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한국교회의 문제점, 예수 수난시대
상태바
오시영의 세상의 창-한국교회의 문제점, 예수 수난시대
  • 법률저널
  • 승인 2011.05.06 11: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예수 수난시대이다. 2000년 전에 죽은 예수가, 지금도 계속 죽어가고 있다. 며칠 전에는 문경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50대의 시신이 발견되어 타살인지 자살인지를 놓고 설왕설래 중이다. 본인의 필적에 의한 십자가 설계도면이나 자살과정 등에 대한 계획서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자발적 의사에 의한 죽음의 시작이었던 것은 분명해 보이나, 옆에서 이를 방조한 자가 있는지 여부에 관심의 초점이 모여지고 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을 가르치다 반역죄로 처형당한 젊은 청년 예수와 자기를 동일시한 자의 행위로밖에 인식되지 않지만, 수사결과는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평소 기독교에 대한 믿음이 강했다고 하나, 일단은 황당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최근 들어 일부 목회자들의 부정한 행위들이 속속 드러나면서 그 타락상이 비난을 받게 되고, 목회 지도자들로 구성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도 총회장선거를 둘러싼 금품선거 등의 비리가 밝혀져 교계가 얼룩지고 있다. 과부와 가난한 자로 상징되는 약한 자를 돕는 것을 최대의 덕목으로 삼았던 초대교회의 사랑의 정신이 사라진 기독교는 물신에 사로잡혀 지금 부패 중이다.


가장 철저한 유신론자 그룹인 교회가 가장 치열하게 황금만능주의에 사로잡혀 유물론자가 되어 버렸다는 것은 비극 중에서도 가장 커다란 비극이다. 한국교회의 특징 중의 하나는 교인을 끝없이 교회로 소집한다는 점이다. 교회 부흥과 전도를 목적으로 삼고 있는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예배 수를 엄청 늘려 교인들을 교회로 계속 집합시키고 있다. 이는 마치 군대에서 휴일에 쉬고 있는 사병들을 정신이 해이해지면 안 된다고 이유 없이 소집하는 고참병의 횡포처럼 보이기조차 한다. 목회자들은 계속되는 예배를 통해 교인들을 훈련하고, 그 훈련을 통해 영성을 강화시키고, 이를 행동으로 옮겨 전도에 힘을 쏟아 교세를 확장하는 것이다. 물론 목사들은 단순한 교세의 확장에 의미가 있다고 하지 않고, 믿지 않는 자들을 구원시켜 하늘나라의 복을 누리게 하겠다고 말을 한다. 그렇지만 물신에 사로잡힌 일부 목회자들이 교인 수에 의해 자신의 세상권위를 인정받으려는 출세지향적인 잘못된 가치관 때문에 그러한 강요 아닌 강요를 하고 있는 경우도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주일낮예배, 주일저녁예배, 수요예배, 금요철야예배, 구역별 모임예배, 부활절이나 교회창립기념주일 및 추수감사절이나 성탄절 등에 임박하여 절기에 맞춰 이루어지는 특별성회, 교회마다 특정 목적을 가지고 이루어지는 부흥집회, 매일 새벽마다 열리는 새벽기도회 등등, 교회에서 열리는 예배에 모두 참석을 하려면 일주일에 적어도 열 두어 번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


실업자로 하는 일 없는 사람라면 모를까, 일상생활을 하여야 하는 평범한 직장인이라면 한국교회가 요구하는 위 모든 예배에 100% 참여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저렇게 교회에 열심히 참석을 해야 한다면 그 사람은 직장인으로서, 평범한 생활인으로서의 일상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이 경우 목사들은 대부분 성도들을 향해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그러한 믿음의 강도를 지녀야 한다며,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만큼 출석하지 아니하는 신도들을 향해 믿음이 없는 자라고 겁박하고 매도하기조차 한다. 그렇지만 저 많은 예배에 모두 참석하려면 그 신도는 특별히 하는 일이 없는 자이거나 교회로부터 사례비를 받는 이들이어야 한다. 목회나 교회 사역 이외에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은 목회자는 일반 신도들이 매일 직장에 출근하듯 교회에 출근할 수 있고, 예배할 수 있고, 기도할 수 있다. 그리고 사례금을 받아 생활을 꾸려나가면 된다. 그렇지만 직장생활을 하고 있는 모태신앙인 나는 도무지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렇게 하기에는 우선 시간적 여유가 없고, 체력적으로도 한계를 느끼기 때문이다. 직장생활을 마치고 쉬어야 할 시간에 매번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교회행사에 참석하게 되면 내 몸이 녹초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매번 예배에 참석하지 못함으로써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나는 믿음이 약한 자로구나 하는 자책에 빠지게 된다. 은연 중 예배 건수가 엄청 늘어난 한국교회가 대다수의 교인들을 그렇게 세뇌해 버린 것이다. 하지만 교인들을 교회로 불러 오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목회자는 권위자로 교인 위에 군림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의도를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고관대작이든 지식인이든 돈 많은 기업가든 교회 안에서는 목회자에게 맹목적으로 순종을 강요당할 수밖에 없는 교회구조는 문제인 것이다. 그러다 일부 교인의 반발이 있게 되면 교회는 걷잡을 수 없는 분쟁에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또 목회자 중에는 함량 미달의 목회자가 얼마나 많은가?


