평가보고서로 말해야 한다. 시시때때로 들려오는 이런 안타까운 소식은 필자 같은 사람에게는 불편한 소음을 넘어 불쾌한 ‘굉음’ 그 자체다.        

이용훈 감정평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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