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간접살인과 인절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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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간접살인과 인절미
  • 법률저널
  • 승인 2011.07.01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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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지난 한 주간 나를 괴롭힌 것은 “간접살인”이라는 상징어였다. 직접살인은 정범이든, 교사범이든, 종범이든 모두 처벌받는다. 살인행위의 직접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접살인의 경우는 “죽음”은 존재하는데, 직접적인 가해자가 없기 때문에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다. 그렇지만 엄연하게 죽음은 존재하니, 죽임을 당한 자는 신원(伸寃)을 품고 그 영혼이 구천을 떠돌 수밖에 없다. 왠지 모르게, 지난 한 주간 내내 이 나라에는 간접살인을 당해 구천을 떠도는 영혼들이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내 힘이 들었다.


지난 24일, 서울행정법원은 “고인들이 유해화학물질에 장기간 노출됐고 이런 요소가 인체에 축척돼 백혈병이 발병한 것으로 판단된다.”며 삼성전자반도체에서 근무하던 젊은 노동자들이 입사 후 몇 년만에 백혈병에 걸려 죽은 사안에서 피해노동자들에 대한 산업재해를 일부 인정하였다. 이번 판결은 국내 반도체 근로자의 질병과 업무상 인과관계를 처음 인정한 것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하겠다. 모든 산재사건에 적용되는 일반적 의미에 불과하지만, 재판부는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업무상 재해는 반드시 의학적으로 명백히 입증돼야 하는 것은 아니라며, 근로자의 건강상태, 작업장 내 발병원인물질 존재 유무 등을 고려해 업무와 질병 및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가 있다고 추단될 경우에도 입증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즉 인과관계에 대한 직접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추단적 증명책임”에 근거하여 삼성전자반도체공장에 대해 “직원들의 백혈병 사망을 산재사고”로 인정한 것이다. 물론 피고는 “삼성전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이다. 그 까닭은 삼성전자반도체공장에서 근로자들이 근무하다가 사망하더라도 산재인정여부는 근로복지공단의 소관업무로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보험금지급여부를 결정하기 때문에 형식적으로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처분 취소청구소송”을 제기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삼성전자는 “피고가 삼성전자가 아닌 근로복지공단”일 뿐이라며, 마치 자신들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닌 것처럼, 다시 말해 “의뭉하기가 노전 대사” 같은 구태의연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눈 감고 “아웅” 한 것이다. 우리 말 속담에 의뭉하기가 노전 대사라는 말이 있는데, 그 뜻인즉슨 “겉으로는 아주 어리석은 듯이 행동하면서도 속은 실속 있게 깐깐하거나 알면서도 모르는 체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면서 삼성전자는 사족적으로 “판결이 반도체 사업장의 근무환경과 관련해 공인된 국가기관의 두 차례 역학조사 결과와 다른 내용이다. 권위 있는 해외 제3의 연구기관이 실시 중인 반도체 근무환경 재조사 결과가 나오는 대로 공개할 예정”이라며 “판결이 확정된 것이 아닌 만큼 앞으로 계속될 재판을 통해 객관적 진실이 규명돼 의구심이 해소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 말인즉슨 맞다. 아직 1심판결에 불과하기 때문에 항소심 이후의 재판에서 번복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1심판결이 안고 있는 “인과관계의 직접적 증명이 없는 상태의 추단적 증명”이라는 것이 경우에 따라서는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 있는 “법관의 재량성의 범위 안”에 존재하는 판단영역이기 때문에, 항소심 이후의 재판에서 얼마든지 번복이 가능하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회사에서 근무하다 근로와 관련하여 병을 얻어 20대, 혹은 30대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근로자들에 대한 최소한의 양심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삼성전자의 직업병 논란은 2007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삼성전자 기흥공장 반도체 공정 노동자 황유미 씨가 백혈병으로 숨진 것을 기점으로 하여 시민사회단체인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가, 약칭 “반올림”이 발족되어 진상규명을 통한 산재인정을 받기 위해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부단히 투쟁하여 온 결과이다. 반올림의 조사결과에 의하면, 2011년 6월 현재 삼성전자 반도체와 LCD공장 등에서 뇌종양과 백혈병 등 희귀질병으로 밝혀진 근로자가 무려 130명에 이르고, 그 중 무려 47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들 중에는 20대 젊은 나이에 입사하여 불과 3,4 년 정도 아주 짧은 기간 근무하고서도 위와 같은 질병에 걸린 근로자가 다수 있다니 엄청난 사건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산재사고로 숨진 자들, 그들이야말로 간접살인의 피해자이다. 가난한 이 땅의 민초들이고 서민들이다. 그들에게는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고, 그러면서도 서로 사랑하고 의지해야 할 가족이 있다. 그들은 일부가 병들고 일부는 죽었는데도 그들에 대한 가해자는 그냥 묻히고 만다. 직접살인이 아닌 간접살인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세계적 기업인 삼성전자에서의 반도체 생산 등과 관련된 백혈병 등의 산재사고 발생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올 커다란 국가적 사건임에도 이 사건에 대한 보도는 극히 미미하다. 마치 바람 앞의 촛불마냥 하루 반짝 언론에서 보도되는 듯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그 다음날부터 메이저 신문에서 일제히 사라져버렸다. 그러한 공통적 기현상의 뒷면에서, “메이저 언론과 거대한 광고주인 삼성전자 사이의 음험한(?) 밀착”이 연상되는 것은 나만의 기우(?)일까? 그 다음날부터 삼성계열사의 광고가 메이저 언론사들의 지면을 확대장식하고, 사건보도는 축소ㆍ은폐되는 현상을 접하면서, 지난 주 본보 칼럼을 통해 필자가 밝혔던 종편방송의 폐해를 사전 실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와 동년배인 오대교 시인이 며칠 전 첫 시집인 “윽신윽신 뛰어나 보세”라는 시집을 보내왔다. 시집을 대충 훑어보려다가 그냥 내리 시집에 수록된 모든 시를 단숨에 읽고 말았다. 그 시집에 수록된 시 한 편을 본다. “한 알 한 알이/떡메를 맞고 있었다//쿵덕쿵덕/으깨지며 얼싸안으며/한 덩어리가 되고 있었다//씨름판에서는 장사가 되어야 하는 거여/떡판에서는 고소한 떡이 되어야 하는 거여/힘 있게 내려치는 아버지/말씀마다 떡메였다//맞을 땐 맞아야 하지요/하지만 될 놈은 그냥 두어도 된답니다/장단 맞추는 어머니/말씀마다 아팠다//설 하루 전날/떡치는 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다” (오대교의 시 “인절미” 전문, 위 시집에 수록). 오대교 시인은 “인절미”라는 시를 통해, 한 알 한 알의 쌀알이 떡메를 맞으며 으깨어지는 의미를 잘 묘사하고 있다. 으깨어짐을 통해 서로 얼싸안고 사랑해 갈 수밖에 없는 기현상을 본다. 인절미에서의 떡메는 “내려치는 강자”이지만 거기에서는 “아픔보다는 사랑”을 느끼게 된다. 낱알인 쌀알을 모아, 쫄깃쫄깃한 인절미를 만들기 위해서는 쌀알을 으깨는 내리침이 있어야 한다. 으깨어지는 쌀알은 으깨어지면서도 하나가 되어가는 환희를 맛보아 행복하다. 왜냐고? 쫄깃쫄깃한 인절미가 될 수 있으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떡메가 있다. 어찌 보면 삼성도 그러한 떡메 중의 하나일지 모른다. 아니 정말 삼성전자는 대한민국의 모든 떡메 중 가장 큰 떡메이다. 그리고 거기에서 근무하는 수많은 근로자들은 모두 한 알 한 알의 쌀알이다. 대한민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취직하고 싶어 하는 회사, 삼성전자는 그렇게 좋은 회사이다. 대한민국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주는 참 좋은 회사인 것만은 확실이다. 근로자들의 평균연봉이 가장 높은 수준이고, 작업환경 또한 국내최고인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좋은 삼성전자의 떡메질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답답함과 아픔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아니 몇몇 사람은 죽을 것 같은 통증을 느끼는 것일까? 삼성전자라는 떡메는 우리 사회가 원하는 많은 양의 인절미, 수많은 전자제품을 생산해 내어 국가의 부를 키우고 이를 통해 근로자들의 생활을 보장해 주고 있다. 어떻게 보면 참 감사해야 할 일이다. 그렇지만 저처럼 백혈병환자를 양산하는 생산체제라면 소송으로 갈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잘못을 시인하고, 법적 절차에 따라 보상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해 나가는데 앞장서야 할 것 아니겠는가?(물론 지금은 작업환경을 발 빠르게 개선하였을 것이다). 소송절차가 그러한 법적 보상절차라고 우긴다면, 쩌업, 할 말이 없다.


