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생의 행정고시 법무행정 합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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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생의 행정고시 법무행정 합격기
  • 법률저널
  • 승인 2011.12.1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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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비된 자에게 기회는 반드시 온다

유지만 충남대 로스쿨 2년 / 연세대 사회학과 졸

1. 들어가며

삶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일이 일어나곤 한다. 그래서 삶은 즐겁고 흥분되는 것 같다. 난 얼마 전 그런 믿기 어려운 흥분되는 일을 경험했다. 바로 제55회 행정고등고시(5급 공채)에 합격한 것이다. 최종합격 문자가 핸드폰을 “윙~”하고 울렸을 때, 그리고 스쳐지나가는 눈길에 “최종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글귀를 봤을 때, 어둠속에서 지나가던 사람들, 냄새, 온도 모두모두 또렷이 기억한다. 그 순간만큼은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대학 입시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성취감을 느꼈다. 행정고시를 위해 정진했던 시간들과 제대 후 고시를 시작하던 20대 중반의 나의 모습이 떠올라 벅차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사실 합격수기를 쓰고 있는 지금도 잘 믿어지지 않는다. 더욱이 한번 포기했던 길이기에 그 여운이 오래가는 것 같기도 하다.


합격수기는 통상, 시험을 준비하는 누군가를 위한 것이 되어야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합격이라는 것을 먼저 성취한 자로서 이들에게 어떻게 공부를 했으며, 어떻게 생활했는지를 전달하는 것이 목표이리라. 하지만 내 글은 그렇지 못할 것 같아 아쉽다. 나의 합격은 정상적인 길을 밟지 못했다. 그래서 과연 누구에게 도움이 될까 의문스럽기도 하다. 그럼에도 이번 합격수기를 쓰겠다고 말한 이유는 단순하다.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누군가에게 기다리라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이 행정고시생이든 아니면 나의 특수한 지위(로스쿨생) 때문에 이글을 읽을 로스쿨러이든 말이다. 내가 전달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이다.    

2. 꿈을 꾸게 해준 곳-연세대학교 사회학과; 2001년~2010년

어린 시절부터 큰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런데 정작 큰사람이 어떤 사람일까라는 의문을 갖게 된 것은 어른이 되었다고 생각한 대학 입학이후였다. 큰사람이 되려고 명문대학에 가려고 했고 그렇게 20년을 노력해서 들어간 학교였다. 하지만 무언가를 이뤘다고 생각했을 때, 지금 한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깨달음만큼 허무한 일이 있을까? 나의 2001년은 그랬다. 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이때 사회학은 나에게 휴머니즘을 가르쳐주었다. 인간을 인간답게 살게 해주는 사회, 그들을 위해 봉사하는 자. 큰 사람은 그러한 사람일 것이다. 여건이 되지 않아 배우지 못하는 자들을 대신해서 내가 가진 지식과 역량으로 그들을 위해 봉사하라.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제도에 편입되지 못한 소수자들, 어두운 곳에서 관심 받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는 삶. 그렇게 살고 싶었다.


이런 이상적인 생각들이 영글어갈 무렵 현실에서 행정고시를 만났다. 사실은 경제학을 만났다고 하는 것이 맞다. 군에 입대하면서 남는 시간이 나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우연히 서점에서 고른 책. “정운찬 著 거시경제학” 당시 이 책을 왜 골랐는지도 잘 모르겠고 무슨 생각으로 골랐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무슨 말인지도 모른 채 하나하나 읽어가면서 갖게 되었던 그 느낌들이 너무 좋았다. 이 학문을 익히면 나의 역량을 발휘해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경제학과 사회학은 어울리기 힘든 학문이다. 그 속에서 자란 내가 신기할 때가 있다. 일종의 변증법적 고양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어쨌든 단순하게 생각하면 이런 합리화들 속에 행정고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경제학을 익혀서 사용할 수 있는 직업은 경제관료 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당연히 재경직에 도전하였다.           

