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부러지지 않은 화살이, 지금, 그대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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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부러지지 않은 화살이, 지금, 그대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
  • 법률저널
  • 승인 2012.02.10 1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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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며칠 전 서초동 중앙지방법원에서 개최한 “2012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행사에 초대를 받아 참석했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아니 사법부가 국민의 소리를 직접 듣겠다며 소통의 장을 마련한 것은 아마 대한민국 사법부 역사상 최초의 시도였다고 하겠다. 봇물처럼 쏟아지는 국민의 아우성, 법원판결에 대한 피해자들의 원망을 지켜보며, 그동안 법원이 지은 죄가 참으로 컸구나 하는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었다. 법원, 판사라는 자리는 언제나 심판자의 자리이다. 그들의 말은 돌이킬 수 없는, 결코 번복될 수 없는 진리였고, 권위였던 시절이 있었다. 모든 이들은 그들의 선고에 맹목적으로 복종할 수밖에 없었고, 아무리 억울해도 수용할 수밖에 없는 국가시스템의 최고 자리에 있었던 것이 사법부, 바로 법원이었다.

그런데 그 법원을 향해 국민의 분노가 폭발하는 현장을 지켜보며, 왜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을까 하는 상념에 잠기지 않을 수 없다. 행사현장을 묵묵히 지켜보며, 이것은 법원의 자업자득이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 동안 국민 위에 군림하며 자신들의 판단과 결정이 유일한 정의였다는 오만함에 대한 국민적 저항의 부메랑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법원, 판사들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게 오늘의 대한민국이다.

법원, 판사라는 자리는 아무리 잘해도 늘 욕을 먹게 되어 있는 이상한 자리이다. 왜냐하면 재판사건마다 언제나 패자가 나오게 되어 있어, 그 패자가 법원, 담당판사를 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판사가 욕을 얻어먹지 않은 유일한 방법은 패자에게 감동을 주는 판결을 하는 경우일 텐데, 이 경우에도 아무리 감동을 주는 재판을 한들 패자는 결과에 집착하기 때문에 자신이 패소한 사건에 대해 판사를 결코 칭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기에 판사라는 자리는 잘해도 욕, 못해도 욕을 얻어먹는 자리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마치 절대자인 신이 언제나 인간으로부터 욕을 얻어먹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이다. 인간이란 게 묘해서 잘 돌아갈 때는 모두가 자기 덕이라 생각하고 신을 욕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아예 찾지도 않다가, 뭔가 잘못되고 꼬이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신을 찾고 자신에게 복을 주지 않거나 좋은 결과를 주지 않은 신을 향해 무작정 욕을 해대거나 원망을 늘어놓게 된다. 인간 중에서 신의 영역을 담당하는 자들로는 종교지도자들과 판사가 있다.

문제는 그들의 신적 권위가 인정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들의 행위가 정의로워야 하고 공정하여야 한다. 사법부가 정의롭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할까? 그들이 인격적으로 품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약자에 대한 연민과 동정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이게 없으면 그들은 신의 권위를 빙자한, 국가권력의 힘을 빙자한 폭력배일 뿐인 것이다. 그들은 겸손해야 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사법부의 앞날이, 인적 충원이 갈수록 염려스러워지는 것이 사실이다. 여태까지 사법부의 판사들은 죽어라고 공부만 하던, 정말이지 공부를 자신들이 속했던 학교에서 일, 이등을 하지 않으면 거의 합격하지 못할 정도의 고난도 국가시험 즉 사법시험을 통과한 자들만이, 그리고 그 중에서도 사법연수원에서 다시 상위 20% 안에는 들어야 간신히 임관될 수 있는 “머리 영리한 사람들의 독무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머리 영리한 것에 대한 자부심과 공부를 잘 해서 누려왔던 온갖 학창시절의 특혜(?)를 여전히 누리며 살고 있는 엘리트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여태 대한민국에서 배우자 선호도에서 최상위를 누려왔던 특권계층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이 들리기도 하였지만, 요즘 사법시험 합격자들을 보면 돈이 없으면 아예 공부하기 힘든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개천에서 용 나기가 아주 어려워졌다. 몇 년에 걸쳐 신림동 중심의 비싼 고시학원에 다녀야 하고, 아주 조직되고 체계화된 학원수업을 듣지 않고서는 시험경향을 알 수 없고 문제를 풀 수 없는 시스템으로 변질되어 버린 사법시험에서 판사가 될 자들에 대한 인성이나 품격에 대한 교육을 기대한다는 것은 공동묘지에서 산 자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현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책의 두께가 엄청 늘어나 공부의 절대량이 엄청나게 증가할 수밖에 없어 돈과 체력, 성실함과 영리한 두뇌 등이 함께 갖추어지지 않으면 아예 시험공부를 시작하기 조차 힘든 여건이 되어 있다.