“인절미”라는 오대교 시인의 소박하면서도 가슴 아파 오는 시를 읽으며, 나는 동심으로 돌아가 “설 하루 전날/떡치는 소리가 점점 커지는” 고향집 앞뜰에 앉아 떡판을 입맛 다시며 바라보고 있는 꼬마아이가 되어 본다.  떡메를 내려치는 아버지의 땀방울을 보고, 떡메가 떡판에서 잘 떨어지도록 떡판에 물을 묻혀가며 장단을 맞추는 어머니의 사랑을 본다. 우리 모두는 서로 부등켜 안고 살아야 하는 인절미이다. 미처 섞이지 못하여, 인절미 속에서 쌀알 한 알로 남아 씹히는 경우도 없지 않아 있지만, 제대로 된 인절미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 떡메에 우리를 맡겨야 한다. 으깨지는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 그렇지만, 정녕 그렇지만 인절미를 만드는 떡메는, 쌀알을 내려치는 떡메는 파괴가 아닌 통합이어야 하고, 상처가 아닌 보듬음이어야 한다. 그래서 쫄깃쫄깃한 맛을 내어야 한다. 인절미를 씹어 먹는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어야 한다.


우리는 떡메의 내려침을 간접살인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고? 거기에는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사랑으로 가득한 떡메질에 으깨어지는 한 톨의 쌀알이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모두 함께에게 맛있게 씹히는 인절미가 되고 싶을 뿐이다. 당신은, 한 톨의 쌀알로 남아 떡메에게 대항할 것인가? 아니면 으깨어지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인절미의 사랑에 녹아들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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