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설정환 시인의 “돼지 잡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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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설정환 시인의 “돼지 잡는 날”
  • 법률저널
  • 승인 2011.03.31 1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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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잡히고 있다. 노획자는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자가 되어가고 있는데, 가해자가 뚜렷하지 않는 현상,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현존하는 비극 중의 하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가해자에 둘러싸인 채 공포심에 떨면서도, 막상 가해자의 실체를 모르는 현실, 그게 자기만 알고, 자기 이익에만 몰두하는 현대인이 앓고 있는 고질병의 후유증이기도 하다. 일본 원전사태로 빚어진 방사는의 심각성이 전 세계인들을 원전에 대한 가치관을 어떻게 재정리해야 할 것인가를 자문하게 만들고 있다. 지진, 쓰나미라는 자연재해는 가라앉아가고 있는데, 인간이 만든 환경재해쓰나미는 여전히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음을 보면서, 인간 행위의 결과가 얼마나 오랜 재해를 가져 오는가 그 심각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먹을거리, 마실 것이 넘쳐 나는데, 사람들은 끝없이 손을 움츠리고 위축되고 있다. 이 모든 공포의 시작과 끝을 자업자득이라고 포기하고 말아야 하는가?


지난 수요일, 정부는 영남신공항건설계획의 백지화를 선언하였다. 이명박 대통령의 대선 공약 중의 하나였던 영남신공항건설계획을 사업성 없다는 이유로 건설하지 않는 쪽으로 포기한 것이다. 지금 영남권 국회의원들을 중심으로 영남지역 민심이 팥죽 끓듯 들끓고 있다. 그렇지만 개인적으로는, 이명박 대통령의 3년 넘은 재임기간 중 가장 진심에서 우러나온 용기 있는 결정(?)을 하였음에 박수를 보낸다. 물론 2009년도에 사업실태조사를 사실상 마쳐 내부적으로 사업타당성이 없다는 결론을 도출해 놓고도 지금까지 여론과 표를 의식해서 차일피일 미뤄온 포기결정발표는 비난받아 마땅하겠지만, 이명박 대통령의 공항건설백지화결정은 국민 전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타당한 결정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케이티엑스 고속철도를 이용하면 서울에서 부산까지 두 시간 반이면 갈 수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비행기로 가기 위해 서울 도심에서 공항까지 나가는 시간, 비행기 탑승 대기시간, 비행기 항공시간, 내려서 다시 수속을 밟고 부산 시내로 들어가는 시간 등을 고려하면 거의 케이티엑스로 이동하는 시간과 맞먹는다. 그렇다면 서울역에서 부산역까지 케이티엑스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고, 공항건설에 들어가는 10조 원이 넘는 비용을 보다 효율적인 곳에 투자배분하는 것이 훨씬 옳다. 시간상으로뿐만 아니라 경제상으로도 말이다. 케이티엑스의 노선을 보다 더 확충하는 방안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대선공약”이라는 도그마에 사로잡혀 그 결과발표를 차일피일 미루다 오늘의 사태에 이르렀다. 그렇지만 우물쭈물하는 비겁 속에서도 옳은 결론을 내린 용기는 다행이다 싶다.


설정환 시인은 삶의 궁극을 밝히기 위한 집요한 노력을 이어오고 있는 시인이라는 평가를 받는, 아직은 젊은(?) 시인이다. 짜임새 있게 편집된 그의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를 며칠 전 우송받고 시를 읽던 중, 생생하게 잡혀 오는 시 하나 있어 함께 보기로 하겠다. “돼지 잡는 날”이라는 제목의 시다. “돼지의 마지막 비명悲鳴은/눈 채인 마을에 길 하나를 열었다//살아서는 길이 되지 못한/돼지의 마지막 길, 그 길은/조문弔問행렬로 정적을 깨고 소란해졌다//드럼통 속에서는 장작불이 타고/죄지은 자들이 죄짓지 않은 자를 구원하듯/돼지 머리에는 뜨거운 물이 쏟아 부어진다/세례가 끝난 돼지는/웃고 죽은 돼지라며 좋아들 하는데/이미 웃으며 죽을 수 있는 길이/그리 많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이/주름 진 골을 따라 얼굴을 만지작거리며 군침을 연신 삼킨다/털이 뽑힌 돼지는 풀 먹인 이불 홑청을 둘러쓴 듯 빛났다/누군가를 미워해 보지 못한 자의 빛깔은 정녕 이 같으리라//배를 가른다, 새끼들에게는 늘 기름진 영토였을/젖통이 갈라진다, 갈비뼈를 두 토막 내자/마지막에 몰아쉬었던 숨을 내뱉기라도 하듯/후, 하고 더운 김을 불어낸다 간이 배 밖으로 덜렁 쏟아진다/저리 붉은 꽃을 속으로 크게 키우고 있었구나/눈 위에 떨어지는 동백꽃잎처럼/하얀 소금 위로 뜨거운 꽃잎이 한 점 한 점 낙화하는 사이/돼지의 영혼은 눈 쌓인 문밖으로 나가자고 붉은 길을 끌고 나간다/어슬렁어슬렁 눈치만 살피던 흰 개 한 마리가/그 길을 긴 혀로 착하다 착하다 따뜻하게 핥아 준다” (설정환, “돼지 잡는 날” 전문, 시집 “나 걸어가고 있다”에 수록, “시와 사람” 출간)


