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의 쉼터 '사랑샘' 재단으로 부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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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의 쉼터 '사랑샘' 재단으로 부활
  • 법률저널
  • 승인 2012.09.07 15: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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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변협사랑샘재단'으로 설립
신영무 협회장도 3천만원 기탁

 

"이제 '사랑샘'은 문을 닫게 되지만 또 다른 모습으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약합니다. 그동안 사랑샘을 위해 격려·강연·상담·미사·보도·장소관리·물물교환 등 물심양면으로 봉사해주신 수많은 인연들에 감사드리고, 지난 8년의 세월은 순수한 열정을 쏟을 기회를 허락받은 크나큰 축복의 시기였습니다."


대학동 동방종합시장 건물에 입주해 있던 청년들의 쉼터 '사랑샘'이 건물 재건축으로 문을 닫던 지난해 2월 오윤덕 법무법인 송백 대표변호사(70·사법연수원 3기·사진)는 이렇게 석별의 정을 남겼다.


큰 꿈을 안고 있지만 고통과 실패 속에서 살아가는 이 땅의 젊은 청년들과 헤어진 지 1년 6개월 만에 약속대로 또 다시 우리 곁으로 새롭게 다가왔다. 영원히 사라질뻔 했던 사랑샘이 오 변호사와 대한변협 신영무 회장과의 숙명적인 만남으로 더 큰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


사랑샘의 역사는 1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오 변호사가 고시촌을 찾은 것은 지금은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아들(현재 김앤장에 근무)이 사법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수험생 아들의 시간을 절약해 주기 위해 신림동으로 이사를 온 그는 처음 고시촌 풍경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5평의 고시원 방에서 가족, 친구와 단절된 채 살아가는 고시촌은 삭막, 그 자체였다.


고시생들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눈물을 흘리는 아내를 보면서도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한 고생은 스스로가 감내해야 할 당연한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 역시 힘든 고시생 시절을 보내왔던 터다. 오 변호사도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한 적이 있다. 결국 은행에 취업했다가 1차 시험에 합격한 것이 아까워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치른 2차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부인 권혜옥씨의 계속된 기도와 강권에 오 변호사의 생각도 점차 바뀌어 갔다. 그는 고시생 각자의 몫으로 돌리기에는 좌절의 고통이 지나치게 크다는 것을 느꼈다. 이들이 정신적으로 위안을 받고 새로운 활력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 상처를 덜 받도록 해야겠다는 결심이 서면서 마침내 2년을 준비한 끝에 사재를 털어 2003년 2월 신림동(현재 대학동) 고시촌에 100평 남짓한 공간에 커피, 다과 등을 비치한 휴게실과 일요일에 사회 저명인사의 강의를 들을 수 있는 강당을 갖춘 사랑샘의 문을 열었다.


오 변호사는 2003년 2월 28일 이 땅의 귀한 청년들을 위하여 사랑샘을 봉헌하면서 청년들에게 장문의 글을 남겼다. "뜻은 높게 두고 생각은 깊게 하고 이웃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며 폭넓은 삶을 살아가는 희망에 찬 그런 꿈을 꾸어라...(중략) 때로는 역경과 실패가 주는 가혹하고 무자비한 고통이 필시 찾아드는 법. 잠 못 이루는 불면의 밤을 고뇌에 젖어 남모르게 오열하며 눈물로 베개를 적셨을지라도 그 눈물은 하느님이 선택한 귀한 일꾼에게만 주는 값진 사랑의 선물임을 훗날 알게될지니...(생략)"


사랑샘은 목표를 향해 사막을 걷는 젊은이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안식처였다. 매주 일요일 저녁에는 법조인과 방송인, 문화계 등 각계의 저명인사는 물론 고시 합격자들을 초청해 고시생들을 위한 열린 강의로 더욱 인기를 누렸다. 


