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폭력이 난무하는 야만의 시대, 그대는 폭행당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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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폭력이 난무하는 야만의 시대, 그대는 폭행당하고 있지 않는가?
  • 법률저널
  • 승인 2012.08.24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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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야만의 사회이다. 현대문명국가는 국민들이 폭력을 국가에 정치적 위임하였다. 즉 모든 국가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사상은 국가권력의 행사를 국민으로부터 위임받은 범위 내에서만 행사하도록 국가에게 강제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는 범위 내에서만 국가권력을 행사할 의무를 진다. 그 범위 내에서만 조세권을 행사하고 병역의무를 부과하며, 형벌권을 행사하여 국민의 신체와 재산권을 침해할 수 있을 뿐이다. 국가권력행사의 최소화를 통해 국민은 자유와 평등, 복지를 누릴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가 딱 6개월 남았다. 지난 4년 반 동안 이명박 정부는 지난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절을 거치면서 국민들이 서서히 잊어가던 “국가폭력의 횡포”를 의 다시 일깨워주는 반면교사가 되었다. 임기 초반에는 국가폭력의 행사를 비물리적 방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박정희 정권과 전두환 정권은 주로 중앙정보부, 안기부 등의 국가권력기관들이 앞장을 서 정권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불법으로 연행하고 고문하는 등 조금은 유치하지만 그래도 국가폭력이 눈에 보이도록 솔직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그랬기에 국민들은 신체에 가해지는 직접적 폭력에 대항하여 처절한 민주화 투쟁을 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 결과 최루탄을 제조하는 기업체 사장이 개인소득세 1위 납부자가 되기도 하였다. 보이는 곳에서의 폭력, 즉 국민을 향해 정부가 소낙비처럼 쏘아대던 최루탄의 사용량 증가만큼 국가폭력이 횡행하던 시절에는 국민을 감금하고 고문하던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폭력 또한 횡행하였던 것이다.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시절 국민을 향해 최루탄을 사용하지 않게 되자 최루탄제조업자가 망해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기조차 하였다. 우리는 최루탄제조업체 사장의 개인소득랭킹 1위에서 몰락이라는 웃지 못할 추락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국가권력의 실상을 잘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 초기부터 서서히 국가폭력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말기에 이른 지금에는 그 폭력이 점차 심각한 수준에 이르고 있으니, 보통 염려스러운 것이 아니다. 이명박 정권은 임기가 시작하자마자 “인사권의 행사”를 통해 합법을 앞세운 부당한 방법으로 임기가 남아 있는 “정신 제대로 박힌 자”들을 상당 부분 솎아내었다. 그리고 자기 입맛에 맞는 박수부대와 예스맨들을 기관장에 임명하였다. 그들의 입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오로지 충성맹세만이 넘쳐났다. 그리하여 언론기관을 장악하고, 돈기관을 장악하고, 학문과 예술기관을 장악하는 방법을 통해 서서히 구성원들을 편 가른 다음 한 쪽 편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그러한 현상이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사찰 재판과정에서 하나 둘 밝혀지고 있다.


이러한 비물리적 폭력이야말로 참으로 교묘하고 사악한 국가폭력의 횡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대놓고 신체에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니, 폭력을 당하는 자 역시 가해자에 대한 정당방위를 할 기회를 갖지 못한다. 그러면서도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고 만다. 직장에서 쫓겨나고, 혹시라도 조직 내에서 왕따 당할까 봐 숨을 죽이고, 상관의 잘못된 업무지시에도 끽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한다. 폭력의 전염성은 대단히 빠르고 크다. 정부가 앞장서서 이러한 폭력행사에 열중이니, 이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대기업을 비롯한 기업체들도 역시 근로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폭력을 행사하는데 전혀 망설임이 없다. 이명박 정부의 상징적 폭력은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사태”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임기가 시작하자마자 터져 나온 용산참사는 정당한 이주대책 없이 강제철거가 단행된 용산 남일당 건물철거과정에서 빚어졌다. 다섯 명의 애꿎은 소시민들이 불에 타 죽었고, 상급자의 진입명령을 따른 경찰관 한 명이 불에 타 죽었다. 또한 쌍용자동차사태 역시 국내 최고의 회계법인이 앞장서 재정적으로 건실한 쌍용자동차를 갑자기 며칠만에 부실기업이라며 왜곡된 실사보고서를 만든 뒤 이를 근거로 2천명이 넘는 근로자를 집단해고하는 과정에서, 정리해고를 반대하는 노동자들의 시위를 국가공권력이 무차별하게 진압하는 과정에서 빚어졌다. 그리하여 현재까지 22명의 해고근로자들이 자살 등의 극단적 방법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용산참사는 눈앞에 보이는 국가공권력 행사과정에서, 쌍용자동차참사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공권력 행사과정에서 애꿎은 국민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원인과 결과, 그리고 그 과정을 명백하게 밝혀주어야 할 언론기관들은 그 기능을 상실했는지 아니면 고의적으로 잊었는지, 기업편만 손을 들어주는 편파적 보도를 일삼기 일쑤였으니, 국가폭력을 국민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우민화정책을 언론기관이 솔선수범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 “두 개의 문”이라는 독립영화를 찾는 국민이 있게 되고, 공지영의 “의자놀이”라는 르포트타주 형식의 소설이 독자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폭력의 일상화는 드디어 기업체들이 “용역”이라는 또 다른 합법을 가장한 불법폭력을 행사하도록 빌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경비업법에 의해 고려시대 무신들의 사병처럼, 다른 나라 전쟁에 고용되는 용병처럼 기업체들이 용역을 쓸 수 있도록 보장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용역은 소극적 방어 목적으로만 사용되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은 이를 근로자들을 내쫓는 적극적 공격 목적으로 사용하여 근로자들을 개 패듯이 패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적 폭력을 방지해야 할 국가공권력인 경찰은 이를 묵인 또는 방조하여 왔다는 의심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 오히려 용역을 진압하면 처벌을 받는 지경에 이르고 있으니, 일선경찰들이 무슨 쥐뿔 날일 있다고 적극적으로 용역을 제지하겠는가? 그러니 제대로 정신을 가진 국민이라면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최근 벌어진 현대자동차나 기아자동차에 부품을 납부하는 SJM사의 노조파업과정에서 빚어진 경비용역업체 컨택턴스의 무자비한 폭력행사가 엄청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경비용역업체의 부당한 폭력의 실상을 잘 알지 못했던 국민들은 컨택턴스의 불법행위에 경악했고, 분노했다. 그런데 더 국민들이 분노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컨택턴스가 이명박대통령의 대통령선거운동의 경비를 맡았던 용역업체라는 사실, 그 컨택턴스의 회장이라는 자가 새누리당의 중요당직자라는 사실, 그 동안 저질러온 수많은 불법에도 경찰들이 수수방관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권력의 비호로밖에 보이지 않는 은밀한 지원 내지 묵인 하에 독버섯처럼 무소불위의 폭력을 계속하여 사용해 온 사실 등이 정치문제화되자, 국회는 뒤늦게 경비업법을 재정비해야겠다고 호들갑을 떨고 있다.