3. 도전과 좌절; 2005년 10월~2009년 2월

(1) 군 생활과 수험생활

군대에서 갖게 된 목표였으므로 제대 전에 1차를 합격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병을 달고 공부를 시작할 수 있을 때부터 거시경제학 책을 놓고, 1차 수험서들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는 PSAT가 도입된 초창기였으므로 모두 혼란스러워 하고 있었다. 딱히 공부할만한 서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기출문제의 풀이 지금처럼 다양하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부예제를 풀어보고 아! 나는 PSAT형 인간이구나, 아니구나를 느낄 수 있는 정도였다. 한편 05년 1차를 목표로 준비하던 나는 당시 헌법 객관식시험이 있었으므로 헌법을 같이 준비하였다. 헌법은 06년부터 1차 시험과목에서 사라지게 되어있었다. 사실 준비가 부족하므로 06년을 바라보며 헌법은 하지 말고 PSAT만 죽도록 파야하지 않나 생각할 수 있었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연히 1차에 합격할 것이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05년 2월에 친 행정고시 1차시험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 충격적이었던 것은 헌법점수가 제일 높았다는 것이다. 지금 돌이켜 보면 이때 일찌감치 내가 PSAT에 소질이 없음을 깨달았어야 했다. 

(2) 제대 후 고시실 입실

제대 후 다시 한 번 1차에 도전하였으나 역시나 불합격하였다. 공부양이나 경험의 문제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하기 위해 연세대학교 화백실 입실시험을 쳤다. 다행히 약간의 PSAT 경험이 있었기에 합격이 가능했다. 06년 3월부터 화백실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고시실의 장점은 역시 경험 많은 선배들의 조언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선배들은 PSAT의 경우 1차 두 달여 전의 연습으로 충분하니 무엇보다 양이 많은 2차 과목을 집중적으로 공부하라고 조언해주었다. 하여 나는 당시 행정법과 경제학3형제(미시·거시경제학, 재정학, 국제경제학)를 잡는다는 목표로 정말 혼신을 다해 공부했다. 행정법의 경우 성봉근 강사의 1순환 강의를 따라가려고 애를 썼고 경제학의 경우 김진욱 강사의 특강을 들으며 기본서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렇게 1년이 흘러 어느덧 07년 1차시험의 시즌이 다가왔다. 이번에는 합격할 것이라는 강한 자신감이 있었기에 어느 때보다도 여유있게 시험에 응시했다. 하지만 역시나 결과가 좋지 못했다. 이때부터 PSAT에 대한 두려움을 갖기 시작했다.

(3) 공포의 PSAT

도대체 문제가 무엇일까? 07년 불합격 이후 이에 대한 집중적인 고민을 하였다. 나의 점수분포를 보면 언어논리와 상황판단의 점수가 낮고 자료해석의 점수가 높았다. 읽는 능력이나 추리 능력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07년 3월부터 속독훈련과 논리력 향상을 위한 서적들을 읽어대기 시작했다. 지난 준비기간 동안과는 다르게 2차만을 공부하지 않고 1차와 2차를 병행하였다. 나름 읽는 능력과 논리력이 풍부해졌다고 생각했고 이제는 합격할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 이에 노력에 박차를 가하여 행정법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행정학과 경제학을 꾸준히 하며 “2차만 가면 붙는다.”는 자신감을 갖기도 했다. 그리고 운명의 08년 2월 시험이 다가왔다. 아직도 이날 어머니가 싸주신 도시락이 기억난다. 혹시나 아들 시험치다가 중간에 화장실 가면 어쩌나 고춧가루 안 들어간 반찬으로만 해주셨다. 맑은 된장국에 계란말이. 이날은 왠지 점심시간이 길게 느껴졌다. 시험을 마치고 나올 때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행시사랑의 컷 분위기상 합격선 근처에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합격자 발표. 한 문제차로 불합격하였다. 정말 모든 걸 잃은 기분이었다. 그만하고 싶었다. 지나간 3년여의 시간이 공허하게 느껴졌다.  

(4) 그만...놓다.