지난 8년 동안 오 변호사는 또 매주 고생들과 차를 마시거나 산행을 하며 자신이 겪었던 수험생활과 법조계 생활을 비롯한 다양한 인생 경험을 들려주며 고시생들과 함께 고뇌를 나눴다. 그의 아내 권혜옥씨도 고시생에 자칫 상처를 줄 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상담학 과정을 2년 반 동안 이수해 1급 상담사 자격증을 취득할 정도로 열성으로 뒷바라지했다.


하지만 지난해 2월 위기를 맞았다. 동방종합시장 건물에 입주해 있던 사랑샘이 건물 재건축으로 문을 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오 변호사는 새 공간을 물색했지만 쉽지 않았다. 게다가 물심양면으로 후원한 아내에게 골다공증이 찾아와 결국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2011년 2월 21일 "광야 수험생활의 고된 행군을 감내하다가 사랑샘을 찾아 잠시나마 목을 축이고 숨을 고르며 삶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다시 꿈을 향해 길 떠나간 청년들이 떠오른다"며 "이제 이곳에서 다시는 만나지 못하게 되었을지라도 사랑샘의 동시대와 그 이후를 살아가는 모든 청년들이 훗날 어려운 이웃을 도우며 인류와 우주에 공헌하는 보람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한다"는 방을 붙이고 돌아섰다.


오 변호사는 건물 철거로 보증금을 돌려 받았을 때 이제는 쉬라는 뜻으로 생각해 아내와 봉사활동하며 고생한 대가로 한번 성지순례라도 갈려는 마음까지 먹었다. 이번에도 아내가 오 변호사를 설득했다. "한번 어려운 이웃에게 드린 돈이 다시 돌아왔다고 우리가 쓰는 것은 맞지 않은 것 같아요."


결국 오 변호사는 보증금을 맡아 줄 재단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여러 재단을 수소문하던 오 변호사는 어느날 서초동 변호사회관 로비에서 우연히 신영무 변협회장과 마주쳤다. 신 협회장은 오 변호사와 50년 전 '한국휴머니스트 서울대 학생회'라는 동아리에서 같이 활동한 인연으로 사랑샘에서 강연을 한 적도 있었다. 그 모임은 최재희, 김태길 교수 등이 주도하는 '한국휴머니스트'의 취지에 공감하는 제자 또는 추종자들의 모임이었다. 당시 오 변호사는 3학년이었고 신 협회장은 1학년으로 선후배 사이로 활동했다. 주말이면 모여서 열띤 토론회, 독서회 등으로 밤을 세웠고, 방학이면 농촌으로 달려가 휴머니즘 실천에 앞장섰다. 그 연이 지금까지 휴머니즘의 길을 같이 걸어가다 또 다시 사랑샘재단으로 굳게 맺어졌다. 


차를 마시며 안부를 묻다가 오 변호사가 고민을 털어놓자 신 협회장은 "변호사의 공동선을 향한 사회공헌활동을 본격화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며 변협이 재단 설립을 맡겠다는 제안에 선뜻 5억원을 대한변협에 내놓았다. 신 협회장은 대한변협 창립 60주년 기념사에서 "사랑샘재단을 발판으로 소외된 이웃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고 미취업 실직 청년들의 의욕을 고취시켜 나갈 것"이라며 "이를 통해 공동선을 향한 사회공헌활동을 본격화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수호하는 진정한 변호사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다할 것"이라고 밝혔다. 오 변호사는 이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지난달 20일 열린 대한변협 창립 60주년 기념식에서 감사패를 받았다.


오 변호사는 적은 금액이지만 '대한변협사랑샘재단'으로 새롭게 태어나 사랑샘의 실천정신을 이어갈 수 있게 돼서 무척 기쁘다고 했다. 그는 재단이 더욱 활발한 사업과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소중한 기부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바람을 나타냈다.


신영무 협회장도 사랑샘 정신에 공감해 정성을 보탰다. 그는 지난달 24일 사랑샘재단에 사재 3000만원을 기탁했다.   

오 변호사는 "사랑이 없는 의무적인 봉사는 아무런 존경도 감흥도 없다"며 "변호사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을 몸소 실천함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는 진정한 변호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줄 것"을 당부했다.

이상연 기자 desk@le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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