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벌거벗은 임금님, 꿀단지에 줄을 선 개미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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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벌거벗은 임금님, 꿀단지에 줄을 선 개미떼들
  • 법률저널
  • 승인 2012.08.1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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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꿀은 원래 벌의 것이다. 아니 원래는 꽃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벌의 꿀을 훔쳐 자기 것이라 우긴다. 꽃으로서는 인간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통해 기쁨을 주고, 향긋한 꽃내음을 풍겨주고, 달콤한 꿀까지 주는 데도 마지막에 가서는 인간에게 꺾임을 당하니 참으로 슬플 일이다. 우리가 달콤한 꿀맛을 보는데도 이렇게 꽃의 슬픔이라는 인과관계를 품고 있다. 흙의 기를 빨아 먹고 생명으로 태어나는 꽃이라며, 그 흙의 일부가 우리 인간의 살점이었다고 우긴다면 할 말이야 없지만, 흙의 양분과 하늘의 햇빛과 적당한 온도와 물을 빨아먹으며 꽃은 아름답게 피어나 자신 속에 꿀을 생성한다. 벌은 촉수를 돋아 그 꿀을 빨아 먹고, 일부를 도로 품어내 꿀통에 저장하니 자연의 신비는 참으로 신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근본적으로 꿀은 꽃의 것이다. 작은 미풍 앞에서도 저항하지 못한 채 흔들리는 꽃의 것이다. 꺾임 앞에 더욱 진한 향기를 발하는 꽃이 주인인 것이다. 하지만 꽃은 빼앗기면서도 저항하지 아니한다. 거기에는 암술과 수술의 교합을 사모하는 뜨거운 열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어줌이 삶이고, 삶이 내어줌이다. 이를 통해 꽃은 열매를 맺고, 더 큰 우주를 키운다. 그런데 인간은 어떠한가? 이 우주순환의 먹이사슬의 최정점에서 언제나 가해자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정없이 꽃을 꺾고, 꿀통을 뒤집는다. 나중에 죽어 흙 한 점 되어  다 갚겠다는 그 약속 하나로, 죽은 뒤 자신의 썩어질 몸뚱아리 하나 담보로 살아있는 모든 것들의 생명을 취하는데 망설임이 없다.
 

지금 대한민국 정치판은 꿀단지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벌들이 열심히 모아 놓은 꿀단지 하나를 서로 차지하겠다고 야단법석이다. 원래 저 꿀이 국민의 것이었음을 그들이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꽃이 벌에게 그 꿀을 준 것처럼, 국민이 제도와 정치적 위임을 통해 꿀단지 관리권을 부여하였음을 안다면 정치가들이 그 책무의 막중함에 저렇게 꿀단지쟁탈전을 막무가내로 벌이지는 못할 것이다. 그 쟁점에 박근혜, 안철수, 문재인 등의 후보가 있다. 박근혜와 문재인은 그 꿀맛을 한 번 맛보았던 경험이 있고, 안철수는 아직 그 꿀맛을 맛보지는 않았지만 다른 분야에서 다른 종류의 꿀맛을 보았음직하다.
 

현재는 그 꿀단지를 이명박 대통령이 독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꿀단지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해 여기저기 구멍이 뚫려 있는 상태이다. 그러다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꿀의 단맛을 보아버렸다. 수많은 이권에 개입하였고, 부정부패를 저질렀다. 지상의 꿀맛에 가장 민감한 것은 개미떼이다. 어떻게 꿀냄새를 맡았는지, 꿀단지 근처에는 어김없이 개미떼가 한 무리 나타난다. 주인인 모든 국민이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오로지 꿀단지를 향해 긴 줄을 늘어선 개미떼를 보고 있자면 권력 앞에 끝없이 줄을 서는 인간 탐욕의 한 무리를 보는 듯싶어, 세상사 참으로 서로 닮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쟁점에 현재 현영희 새누리당의원의 공천헌금범죄가 있다. 저 권력이라는 꿀단지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줄을 서는 것이 필요하다. 한 무리 개미떼가 줄을 서듯, 그 줄에서 이탈되면 낙오자가 되어 꿀맛을 볼 수 없다고 생각한 나머지 “부정한 돈보따리”를 싸들고 줄을 선 것이다.
 