시험을 그만두려다가 2차 공부 해놓은 것이 너무나 아까웠다. 그래서 PSAT 점수가 재경직 보다 낮은 일반행적 직렬로 시험을 쳐보기로 했다. 이때부터는 이상이고 나발이고 합격만 하고 싶었다. 기다려주신 어머니와 아버지 얼굴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났다. 더 이상 내 욕심만 내기가 무서웠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번만 더 보고 싶었다. 어머니, 아버지께 1차합격하는 모습이라도 보여드리고 싶었다. 그리고 09년의 시험날이 밝았다. 1교시가 시작되었는데 언어가 너무 쉬웠다. 불안했다. 언어에 약한 나로서는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역시나 채점결과는 참담했다. 다른 아이들의 언어점수가 15점씩 올라가는데 난 제자리다. 결과는 불합격. 난 침대속으로 들어갔다. 도저히 부모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눈물이 자꾸만 나와서 창피했다. 다음날 아버지께 그만해야겠다며 신림동의 집을 빼자고 제안했다. 아버지는 다른 말이 없이 그렇게 하자고 하셨고, 이렇게 고통스러웠던 나의 행정고시 도전기는 여기서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4. 새로운 시작-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입학; 2010년 3월 ~

(1) 새로운 길을 보다

시험이 끝나고 신림동의 집을 빼기 얼마전인 09년의 2월말이었다. 친한 친구와 만나게 되었다. 이 친구는 10여년을 내 옆에 있던 녀석으로 눈빛만 봐도 아는 그런 친구이다. 이 녀석이 갑자기 나에게 로스쿨을 추천했다. 당시 1기 입학 전형이 끝났을 무렵이다. 녀석의 지인이 로스쿨에 입학하는 바람에 자기가 입학 전형을 잘 알게 되었단다. 그때 녀석의 한마디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만아... 넌 취직하고 못살아. 내가 알아.” 당시 녀석의 말에 왜 놀라고 감동받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확실히 사실이었다. 내가 꿈꿔오던 것에 등을 돌리고 살고 싶지 않았다. 녀석의 요는 이것이었다. “니가 원하는 것 말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너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직역. 그런 것에 변호사라는 것도 있다. 그런데 이번에 로스쿨이라는 제도가 생겨 너가 가면 참 좋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행시를 그만 두고 있는 상황이었으므로 취직 등 다양한 진로를 고민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석의 그 한마디에 모든 게 달라졌다.   

(2) 로스쿨 입학

어느 덧 1년여 남은 학업을 마치기 위해 다시 모교로 돌아왔다. 그리고 로스쿨 진학을 위해 LEET와 영어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PSAT의 경험상 LEET가 낯설지 않았다. 하지만 역시나 LEET점수도 좋지는 않았다. 토익을 준비해야했기에 각종 모의고사와 인터넷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토익을 935점까지 끌어올렸다. 학점은 워낙 좋지 못했기에 대책이 서지 않았지만 최선을 다한다는 생각으로 임했다. 그 결과 4학년 전부를 A로 채울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09년 8월 LEET시험을 보고 11월 면접을 통해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다. 소위 말하는 지방거점국립대학이라 서울을 떠난다는 두려움이 있었지만 가서 열정을 다한다면 좋은 기회가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확신 속에 대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3) 공포의 민법 집중강의

그렇게 나의 로스쿨 1학년 생활이 시작되었다. 법과목이라고는 행정법을 해본 것이 전부라 많은 메리트가 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다만 2차 답안지를 써보고 법학과목 시험 준비를 했다는 것이 다른 과목들을 공부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주로 도움이 되었던 과목은 민사법 과목들이다. 형법은 지금까지 해왔던 공부와는 너무나도 달라서 혼란스럽고 어려웠다. 하지만 민사법의 경우 행정법이 민사법의 응용학문이여서 그런지 법리 등이 친숙했고 익히기에 편했다. 


내가 이런 무기들을 지니고 있음에도 로스쿨의 학사일정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무시무시 했다. 2학년 2학기부터는 실무수업을 들어야 하는 만큼 2학년 1학기까지는 7법을 완성해야한다. 그것이 가능할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행정법 하나를 안다 싶을 정도로 공부한 기간이 2년이었다. 어쨌든 제도가 그렇게 되어있으니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이러한 제도적 특징을 반영하는 수업이 민법 집중강의였다. 민법의 방대한 양을 감안하여 1년 동안 거의 격일 꼴로 세 시간씩 민법수업을 진행한다. 충남대학교 법전원 같은 경우 1학기에 민법총칙 -계약법1-계약법2를, 2학기에 물권법-법정채권법의 순서로 진행한다. 따라서 3~4주마다 한 번씩 시험을 치르게 되고 공부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이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갖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해왔고 지금도 1학년들은 그렇게 하고 있다.    
 
