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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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에 대한 단상
  • 법률저널
  • 승인 2011.12.23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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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우리는 매일 타인의 죽음을 본다. 그 죽음의 끝에 우리 모두 각자의 죽음이 있다. 통계청 이 발표한 2010년 사망원인통계에 따르면, 이 땅에서 지난 한 해 총 255,403명이 죽었다. 하루 평균 700명 가량이 죽어 간 것이다. 우리 주변에서 매일매일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타인의 죽음, 저렇게 많은 수의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매일 죽고 있으니,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부분 무덤덤한다. 개인적으로도 올 한 해에도 참으로 많은 친지 분들과 그들 가족들의 죽음을 애도하며 조문을 다녀왔다. 조문을 하게 된 계기를 생각해 보면, 돌아가신 분과의 애틋한 친교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분의 가족들과의 인간관계 때문에 생면부지의 망인의 넋을 추모하기 위한 조문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어찌 보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조문객들도 그러했으리라 미루어 짐작해 본다. 평생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아니한 분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망자의 자제분과의 인간관계 때문에 함께 넋을 기리고 추모의 마음을 가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니 그 추모의 자리에 이별의 슬픔을 느끼기보다는, 산 자의 슬픔을 위로하고, 보내는 이의 아픔을 위로하기 위한 조문이었다는 것이 보다 더 적확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가만히 되돌아보면 그 죽은 이들 중에 내게 상처를 남긴 이도 더러 있고, 기쁨을 안겨 준 이도 더러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죽음 앞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고, 죽은 이와의 은원 역시 땅 속에 함께 묻히게 됨을 깨닫고 씁쓸한 마음으로 조문을 마칠 때도 간혹 있었다. 


북조선인민공화국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17일 사망사실이 지난 19일 보도되었다. 대한항공기폭파를 비롯하여 연평도폭격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은원을 남북에 남기고 통일협력의 상대방으로서, DMZ를 사이에 둔 적대자로서의 한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의 죽음을 보면서, 인간이라는 게 참으로 별 게 아니로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다. 살아 생전 그렇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하면서 모든 사람의 생사여탈권을 가진 것처럼 무한대의 권력을 행사했던 그였지만, 자신의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약한 존재에 불과했구나 하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다. 이런 생각이 들면 세상의 어떠한 강자들, 소위 돈이 많다거나 권력이 강하다거나 지위가 높다는 자들의 교만과 영원히 살 것처럼 군림하며 호령하는 어리석음이 측은해지고 불쌍해지는 것을 어찌 할 수 없다. 그러면서 나 역시 누군가에 의해 그렇게 불쌍한 존재로 보여 질 수도 있겠구나 하는 반성을 하면서 옷매무새를 다시 고치게 된다. 누군가의 죽음 앞에 설 때 신은 참으로 인간에게 공평하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강자와 약자 모두에게 공평하게 죽음을 예정하고 있는 신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내 나이 60을 향해가고 있으니, 앞으로 인간답게 살면 얼마나 제대로 살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 남은 내 인생 역시 길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러니, 가슴에 새겨야 할 것 하나 있으니, 바로 마음을 비우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기에 산 자는 죽은 자 앞에서 신을 만나야 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위해 해 주어야 할 유일한 덕은 죽은 자를 용서하는 것이다. 이제 죽은 자는 더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자이기에, 스스로 용서를 빌 수 없는 자가 되었기에 그 죽은 이를 용서할 것인지는 산 자의 몫이라 하겠다. 산 자가 죽은 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죽은 자는 용서받을 길이 없다. 그리고 용서하지 아니한 자 역시 언젠가는 죽을 것이고, 그 죽는 순간 그 자 역시 남을 용서하지 못한 채, 그 누군가 용서하지 않겠다는 산 자로부터의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죽어갈 것이다. 죽은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산 자도 용서하지 못한다. 모든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죽음으로 가르쳐 주고 떠난 자를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어느 누구로부터도 용서를 배울 마음이 없는 자이기 때문이다. 아예 산 자의 마음속에 “용서”라는 “마음밭”이 아예 존재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니 용서의 싹을 키울 수 없고, 어떤 경우에도 용서하지 않으며 마음의 문을 굳게 걸어 잠가 버린다.