자, 연극판을 벌려 보자, 내가 감독이 되어 시나리오를 짤 테니, 여러분은 관객이 되어 함께 구경하시기 바란다. 여기 주인공 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권력에 대한 욕망이 강하다. 유치원을 운영하며 서너 살 먹은 아이들을 맡아 기르며 소인나라의 걸리버처럼 엄청난 권력을 행사한다.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희생의 정신이 있다면 그녀는 무한한 자비로운 천사가 되겠지만, 거꾸로 힘없는 아이들 위에 군림하려 한다면 그녀를 막아낼 자가 아무도 없다. 아이들의 부모들도 아이들이 피해를 본 후에야 왈가왈부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전까지는 피해를 보지 않기 위해 유치권원장, 그녀에게 “우리 아이 잘 좀 봐 주세요.” 하며 온갖 아부를 할 수밖에 없다. 그런 아부에 익숙해진 주인공 여자는 작은 권력의 달콤함에 취해 꿀맛에 젖어 든다. 더 큰 권력을 쥐겠다며 꿀단지를 향해 줄을 서기 위해 남편과 작당한다. “여보, 우리가 무슨 힘이 있어요? 돈이라도 왕창 싸들고 가서 좀 퍼먹여야 하지 않겠어요?”라며 뱀의 혀를 날름거린다. 이때 조연 남자가 등장한다. “원장님, 원장님, 나는 꿀단지 근처로 가는 길을 알아요, 나를 인도자로 쓰시면 어떠시겠어요?” 완전한 바리톤음성이다. 무대의 조명이 조금씩 어두워져 간다. 무대 위 암연 속에서 “부시럭부시럭, 속닥속닥, 부시럭부시럭, 속닥속닥, 부시럭부시럭, 속닥속닥, 부시럭부시럭” 소리가 들려온다. 관객인 여러분은 어둠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겠다며 점점 눈을 크게 부릅뜬다. 하지만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음험한 소리만이 은밀하게 들려온다. 이때 여러분의 귀는 눈보다 더 밝아진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그건 소리의 위대함을 모르고 하는 소리, 백번 본 것보다 한 번 들은 소리가 더 오래 남아 환청처럼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삼십 년쯤 지난 후 길거리에서 지나가는 동창생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수는 있어도, 삼십 년만에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친구의 목소리를 생생히 기억할 때가 더 많음을 여러분은 경험한 바가 있을 것이다. 소리의 무서움을 모르는 자들이 불을 끈 무대 위에서 저와 같이 “부시럭거리며 속닥거리는 것”이다. 서서히 무대의 불빛이 밝아오고, 묵직한 루이뷔통 가방을 든 조연 남자가 휘파람을 불며 서서히 무대 뒤로 사라진다. “당신의 헛된 꿈이 실현될 수 있기를 나도 꿈 꾼다오.”라는 독백이 들려오며 1막이 끝난다. 이후는 여러분이 상상하시기 바란다.
 

며칠 전 티브이에서 방송된 내용이다. 김문수 새누리당 대통령예비후보는 이러한 무대 위 연극판에 대하여 진실이 규명되어야 한다고 후보자토론방송에서 주장했다. 그러자 박근혜 예비후보는 “아니, 새누리당 집안일인데 공중파 방송에서 얘기하면 새누리당에 이로울 게 뭐가 있습니까?” 하고 웃으며 반문한다. 이에 대해 김문수 예비후보가 몇 마디 말을 덧붙이는 순간 사회자가 나서서 “할당된 시간을 다 쓰셨는데요.” 하고 말을 자른다. 진실규명은 티브이 방송시간 속으로 사라진다. 저 앞의 연극처럼 암연 속으로 사라지고 없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두 가지 첨예한 가치관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당장은 당에 해가 될지라도 비난받을 부정행위에 대해 진실을 규명하자는 김문수 예비후보의 생각과 당내의 나쁜 일을 소문해서 뭐하겠느냐라며 여러 사람이 보고 있을 때는 일단 감추자는 박근혜 예비후보의 생각의 차이 말이다. 날을 세운 김문수 후보와 웃고 있는 박근혜 후보의 얼굴이 클로즈업된다.
 