(4) 치열한 경쟁의 효과

위와 같은 일들이 가능한 것은 로스쿨 내에서의 치열한 경쟁 때문이다. 로스쿨 제도가 시행 초기인 만큼 학교의 학점이 중요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다. 따라서 한 번 삐끗하면 다시 순위를 올리기가 만만치 않다. 결국 로스쿨 학생들은 모든 시험을 살벌하게 준비한다. 나 같은 경우도 민법집중강의 기간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가 옆에서 같이 달려준 경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민법총칙 시험 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밤을 새서 공부했다. 한 달여의 짧은 준비기간, 그리고 사법시험 유경험자들의 존재는 공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게 1년여의 시간을 보냈고 학교에서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나름 법학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자신감도 갖게 되었다. 한편 고시생활을 이렇게 했다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보면 신림동에서 ‘고시생’이라는 지위로 유세하듯 지냈던 기간보다도 더 열심히 생활했던 것 같다. 1년을 지내며 민법과 상법의 회사법, 상법총칙, 민사소송법1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때 정리해 두었던 자료들이 2차 시험을 준비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  

5. 행정고시 재도전

(1) 법무행정직렬을 선택한 이유

시간은 어느덧 1학년의 마지막을 장식할 기말고사 기간이었다. 그때 누군가 1기중에 행정고시 2차 합격자가 있다는 말을 해주었다. 그가 법무행정 직렬로 시험을 보았다고 했다. 궁금한 마음에 생소한 직렬인 법무행정의 과목을 보았다. 민법, 민사소송법, 상법, 행정법, 행정학이었다. 처음에 든 생각이 “어! 이거 2차치면 나중에 변호사시험에 도움이 되겠다”는 것이었다.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사무관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도 나중에 변호사시험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더욱 컸다. 그만큼 합격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2) 감격스러운 1차 합격

이번 1차 합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번 시험은 법전원 근처에 있는 대전 노은중학교에서 치렀다. 가족의 응원도 어머니의 도시락도 없었다. 아침식사는 평소 1차 시험 때 먹던 두부미소국이 아니라 초코파이와 제티였다. 점심은 중국집에 가서 볶음밥에 짬뽕국물을 후루룩 마셨다. 식사 후에는 낮잠도 잤다. 그야말로 긴장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시험을 쳤다. 시간을 제기 위한 장비도 없었다. 하지만 2교시가 끝날 무렵 합격을 확신했다. 평소와는 다른 편한 마음가짐이 PSAT의 높은 점수를 불러왔다고 평가한다. 심지어 언어논리의 경우 80점이 넘었다. 결국 지난날 나의 실패의 원인이 과도한 불안감과 시험 스트레스라고 생각하니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1차 때문에 마음 고생하시는 분들은 편한 마음을 가져보시기를 권장한다.


시간은 흘러 2010년 4월이 되었고 예상했던 대로 1차에 합격하였다는 문자를 받았다. 분명히 예상했던 일인데도 너무나 기뻤다. 이때까지도 2차 시험에 대한 합격기대 보다는 변호사시험을 위해 민사법을 정리할 정말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한참 로스쿨 2학년 1학기를 보내고 있던 때라 형사소송법과 어음수표법, 행정법 각론, 민사소송법 사례연습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다. 전략을 짜야했다. 특히 민법의 경우 많은 양 때문에 정리가 필요했다. 결국 저녁시간에는 그날 배운 것을 복습하고 저녁11시 이후부터 새벽2~3시까지는 민법 공부를 하는 생활을 시작했다. 민법은 집중강의 때 교수님께서 교재로 사용하시던 정리자료를 기준으로 박승수 변호사님의 사법시험 2차 케이스집을 풀었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박승수 변호사님의 동영상 강의를 신청하여 수강했다. 이렇게 집중강의 자료에 케이스집을 정리하는데 2달의 시간이 걸렸다. 민사소송법의 경우 학교에서 사례연습 수업을 듣고 있었기 때문에 걱정이 없었다. 상법이 문제였다. 워낙 양이 많고 이제 막 어음수표법을 공부하기 시작해서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 역시 법전원 수업에서 사용했던 교수님의 자료와 법전의 조문을 바탕으로 황의영 사례집을 풀고 정리했다. 행정법은 자신이 있었기에 별도의 준비는 하지 않았다. 행정학의 경우 공부를 그만 둔지 2년여가 지났기 때문에 감을 살리기 위해서 최근 2순환 동영상 강의를 신청하여 토요일, 일요일만 수강하였다. 이런 바쁜 나날을 보내니 어느덧 기말고사 기간이 되어 진행하던 공부를 모두 멈춰야만 했다.   


