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역사는 언제나 현대사만 존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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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역사는 언제나 현대사만 존재할 뿐이다
  • 법률저널
  • 승인 2012.09.1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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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대한민국헌법 제19조는 “모든 국민은 良心의 自由를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윤리적 명제로서의 양심은 자신의 행위나 태도가 도덕적으로 선한가 혹은 악한가를 판단하는 준거를 제시하고, 도덕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으로의 유혹에 저항하며, 자신의 도덕적 비행에 대하여 죄의식을 느끼게 한다. 다시 말해 양심은 일반적으로 선ㆍ악의 판단에 대한 인지적 기능과 행위의 실천이나 금지에 따르는 동기적 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사회생활과정에서 인간이 자신의 행위에 대하여 도덕적 책임을 자각하는 감정상의 느낌을 말한다. 스스로 자신의 행위가 옳은가 그른가를 판단하는 철학적 명제로 양심이 기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심을 두고 선천적인 것인지 아니면 교육을 통해 형성되는 것인지를 두고 견해의 대립이 있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마땅히 하여야 할 의무를 이행할 때는 양심이 맑아지나 반대로 나갈 때에는 양심이 번뇌하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 컴퓨터를 통한 폭력적, 퇴폐적 문화가 우리의 일상생활 깊숙이 침투해 들어오고, 극심한 경쟁사회로 세상이 변해감에 따라 남을 배려할 수 있는 여유가 사라지고, 살아남기 위해 몸부림치다 보니 양심의 자유를 지키기가 점차 어려워져가고 있고, 어쩌면 양심의 본질마저 잊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국민의 양심이 땅에 떨어지면 국가는 양심회복운동을 전개하는 방법(이 역시 의도적, 국가적 통치행위 속에서 이루어지게 되면 또 다른 윤리적 문제를 야기하게 될 것이지만)이나 국가공권력을 내세운 합법적이라고 강변되는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거나 어느 방법을 선택해 시행하게 된다.


이때 국가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방법이 손쉬울 뿐만 아니라 즉각적 효과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에 곧바로 물리적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히게 되는데, 특히 도덕적 기반을 상실한 정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법은 속에서는 상처가 곪아 터지고 있는데, 상처에 대한 근본적인 치료를 하지 않은 채 괜히 상처부위에 반창고만 붙이는 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암환자에게 소화제 먹이는 꼴일 것이다. 그러니 근본적 치료, 다시 말해 행위자 스스로 양심회복을 통해 도덕적, 윤리적으로 어떠한 나쁜 행위로 나아가는 의사결정을 스스로 자제하는 전자의 방법이 모색되어져야 한다. 이러한 양심회복운동이 사회에 널리 퍼지게 될 때, 모든 사람이 자신의 양심과 타인의 양심에 의한 사회적 자제가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깨끗한 곳에 조그마한 쓰레기를 하나 버리면 잠시 후 그 주변이 온통 쓰레기장으로 변해버리고 마는 실험결과가 보고된 적이 있다. 반면에 깨끗하게 해두면 어느 누구도 감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지 못하는 심리적(양심적) 압박을 받게 되어 항시 그 주변이 청결하게 유지되는 경향을 보인다는 것 또한 실험을 통해 증명된바 있다. 이처럼 깨끗함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더러움을 선택할 것인지는 윤리적 양심과 사회적 양심에 의해 결정된다고 하겠다. 