저 시를 읽으면서, 자꾸 돼지의 모습이 사람의 모습으로 치환되어 온다. “살아서는 길이 되지 못한 돼지의 마지막 길, 돼지의 마지막 비명 소리가 눈 쌓인 마을에 길 하나 열었다”는 시인의 비명소리가 들려오는 듯해서 이다. 눈 쌓인 마을은, 길이 없어져버려 사람들의 내왕이 끊긴 저 마을은 우리의 마을이다, 소통 부재인 우리의 현실이다. 저 돼지가 제 온 몸 희생하여 누군가의 군침의 대상이 될 때 비로소 사람들은 그 죽은 돼지를 향해 긴 줄을 늘어지게 서서 돼지고기 한 점을 맛보기 위해 시간을 바친다. 돼지 살아, 죽는 순간의 비명소리보다 더 절박한 외침을 외쳤으련만, 살아 있는 돼지에게는 어느 누구 한 사람 시선을 보이지 않았을 세상, 그 세상이 지금 “시인, 나 걸어가고 있는 세상”이 아니었을까? “죄 지은 자들이 죄짓지 않은 자를 구원하듯 돼지 머리에 뜨거운 물이 쏟아 부어지면” 돼지는 털이 뽑히고, 하얗게 웃는 모습으로 잔칫상에 떠억 모셔져, 모든 살아 있는 이들의 큰 절을 받는다. 뜨거운 물 뒤집어쓰면서도 웃을 수 있는 “돼지의 도”의 끝은 어디일까?


죽어서, 죽어서 간이 배 밖으로 덜렁 쏟아진 돼지는, 살아서부터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많은 사람들을 향해 뭐라고 말을 할까? “길이면 다 걸을 수 있는 길인가?”라고 묻지 않을까? 아직은 식지 않았을 돼지의 간을, 한 점 한 점 동백꽃잎처럼 조각내어 소금에 찍어 먹는 사람들의 잔인함, 그 사이로 죄 한 번 지어본 적 없는 돼지의 영혼이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는 모습이 환영처럼 보인다. 마치 돼지가, 아직도 식지 않은 내 간을 소금 찍어 먹는 그대는 죽어 무엇을 내어 놓을 것인가고 묻고 있는 듯하다. (이 부분은, 하얀 소금을 하얀 눈으로 해석하여 하얀 눈 위에 돼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것으로 형상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뜨거운 물로 세례 받은 돼지는 죽어 웃는다. 살아생전 한 번도 웃어본 적 없던 돼지는 죽어서 웃는 모습으로 거듭 나는데, 살아생전 그렇게 많이 웃던 사람들 중 어느 누가 죽으며 웃던가 말이다. 설정환 시인은 “누군가를 미워해 보지 못한 자의 빛깔은 정년 이 같으리라”라고 설파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살아생전 그리도 많이 미워하고, 또 미워하며 살았기에 죽어 웃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는 것일까? 새끼들에게는 늘 기름진 영토였을 젖통이 갈라지는 돼지의 배, 지금 돼지의 배를 가르는 인간들처럼, 우리 인간의 배를 가르는 누군가는 또 어디에서 칼을 갈고 있으리라. 그 칼을 가는 자, 신의 이름으로 칼을 갈고 있을까, 아니면 인간의 이름으로 칼을 갈고 있을까?


이 땅에서 거의 매일 50명 가까운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OECD국가 중 자살율 1위인 나라, 여기저기에서 젊은이들이, 늙은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목을 감고, 배를 가르고, 영혼을 쪼개고 있다. 수많은 이들이 위로해 줄 것처럼 보이는데, 위로받지 못한 영혼들이 골방에 갇혀 있다. 백주대로가 모두 골방이 되어 버린 세상, 과연 우리는 저 시인이 묻고 있듯 제대로 우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그들도 저 돼지처럼, 살아생전 비명을, 비명을 지르지 않았을까? 눈 덮인 세상이 그 비명을 내지르는 이를 향한 길을 잃고, 아니 그 죽어가는 이가 길을 잃도록 눈을 치우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비로소 죽어야 조문행렬이 만들어지고, 슬퍼하며 더러는 슬퍼하지 아니하며 사람이 찾아오고(더러는 식지 않은 간 한 점 소금에 찍어먹을 기회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며 찾아오기도 하고), 그나마 어슬렁어슬렁 눈치만 살피던 흰 개 한 마리에게 자신이 남겨 놓은 붉은 길, 피로 얼룩진 마지막 절규의 길을 핥도록 해 주는 것 아닐까?


사람들이 탐욕의 대명사로 일컫는 동물, 돼지, 우리가 배부른 돼지라고 서슴없이 지칭하는 바로 그 돼지가 제 위의 80%가 차면 더 이상 음식을 먹지 않는 절제와 지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사람들은, 그 돼지가 남을 미워한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죽어 웃는 모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전체적으로 보면 동남권신항공설립공약은 철회되는 것이 맞고, 그 맞은 결정을 내렸다. 그렇지만 그 지역의 이해관계는, 아니 그러한 소문을 듣고 그 쪽에 많은 땅을 사들여 투기를 했었을 그 누군가는 살아생전 배 밖으로 나온 간을 주체하지 못하고 신공항건설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아니 진정으로 지역경제발전을 위해 건설을 희망하는 이들도 있겠지.


하여튼, 오늘도 수많은 돼지는 아무런 죄 없이 머리에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고 있고, 그 돼지를 향해 수많은 인간들이 줄을, 줄을, 줄을 이어 꼬리를 물고 행진을 하고 있다. 그래서 돼지는 죽어서도 계속 웃는다. 탐욕, 탐욕, 탐욕의 사람들을 향해, 살아생전 탐욕의 동물이라며 지탄받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웃고, 웃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과연 나는, 제대로 길을, 눈 덮여 보이지 않은 길을 제대로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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