이제 2017년이 되면 사법시험제도가 폐지되고, 현재 시행 중에 있는 로스쿨, 즉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생만이 사법부의 구성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법학전문대학원제도가 일반 서민 자녀들에게 사법시험보다 더 진입장벽이 높아졌다는 비극적 사실이 현실화되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거기에 엄청난 스펙을 쌓지 않으면 로스쿨에 입학조차 할 수 없고, 더 큰 문제는 어떠한 자격을 갖춘 자들이 로스쿨에 입학(?)하는지에 대한 기준이 객관화되어 있지 않아 도무지 그 속을 알 수 없다는 점이다. 객관적 실력을 객관적으로 검증하는 절차는 없고 오직 면접만으로 모든 것이 결정되는 로스쿨 입학제도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눠 본 많은 로스쿨 교수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이 면접을 하지만, 어떤 학생이 로스쿨에 최종 입학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준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스갯소리 같지만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소나타승용차 옆에 로스쿨생의 비엠더블유나 벤츠승용차가 나란히 주차되어 “쪽 팔린다”는 우스개 같은 자조적인 말을 하며 웃을 정도로, 로스쿨생 중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하거나 스펙을 잘 쌓을 수 있는 유리한 가정환경을 갖춘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또 로스쿨 진학 후 3년간 들여야 할 기회비용은 얼마인가? 객관적 진입이 마지막으로 보장되었던 사법부의 구성원조차 이제 빈익빈 부익부 현상이 심화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그들에게서 약자에 대한 동정심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재판은 경험으로부터 나온다. 물론 가장 중요한 것은 “실체적 진실”이다. 그것이 영화 “부러진 화살”이 많은 국민들로부터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원인이다. 김명호 전 성균관대 교수에 대한 민사소송 주심판사였던 이정렬 판사가 법을 위반해 가면서까지 밝힌 “합의과정”은 “복직 쪽 승소”였다. 그리하여 변론을 종결하고 위와 같이 주문(복직)을 합의한 후 판결문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3월 1일자 해임통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고(3월 1일은 삼일절이라 공휴일인데 그날에 해임통지가 있었다면 상급심에서 공휴일에 인사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파기될지도 모른다는 우려), 그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시 “변론재개”를 하였는데, 재판부의 석명에도 불구하고 원고(김명호 전 교수)가 이에 대해 명확한 증명을 하지 못해 두 번째 합의과정에서 “패소”판결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민사소송시스템을 잘 모르면 혼란에 빠질 수 있는데, 민사재판의 대원칙은 “변론주의”이다. 변론주의라 함은 승소하고자 하는 당사자는 자기에게 유리한 소송자료(주장과 증거)를 직접 제출해야 한다는 원칙을 말한다. 일반국민들은 법원이 친절하게 재판을 해주면 되지 당사자에게 모든 것을 맡겨두면 되느냐며 사법불친절을 원망할 수도 있지만, 만일 이와 반대로 법원(판사)이 어느 한쪽편을 들어 계속 친절하게(?) 재판을 하게 되면 상대방이 입게 될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에 법원은 “석명권”이라는 최소한도의 촉구를 통해 유리한 소송자료의 제출을 유도할 수 있을 뿐이다.