산 자들로 이루어진, 굴러가고 있는 이 세상은 이렇게 용서의 마음밭을 일구지 못하는 자들로 인해 언제나 전쟁 중이다. 어제 일을, 한 달 전 일을, 일 년 전 일을, 10년 전 일을, 자기 살아생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100년 전 일을 용서하지 않고 미움의 탑을 쌓고 있으니, 세월이 흐를수록 미움의 탑은 견고해지고 단단해진다. 성경 속, 예수의 가르침의 절정은 십자가 위에 못 박힌 절체절명의 그 순간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용서의 마음이 아닐까 싶다. 누가복음 23장 34절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승리의 절창이다.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자들을 위해 하나님께 그들의 어리석음과 만행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는 저 마음이야말로, 기독교라는 종교적 가르침 이전에 인간 최고의 지성이기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다. 죽는 순간 자신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용서하지 않으면 영원히 용서할 기회를 상실할 것이기에, 자신의 마음속 깊은 곳에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원망을 가지고 죽음의 세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기에, 예수는 자신이 먼저 구원받기 위해 죽어가는 그 마지막 순간 자기를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들을 먼저 용서하고자 했을 것이다. 지혜로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땅의 산 자들은 여전히 완강하다. 죽은 자에 대한 조문을 놓고, 이 나라는 또 남남갈등을 겪고 있다. 화해를 청할 수 있는 자는 산 자뿐인데, 그 산 자들은 산 자가 죽은 자에게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적선을 거부하고 있다. 죽은 자를 계속 미워하는 한 산 자 역시 죽은 자와 다를 바 없다. 살아서 죽은 자의 길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살아 있으면서 죽은 자를 계속 미워한다는 것, 죽은 자는 죽음 속에서 평안한데, 산 자는 삶 속에서 불행하다. 이명박 정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죽음에 조문단을 보내지 않기로 했다. 정부차원의 조문도 공식적으로 하지 않기로 했다. 청와대에서 청와대직원들이 고깔모자를 쓰고 벌인 이명박 대통령의 생일축하파티 기쁨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사망발표가 기분 나빠서는 결코 아니겠지만, 정부 차원의 조문을 하지 않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류우익 통일부장관은 “정부는 김 위원장의 사망과 관련해 북한 주민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한다.”면서, “북한이 조속히 안정을 되찾아 남북이 한반도 평화와 번영을 위해 협력할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이를 놓고 김 위원장의 사망에 대한 완곡한 수준의 조의표명으로 풀이된다고 언론들은 해석하고 있다. 김영삼 정부 때 김일성 주석의 급작스런 사망 앞에서, 며칠 후 잡혀 있던  김일성 주석과의 남북정상회담개최키로 한 우호적 태도를 싹 바꾸어 조문은커녕 원색적 비난을 퍼붓고 나서 그것이 엄청난 실수였음을 반면교사로 삼은 것으로 보인다. 그때에 비하면 진일보한 것이라는 평가가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명색이 시인인 나로서는 본능적으로 저 조의문을 찬찬히 뜯어보게 되면서 자꾸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북한 주민들을 위로하는 것일까? 지금 이명박 정부의 통일부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북한 주민을 괴롭히고 굶주리게 한 실패한 독재자라고 비난하여 왔다. 그래서 그는 망해야 할 독재자였고, 하루라도 빨리 죽어 북한이 붕괴되어야 한다고 강변하였다. 그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대북압박정책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며 남북불통정책을 공고히 추진해 왔던 이명박정부였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은 북한 주민들에 대한 독재자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니 북한주민들이 기뻐할 일인데 그렇다면 축전을 보내야 맞는 게 아닌가? 북한 주민들은 위대한 지도자를 잃고 슬픔에 잠겨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재자의 죽음을 기뻐하며 환호하고 있을 것이니, 그러한 그들에게 “위로의 뜻”을 전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위로를 보내니 얼마나 자가당착적 아이러니인가? 결국 다 말장난일 뿐이다, 나의 지금 이 말도 말장난이다. 그런데 정부의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장에 류우익 통일부장관은 조문객이 통상 입는 검은색 정장이 아니라 노란색 작업복을 입고 나타났다. 도무지 이러한 예의 없는 복장은 국가를 대표하는 자로서의 품위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것으로밖에 없지 않겠는가? 망자에 대한 조의를 표명함에 있어 제일 중요한 것은 진심이지만, 복장이나 태도 또한 중요한 일이다. 마지막 가는 자에게 예의를 갖추지 않으면, 이것이야말로 마지막 치욕을 안겨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정일의 시대는 그의 죽음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의 죽음은 어찌 보면 6ㆍ25전쟁을 일으킨 세대의 역사적 퇴장을 상징하는 사건이다. 그는 그의 통치기간 동안 우리 남쪽을 참으로 많이 괴롭혔고, 답답하게 했고, 피를 말리게 했다. 그 점에서 그가 미움을 받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몫이다. 그렇지만 그 역시 자신이 통치하는 북한의 정권과 인민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을 것이다. 우리의 평가와 그들 내부의 평가가 결코 같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정부가 보다 전향적 자세를 취하면,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남북관계개선의 절호의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인데, 우리 정부는 스스로 철책을 치고 한계를 그어 버렸다. 박근혜 한나라당비상대책위원장 역시 원혜영 민주통합당대표의 국회조문단파견제의를 한 마디로 “그건 다음에......”라고 거절해 버렸다. 그렇다면 박근혜 위원장은 몇 해 전 북한을 왜 방문했으며, 김정일 위원장을 왜 만났을까? 왜 그와 사진을 찍었고, 중국 인터넷 사이트에 김정일 위원장의 네 번째 부인으로 추측된다는 사진게재가 이루어지는 황당한 빌미를 제공했을까?


산 자만이 죽은 자를 용서할 수 있다. 그 용서가 한반도평화를 향한 진정한 첫걸음이 될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자에게 평안이란, 기쁨과 안식이란 없다. 전방부대의 성탄트리에 불을 켜지 않기로 했다, 북한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의도로. 성탄절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지금 십자가 위의 예수가 보인다. 그 마지막 한 마디가 보인다, 저들을 용서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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