성경은 오직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 6일 동안 천지만물을 창조하고 쉬었던 것처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안식일뿐만 아니라 거의 일주일 내내 교인들을 교회로 불러내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교회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일부 교인들이 믿음 있는 자로 평가되고, 자연스럽게 그들이 교회의 중심세력이 되어 교회를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일상생활이 배제된 자들에 의한 교회의 장악이 과연 현실사회와 맞아 떨어지겠는가? 의문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니 교회분란의 상당한 부분이 그러한 이질적 중심세력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또 다른 문제는 기독교를 포함한 모든 힘 있는 종교들은 모두 선교를 위해 방송국을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루 종일 설교나 설법을 하거나 종교강론을 통해 자신들의 종교를 널리 전파하고 있다. 내노라 하는 유명 설교자들이 이 방송을 통해 좋은 말씀을 많이 전하고 있다. 이를 통해 유명부흥사가 탄생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러한 설교의 남발은 종교의 신비로움을 소멸시켜 버렸다. 설교가 학원강의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종교에서 신비로움이 사라져버린 후유증은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마치 유명연예인의 몸개그를 보듯, 연예프로를 보듯, 유명 목회자들이 나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생쑈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 종교가 희화적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마치 유명 개그맨 쇼에 관객이 모여들 듯 신자들이 우르르 모여 들고, 부흥강사의 재미있는 입담이나 몸짓에 까르르 웃어재낀다. 그리고 스트레스 한 번 풀었다는 듯이 흩어지는 것이다. 진지함이 사라져버린 종교는 영성을 상실해 버린 종교로 무의미하다. 고뇌함이 없는 종교는 회심의 기회가 없다. 회개의 기회가 없는데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 있겠는가? 물론 그 방송을 통해 많은 이들이 종교적 결단을 내리는 수확을 얻고 있지만, 아쉽게도 통계에 의하면 기독교인 수는 매년 줄어들고 있다.


이러한 역반응은 무엇 때문일까? 행함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가르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교인들을 교회에 수시로, 잔뜩 모아 놓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말씀을 전하고는 있으나, 그러한 행사가 교회 내에서 끝나 버릴 뿐 일상생활로 연결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행함이라는 것이 세상을 향해 착한 일을 하고,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일 텐데, 그 일을 잘 가르치지 않는다. 교회 내에서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면 모든 죄를 용서받는다고 가르치니 밖에 나가서 죄를 짓더라도 교회에 가서 기도하면서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믿어버리는 것이다. 교인들이 세상을 향해, 피해자를 향해 용서를 빌지 않는 것이다. 우선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피해자에게 용서를 빌어야 한다는 당연한 이치를 기독교가 희석시켜 버린 것이다. 이것은 잘못되어도 정말 잘못된 가르침이다. 하나님은 결코 용서의 하나님이 아니다. 성경 곳곳에 보면 하나님은 죄짓는 자를 향해 끝없이 진노하였고, 벌을 내렸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묘하게 한국교회는 하나님이 끝까지 참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가르치며, 교인들이 세상에서 죄를 짓더라도 하나님께 나와 참회의 기도를 드리면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용서받고자 하는 사람의 본성을 꼬여내는 것이다. 그러니 순환논리에 빠져, 교인들은 피해자에게나 세상에 대해서나,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하여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용서하지 않는 하나님을 알아야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것인데, 매양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라 오해하니 또 죄를 지어도 되어버리는 것이다.


예배에 참석을 많이 하면 할수록 이러한 설교를 자주 듣게 되고, 은연 중 세뇌되어 버린 교인이 넘쳐나게 되니 기독교의 “빛과 소금의 역할”이 퇴색되어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에 대한 영향력이 없어져버리는 것이다. 기독교는 일상생활에서 교인들이 의롭고 선하게 살도록 가르쳐야 한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기본인 것은 분명하지만, 세상을 향한 행함이 없는 종교는 광신적이 될 수밖에 없고, 앞서 본 “십자가자살”이라는 황당한 呪術信仰, 기복신앙이 판을 치게 되는 것이다. 아픈 자는 병원을 가 치료를 받아야 하고, 입시를 앞둔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하고, 직장인은 열심히 일을 해야 하고, 가정주부는 집에서 살림살이를 해야 한다. 그게 바로 “협력하여 선을 이루라.”는 성경의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다. 십자가자살인지 타살인지 모를 황당한 사건을 보면서, 예수는 아름다운 詩人이었다는 말을 하고 싶을 뿐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라는 말은 예수가 시인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이다. 가슴이 따뜻해지지 않는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당신은 그렇게 살고 있는가? 나는 그저 부끄러울 뿐이다.  

xxx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전달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 기사를 후원하시겠습니까? 법률저널과 기자에게 큰 힘이 됩니다.

“기사 후원은 무통장 입금으로도 가능합니다”
농협 / 355-0064-0023-33 / (주)법률저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공고&채용속보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