(3) 죽음의 3주

기말고사가 끝나고 남은시간은 3주였다. 짐을 싸고 2차 시험을 치루는 고려대학교 옆에 하숙을 얻었다. 그리고 정말 고통스러운 3주의 시간을 보냈다. 눈을 뜨면 사법시험 최신 모의고사 문제를 논점만 잡는 식으로 풀고, 오전과 오후에는 정리해 놓은 것들을 반복해서 돌리며 회독 수를 올렸다. 저녁식사 후에는 졸음이 몰려와 이를 방지하고자 다시 모의고사를 풀며 나를 자극했다. 저녁시간에는 답안지에 정리했던 것들을 생각하며 써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다시 회독수를 위해 정리자료를 보았다. 어느덧 방에는 마신 커피 종이컵과 박카스 병이 수북이 쌓였고 식사는 하숙집 아주머니가 주시는 아침, 저녁 외에는 전부 시켜먹었다. 이런 생활이 3주차에 접어드니 몸 여기저기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기말고사가 끝난 직후였고, 수면부족과 운동부족이 겹쳐져 몸이 2주를 버티지 못했다. 이러면 시험기간에 힘들 것 같아서 부모님께서 보내주신 홍삼을 열심히 먹고 식사 후에는 고려대학교 근처를 산책했다.
     
(4) 2차 시험장에 들어가다

드디어 시험 보는 날이 왔다. 고려대학교에 들어서자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그렇게 열망하던 행정고시 2차 시험장을 이렇게나 돌아오다니... 서러운 생각에 눈물이 났다. 시험을 준비하던 20대 중반의 나는 서른살이 되어있었다. 서러운 감정도 잠시 시험에 집중해야만했다. 첫날은 행정법이었다. 사실 행정법이 가장 자신 있었다. 자신감의 이유는 오랜 시간 준비했다는 것과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훌륭한 스승님을 만난 사실 때문이다.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행정법 전임 김재호 교수님을 만났다. 교수님의 수업을 1년 동안 수강했는데 내가 얼마나 행정법을 주먹구구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총론과 각론의 수업시간에 교수님께서 일러주신 논리의 흐름을 따라 답안 작성하는 연습을 하였고 매끄럽게 하나의 체계를 다시 정립할 수 있었다. 시험장에서도 역시 그런 습관대로 답안을 작성했고 자신이 있었다. 첫날을 잘 치루고 나니 자신감이 생겼다. 문제는 민사법이 시작되는 둘째 날부터였다. 시험전날 정리해 놓은 것들을 다시 일독하며 전의를 불태웠다. 수험가의 전설인 시험전날 정리해 놓은 것을 1회독하면 합격한다는 말에 따라 정리해 놓은 것들을 모조리 일독 하였다. 민사법의 3일이 지나고 어느덧 마지막 날인 행정학 시험이 다가왔다. 답안을 모두 작성하고 나오는데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준비했던 기간에 비해 시험을 잘 치룬 것 같았다.


그렇게 치열한 6월을 보내고 7월에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실무수습을 나갔다. 힘든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었다. 그럼에도 중앙지법에서 준비한 프로그램들을 이수하고 나니 법조인으로서 한 발짝 더 나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고 행정고시에 대한 생각은 점차 잊혀 지기 시작했다. 실무수습을 마치고 로스쿨로 돌아왔다. 2학기는 형사실무강의들을 들어야 했기에 바빴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10월이 되어 합격자 발표의 시간이 되었다. 사실 처음보다는 기대가 커져있었다. 합격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니 두근거렸다. 그리고 받은 문자 “귀하의 5급 공채 2차 시험의 합격을 축하합니다.” 믿을 수가 없었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아버지에게 전화해 소리를 질렀다.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셨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2명의 탈락자가 예정되어 있는 면접시험을 준비해야 했다.    