저 두 경우의 차이는 일단은 내부적으로 보면 박근혜 예비후보의 생각이 맞을지도 모른다. 체면문화에 익숙한 우리로서는 수치스럽고 창피한 일을 동네방네 소문낼 필요가 무어 있느냐는 쪽이 정답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를 까발리는 김문수 후보를 염산테러하겠다며 주군이 명령 내려 주기를 기다린다는 박사모게시판의 내부결속주장의 글이 게시되기도 한다. 끔직한 발상이지만 그런 충성파가 있는 것이 현실이다(제발 그 글을 올린 자가 제 정신이 아닌 자이기를 바라고, 장난으로 올렸기를 바란다). 그런데 이 일이 내부적인 일이 아니라 외부적인 일, 다시 말해 사적 영역이 아닌 공적 영역인 경우에도 타당한가는 별개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공적 영역에서는 모든 일이 공개되어 구성원 모두에게 공유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근혜 예비후보의 발상에서는 아무리 내부적으로 부정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냥 내부적으로 쉬쉬 하고 덮어서 외부인(국민, 유권자)들이 모르게 해서 그들이 올바른 판단을 할 정보를 제공하지 말아야 한다는 음험함이 느껴지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언행에서는 이러한 방식을 취하는 것이 옳다라는 처리방식이 표출되는 경우를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러기에 모든 부정한 일들이 다 밝혀져 수사당국에서 밝혀져 너도 알고 나도 알고, 너와 내가 모르는 이도 알게 될 때쯤 가서야 한 마디 툭 던지는 경우가 많다. 즉 모범답안이 나온 후에 답안지를 작성하는 학생처럼 말이다.
 

하지만 모든 인간에게는 그런 속성이 기본적으로 내재되어 있다. 일단 잘못한 것이 있으면 이를 감추고 남이 모르도록 수습해버리려는 속성 말이다. 그러고 나서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시치미를 뚝 떼고 내숭을 부리는 것이 인간이다. 또 모든 일이 까발려지면 어디 인격이 존재한 인간을 찾을 수 없겠는가? 그러니 남들이 적당히 모르게 적당히 감추고 사는 게 미덕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이러한 응큼한 감춤이 반복되면 그 사람은 겉과 속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고 만다. 내부적으로는 끊임없이 부정과 부패가 발생하지만, 외부적으로는 전혀 그런 사실이 없는 것처럼 보여 아주 깨끗한 사람처럼 인정받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본인은 내부적으로 부정과 부패를 저지른 것에 대해 단죄했으므로 이제 끝났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는 계속 꿀단지를 들고 구멍이 새면 막고, 구멍이 새면 막고, 또 구멍이 새면 막겠다는 것일 뿐이다. 즉 꿀단지는 계속해서 자신만이 관리하겠다는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발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원래 꿀단지는 꽃의 것이었고, 벌의 것이었고, 국민의 것이었으니, 자기만이 꿀단지의 관리인이 되겠다는 발상은 비민주적 발상일 수밖에 없다. 잘못 관리하면 다른 관리자에게 넘기는 것이 민주주의국가의 대원칙이다. 그렇지만 더 무서운 것은 꿀단지를 향해 줄은 선 자들의 탐욕이다. 꿀단지를 빼앗기지 않으려는 자도 빼앗으려는 자도 그 한 사람으로 끝나면 간단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두 그 꿀단지를 향해 줄을 선 자들의 행렬이 문제인 것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에서 패거리문화가 극성을 부리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꿀단지를 뺏기면 나는 어디 가서 꿀맛을 볼 거야? 그러니 꿀단지 제발 뺏기지 마!”라고 하는 저 연극 속의 주인공들, 꿀단지를 향한 개미떼들이 문제인 것이다. 해결책은? 현재로서는 없다. 꿀단지가 깨지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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