두 번째 합의과정은 이정렬판사가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잘 모르겠지만, 당초의 합의결론이 “원고승소”였고, 이의 자료보완을 위한 변론재개결정이었다면 재개된 변론과정에서는 당연히 석명권의 적절한 행사를 통해 부족부분만으로 제한하여 재판절차를 진행했어야 하는데, 이를 당사자인 원고에게만 맡겨 놓고 원고가 이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패소판결한 것은 민사재판부의 잘못이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게 법원의 오늘인 것이다. 복직을 희망하는 자의 절박한 심정, 재판절차를 잘 몰라 엉뚱하게 다른 고집을 피우는 국민에 대한 세심한 배려, 그리고 인사발령이라는 게 3월 1일자로 나지만 인사라는 것이 바로 인사일 그 날에 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 전에 나는 것이 상례인 점 등을 고려하면 원래의 합의대로, 그게 실체적 진실이니 판결이 내려졌어야 했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예로 지난 “8일자 대부분의 중앙일간지 신문 인사”란에 보면 이런 기사가 있다. “대법원은 지난 2월 7일에 오는 16일자로 전국 법원장 28명 중 17명을 포함해 61명의 고위법관인사를 단행”했다는 신문보도이다. 즉 2월 16일 인사를 2월 7일 먼저 단행하고 대법원에서 인사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법원이 이번 정기인사에서 사전에 통보한 것처럼, 성균관대학교도 김명호 전 교수에게 “3월 1일자로 해임”되었음을 “몇 달 전에 해임결정”을 하고, “3월 1일보다 며칠 전에 해임통보”를 했을 것은 우리 경험칙에 비추어 충분히 수긍 가는 일이다. 더군다나 김명호 교수는 ”징계에 의한 해임“이었기 때문에 대학교에서 징계절차를 밟는 데 몇 달 걸리는 것이 통상이고, 그렇다면 몇 달 전부터 진행된 해임결정을 3월 1일(이 날은 학교에서는 매번 신임 교수 임용일자이다, 따라서 3월 1일자로 형식상 발령을 내지만 실제로 계약이나 임용통지 등은 몇 달 전에 이루어지는 것이 관례이다)자로 낸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당초의 민사재판 합의를 변경한 것은 문제가 있는 판결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 대법원은 이정렬 판사에 대해 위 “합의과정을 사후발설”한 것에 대해 법원조직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징계절차를 밟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대법원 판결은 “합의과정을 모두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즉 대법원 판결문을 보면 판결이유에서 “다수의견, 다수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반대의견, 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이라고 하여 각자의 의견을 말한 뒤 그 의견을 말한 대법관의 이름을 기재하고 있다. 즉 어떤 대법관이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그 견해가 결국 합의과정에서 표출되는 찬, 반, 즉 승과 패의 합의과정이다)를 판결문에 발표하고 있는데, 하급심판사들은 이를 밝히지 말라고 하고 있어, 법원조직법 자체가 대법원과 하급심을 차별하고 있어 위헌성이 크다는 점이다. SNS문제로 사회적 이슈를 양산해 온 서기호 판사에 대한 판사재임용부적격심사 또한 여론의 도마에 올라 있다. 모든 것이 대법원의 편협된 시각에서 오는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렵게 살아보지 않은 자는 어려운 자의 심정을 모른다. 법원의 구성도 또한 어렵게 살아온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갈수록 어렵게 살아보지 않은 자들로 충원되는 사법부의 십년 후, 이십 년 후가 걱정일 뿐이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서민들의 말에 진심으로 귀 기울이는 판사들이 사법부에 많이 포진될 때 사회정의가 제대로 실현될 수 있고, 국가가 능동적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법원은 “2012년 국민과의 소통”이라는 저 행사장에서 절규하는, 사법피해자라며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는 국민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그들이 다 옳지는 않겠지만) 사건으로서가 아니라 사람으로서의 사건당사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을 갖기를 권한다. “지금 부러지지 않은 화살이 그대의 심장을 겨누고 있다.”는 사실을 유념하기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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