헌법적 명제로서의 양심의 자유는 내심의 자유 중 윤리적 양심을 의미하는 것이라거나 윤리적 양심에 국한될 필요 없이 모든 내심의 자유를 의미하는 것이라는 견해들이 주장되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 헌법이 사상의 자유에 대해 규정하고 있지 않으므로 사상의 자유를 포함한 내심의 자유를 양심의 자유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양심의 자유는 양심 형성의 자유, 침묵의 자유를 주요내용으로 하고 있다. 헌법이 자유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할 수 없다고 천명하고 있으므로 그 자체만으로 자유의 핵심내용인 양심의 자유는 어떠한 이유로도 법률로써 제한할 수 없다고 하겠다. 그렇지만 이러한 양심의 자유는 표현의 자유와 결합함에 있어서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문제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변호사 생활을 통해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으로 거짓말을 잘 한다.”라는 사실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기야 당사자가 주장한 것과 증명된 것만으로 재판하여야 하는 변론주의원칙의 소송기술적 한계상 재판이라는 것이 “법적으로 허용된 거짓말 경연장”일 수밖에 없지만, 법정에서는 참으로 많은 거짓말이 허용되고 있다. 이러한 수많은 거짓말파티에 직업적으로 관여하면서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良心의 自由는 兩心의 自由, 즉 참말과 거짓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자조적 쓴웃음을 지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이러한 거짓말천국인 대한민국에 재미있는 사회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사회가 도래하고 있다는 현실이다. 다시 말해 양심회복이 아니라 과학기술문명의 발달로 한 인간이 태어나는 순간에서 죽는 순간까지 모든 사실이 기록됨으로써 더 이상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정말 무서운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이러한 세상의 도래를 자각하지 못하는 일부 후안무치한 자들이 있지만, 우리가 인식하든 인식하지 아니하든 거짓말이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세상이 도래해 버린 것이다. 수많은 감시카메라가 일상생활을 기록하고 있고, 개인용카메라와 녹음기가 상시휴대품화되어 버린 세상에서 더 이상 거짓을 주장할 수 있는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고, 은밀한 사생활이 있을 수 없게 되어버렸으니, 이러한 과학문명이기에 대항할 수 있는 인간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사례가 최근에 새누리당 대선기획단 공보위원인 정준길 변호사와 안철수 교수의 대외창구역을 맡고 있는 금태섭 변호사 사이의 전화통화사건이다. 정준길 공보위원은 안철수 원장측을 협박한 것이 아니라 친구인 금태섭 변호사를 염려하여 사실관계를 알려주고 마음의 대비를 시켰다는 것인데 반하여, 금태섭 변호사는 새누리당 정준길 공보위원으로부터 안철수 교수가 대선출마를 하면 죽는다는 협박을 받았다는 것이다. 거기에 택시를 타고 전화한 것이 아니라 자가용 운전을 하면서 전화했다는 정준길 변호사의 변명이 택시기사의 등장과 택시의 블랙박스의 기록, 각종 감시카메라에 찍힌 영상 등에 의해 거짓말로 밝혀짐에 따라 꼴이 말이 아니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사소한 거짓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 어찌 보면 뼈에 새겨져야 할 숨은 이야기조차 공공연하게 드러나고 있는 세상에서 향후 공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하루하루의 일기를 진실되고 성실하게 써야 하는 인생과제를 안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순간을 모면하기 위해 한 사소한 거짓말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는 눈덩이사태로 변해버린 게 정준길 새누리당 공보위원의 거짓말사건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만 힘을 가진 자들은 종종 거짓을 참으로 바꿀 수 있다는 착각에 여전히 빠진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검은 것을 희게 포장해 버린 경험이 있기 때문에 지금도 여전히 검은 것을 희다고 우기는 것이다. 이는 마치 어린이들이 즐겨 읽는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에 나오는 벌거벗은 임금님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황당한 묘기를 부려본 경험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는 자들은 새로운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 채 여전히 자신의 힘으로 세상을 왜곡할 수 있다며 입에 발린 거짓말을 하고 있다. 모든 관객은 “아, 벌거벗은 임금님의 아래 똥배가 볼 만하구나.”하고 감탄(?)하고 있는데, 벌거벗은 임금님은 혼자 곤룡포를 입은 것처럼 으스대고 있으니, 이러한 코미디 중의 코미디가 어디 있는가 말이다. 제18대 대선이 100일이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볼 때 어찌 보면 이번 대선은 거짓말을 많이 한 사람과 적게 한 사람의 싸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여전히 거짓말이 통용될 수 있는지, 아니면 거짓말이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지 두고 볼 일이다. 물론 둥근 게 축구공이듯, 국민의 민심이 어느 한순간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변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상은 상수에 의해 유지되어 온 것 또한 부정할 수 없으니, 재미있는 선거가 되리라 본다.


하지만 이번 대선은 조작된 여론에 의한 선거가 불가능한 최초의 대통령선거가 되리라 본다. 조작된 여론은 곧 거짓임이 폭로됨으로써 더 큰 손실이 부메랑으로 되돌아갈 것이기 때문이다. 일부 메이저 신문과 방송사들에 의한 편향된 여론 형성이 조작될 수도 있지만, 지구 끝까지 쫓아가 진실을 파헤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네티즌들이 수백만 명이 활약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더 이상 왜곡된 여론조작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5.16과 유신은 과거사인가? 장발족이라고 경찰에 끌려가 머리를 강제로 짤리우고, 미니스커트를 입었다고 강제로 경찰에 연행되어 갔던 그 시절, 이장희의 ‘그건 너’, 송창식의 ‘왜 불러’, 김추자의 ‘거짓말’, 이금희의 ‘키다리 미스터 김’, 김민기의 ‘아침이슬’ 등 지금 들어도 감동적인 주옥같은 노래들이 금지되었던 시절, 그 시절은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 현대사이다. 고문에 의해 조작된 인혁당 간첩단사건으로 사형이 집행된 인혁당 피해자유가족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온몸으로 울부짖고 있는 현대사다.


이처럼 확실한 현대사를 계속해서 과거사라고 고집하고, 현대사가 역사인데도 자꾸 역사에 맡기자고 우기는 것은 현대사를 부정하는 궤변이고 거짓말이다. 현대사를 부정하며 찾는 역사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서울역사를 찾아 떠나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는가? 지하철 2호선을 타보라, 하루 종일 순환하는 저 순환열차를! 역사는 그렇게 현대 속에서 순환되고 있는 언제나 현재인 것이다. 과거사도, 현대사도, 미래사도, 모두 현재인 것이다. 왜냐면 끈질기게, 끈질지게 연결되는 현재진행형인 것이다, 바로 역사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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