(5) 3차 시험 준비

2차에 합격하고 나니 기뻤고 축하도 상당히 많이 받았다. 그런데 오히려 이런 것들이 3차시험에 큰 부담감으로 다가왔다. 법무행정직렬은 소수직렬이다 보니 합격자들이 같이 모여 면접스터디를 진행한다. 기분이 이상했다. 이중에 누군가는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서글픈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도 잠시 같이 준비하는 동안 많이 가까워지고 친해졌다. 스터디는 집단토론을 위한 발제와 연습, 그리고 개별면접을 위한 프레젠테이션 준비를 병행했다. 확실히 꾸준히 연습을 하니 말하는 것, 표정들이 고쳐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실제 시험이 치러졌던 날도 매일 보던 사람들과 함께하고 서로 응원해 주었기에 힘이 났다. 준비했던 것들을 보여줬다고 생각했기에 딱히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대망의 최종합격자 발표날이 왔다. 당시 법전원 기숙사에 있었는데 오후5시가 다가오자 두려운 마음에 방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옷을 입고 정처없이 걸으며 문자를 기다렸다. 문자가 왔다. 합격이였다.   
 
6. 나가며

(1) 준비된 자에게 반드시 기회는 온다

지금 어디에선가 노력의 대가에 대해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면 기다리라고 말해주고 싶다. 원래 격언이라는 것이 항상 남의 일인 것 같이 느껴진다. 사실 이번 행정고시 합격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나부터도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니 노력의 대가는 어떤 식으로든 돌아온다.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습했던 07년~09년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번 1차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고, 행정법의 기반을 잡아났기에 그나마 수월하게 민사법을 정리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할 생각이다. 그 대가는 반드시 돌아온다. 시험에 좌절하고 입시에 실패한 사람이 있다면 용기를 잃지 말고 앞을 보자고 말하고 싶다.  

(2)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사랑의 하나님과 구원의 예수님. 이른 아침에 눈을 뜨면 아들기도로 하루를 시작하시는 아버지, 당신의 삶을 아들을 위해 헌신하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신 어머니. 너무나도 사랑하고 감사를 드립니다. 아들의 길은 이제 시작입니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든 최선을 다 할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응원해주세요. 언제나 내 뒤에서 나를 응원하고 희생해준 사랑하는 누나, 옆에서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매형. 누구보다도 내 마음을 잘 보듬어주고 시험의 전 과정에서 믿음을 보여주며 응원해준 나의 민문.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님(선생님의 가르침 잊지 않겠습니다.),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에서 행정법을 가르쳐주신 김재호 교수님, 민사법학회의 기둥 손종학 교수님, 민법의 체계를 세워주신 위계찬 교수님, 항상 밝은 표정으로 가르침을 주신 서보국 교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인생의 메이트가 되어주기에 주저하지 않은 무황이, 지금은 어디선가 날 증오할지도 모를(?) 고마운 나리, 사랑하는 밴드더베리모멘트(band the very moment) 가족들(얼짱기타 정현 회계사, 미래의 교수님 연순, 천재(?)음악소년 쩌리, 순둥순둥 베이시스트 선명이, 이쁜이 나래), 인기녀 희원이, 보고 싶은 영아, 힘든 순간을 함께 보낸 대찬이형, 장호형, 08년을 함께 보낸 형제들 규태, 경회 너(다음엔 너 차례야 확신한다), 재헌이, 함께하면 언제나 즐거운 동생 승헌이, 천재미술작가 서보람이, 보고 싶고 궁금한 02학번 동생들(민우, 경은, 용준, 주호),

연세대학교 사고칠반 형제들(진성, 대식, 정도), 화백실에서의 연을 이어온 이현주 예비사무관, 인생의 순간마다 만나는 고등학교 동창 한수덕 예비사무관과 이 기쁨을 함께하고 싶다. 또한 힘든 순간마다 용기를 주고 응원해 준 용현이형, 버팀목이 되어준 카운셀러 승희형, 언제나 의지하게 만드는 친구 같은 종민이형, 함께하면 즐거운 큐티가이 재현이형, 형 같은 민회(안다니까 니맘), 사실은 따뜻한 봉준이, 해맑은 철환이(축하해 득녀^^), 룸메 도윤이, 친구가 되어준 준희, 정말로 웃긴 앵귀, 이외에도 인생을 함께한 헤브론교회 가족들과 충남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민사법학회 식구들, 인빅터스 형제들, 제3대학생회에도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평생을 함께할 55회 동지들(박태진, 손지홍, 하륜, 박원재, 박정철, 김준희 예비사무관)에게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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