폭력의 일상화, 저변의 다변화, 피해자의 무력화현상이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는 문명국가라 할 수 없다. 이러한 깡패문화가 일상화되니, 가진 자, 힘센 자의 폭력의 행사는 모든 국민의 의식을 좀먹고, 인간심성을 황폐화시키는 원인이 되고 있다. 그 결과 서산 피자가게 아르바이트 여대생 성피해 자살사건이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병리현상이 태동하였던 것이다. 종업원 한두 명을 두고 있을 뿐인 그 조그마한 피자가게 사장, 그 별 볼 일 없을 것 같은 젊은 사장조차 사용자라는 이름만으로 아르바이트하는 여학생에게 왕처럼 군림하며, 그 연약한 여학생을 성폭행하고, 겁박할 수 있는 폭력현상이 태동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려운 가정형편을 돕겠다며, 스스로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을 휴학하고 박근혜 대통령 후보자도 알지 못했던 시급 5천원도 되지 않는 돈을 벌겠다며 나갔던 동네 피자가게에서, 사용자라는 이름의 사장이 행사한 폭력 앞에 억울하게 희생당하고 만 어린 여학생의 자살사건에 난 눈물이 난다. 그 소식을 접했을 때, 이 거대한 국가폭력으로부터 근원적으로 발생한 폭력의 일상화가 이 작은 피자가게에서조차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모순구조에 분노가 치솟는다. 당신의 딸이, 여동생이, 제자가 이런 부당한 대우를 받는, 받아도 죽을 때까지 이를 해결할 힘을 갖지 못한 채 고민하다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이 사회적 부조리의 만연 앞에 그대는 눈물이 나지 않는가? 분노가 일어나지 않는가?


국가폭력은 겸손해야 한다. 최소한에 그쳐야 한다. 왜냐고? 국가가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국민을 보호하라고 맡겨놓은 폭력을 국가가 거꾸로 국민을 겁박하는 데 사용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난 4년 반 동안 이명박 정부는 너무나 많은 폭력을 국민을 향해 행사하였다. 멘봉이라는, 일본의 저급한 만화책 속에서 최초에 부정적으로 사용되었던 저 말이, 그래서 일본 국민들은 부정적 의미로 사용하며 일상생활에서 잘 쓰지 않는 저 말이, 대한민국에서는 방송언어에서부터 거의 모든 국민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단어가 되어버린 지금, 그래서 박근혜 대통령후보조차 공개석상에서 멘붕이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쓰고 있는 현상이 국가폭력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고귀한 영혼의 황폐화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초등학교의 사소한 왕따현상에서부터 국가공권력의 거대한 폭력행사까지, 대기업의 근로자에 대한 사업주의 무자비한 경제적 폭력의 행사에서부터 저 서산의 조그마한 피자가게 주인의 폭력행사까지 만연되어 있는 폭력의식을 우리는 추방해야 한다. 우리는 폭력추방운동을 전개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부당한 폭력행사에 대해 국가 형벌권이 엄정하게 행사되어야 하는데, 이명박 정권 역시 한 축의 폭력주체로 자리 잡고 있으니, 한숨이 나올 뿐이다. 그래도 마지막으로 믿을 곳은 사법부뿐이다. 최근 한화기업 총수인 김승연 회장에 대한 4년 징역형 실형 구형은 거대자본에 휘저임을 당하며 주체성을 상실한 채 표류하던 사법부가 어쩌다 정당한 공권력의 주체로서의 자각을 시작한 듯해 반갑기조차 하다. 앞으로 이상득 전 의원, 박영준 전 차관 등 권력형 비리에 대한 재판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지 지켜볼 일이다. 이제 가진 자들에 의해 무지막지하게 행사되어 온 폭력이 법치의 지배 아래 합리적으로 공평하게 심판받는 사회, 폭력이 추방되고 합리적 이성이 지배하는 사회가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랄 뿐이다. 그대는 고립무원의 외톨이로 일방적인 폭력의 희생자가 되어 본 적이 있는가? 그대는 무차별적인 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그러기 싫다면 우리 서로 비겁한 사람이 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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