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통일 독일의 사법통합 (법치국가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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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통일 독일의 사법통합 (법치국가의 복원)
  • 법률저널
  • 승인 2002.12.2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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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영
경남대 법행정학부 교수·법학박사


한국통일 후 법치국가의 복원은?


독일 작센-안할트주 할레지방법원(Halle LG) 형사법정


2002년 7월 10일. 독일 할레지방법원 형사법정. 살인사건이었다. 정면에 3명의 직업법관과 2명의 시민법관 그리고 법원서기, 좌측에 검사와 범죄심리분석사, 우측에 피고인과 변호인, 중앙에 증인이 앉아 있었다. 사랑방 좌담회였다.
 
할레의 형사재판은 집중심리로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50분 개정, 10분 휴정. 마이크도 위압도 이 법정에는 없었다. 일반인이 이해하기 쉬운 생활독일어를 구사했다. 피고인 복장은 사복이었다. 우리처럼 비둘기색 또는 황토색 수의가 아니었다.
 
피고인의 가슴에는 사건번호도 없었다. 흰 고무신도 신지 않았다. 가족들은 하루종일 지켜보았다. 우리처럼 5분도 안 되어 다른 피고인이 입장하지 않았다. 가족들은 5분 때문에 하루를 보내지 않았다. ‘1법정 1사건주의’였다. 할레법정은 시민의 가까이에 서 있었고, 간편했고, 명료했고, 효율적이었다. 독일통일이 준 동독의 사법복원 현장이었다.
 
독일통일 이후 독일정부는 동서독 사법통합(司法統合)을 전격 단행했다. 서독의 사법제도를 그대로 가져왔다. 통합목표는 두 가지. 법문화 복원, 시민 친화적 법무행정 구축이었다.
 
서독은 개인의 자유와 사회보장제도를 결합한 사회적 법치국가였다. 자유민주주의, 의회주의 입헌국가이념을 지향했다. 법질서 골격은 권력분립, 법치행정, 기본권 보장이었다. 반면 동독은 소련의 법체제를 도입했다. 법은 억압수단에 불과했다. 당(黨)의 이념이 최우선이었다.
 
동독 형사재판의 중심은 ‘사회주의 발전을 방해하는 반동 제국주의와 그 간첩들과 싸우는 것’이었다. 국가공안부(일명 슈타지)는 조사, 소송진행, 심지어 판결문 초안도 작성했다. 형집행은 구호만 재사회화였고, 감시와 훈련이었다.
 
1990년 10월 3일 독일통일은 이러한 동독 사법시스템을 완전히 개조하는 기회였다. 동독 5개 주(지방자치단체)는 1991년부터 1993년까지 서독의 사법시스템을 그대로 도입했다. 독일연방법원을 제외하고, 법원, 검찰, 형집행기관은 지자체로 이관되었다. 조직개편과 인적충원, 모두 지자체의 몫이었다.
 
내가 유학했던 할레는 작센-안할트주에 있는 인구 40만의 도시. 니더작센주에서 사법복구를 지원했다. 2명의 고위직 공무원과 11명의 법률전문가 파견 나왔다. 이들은 법원, 검찰, 변호사, 공증인 조직복구를 현장에서 기획했다.
 
통일초기 3년 동안(1990-1993) 작센-안할트주(인구 280만)에 40개 지방법원이 설치되었다. 형사, 민사, 노동, 행정법원이었다. 검찰도 1개 고등검찰청(나움부어그), 4개 지방검찰청(스텐달, 막데부어그, 할레, 데사우)을 설치했다.
 
작센-안할트 주헌법재판소는 시골 데사우에 자리잡았다. 주헌법재판관 7명은 주의회가 선출했다. 주(州)안에서 또 다른 지자체간의 기관소송, 헌법소원, 위헌법률을 심사했다. 완전한 분권이었고, 철저한 분산이었다. 지자체의 수도와 법원의 소재지는 지역균형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서독시스템으로의 조직개편이 끝나고, 대대적인 인적 정비가 시작되었다. 동독법관과 검사는 모두 재임용절차를 밟았다. 당시 작센-안할트주 소속 법관은 312명, 검사는 172명이었다. 그중 법관 266명, 검사 158명이 재임용을 신청했다.
 
법관인사위원회와 검찰인사위원회가 재임용여부를 심사했다. 6명 구의원(기초자치단체의원), 4명의 주의원(광역자치단체의원)도 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인사위원 3분의2의 찬성이 있어야 재임용되었다. 마지막 남은 신원조회. 국가공안부 문서관리청이 담당했다. 동독시절 본인이 작성한 공소장과 판결문이 심사대상이었다. 공직임용 부적격자, 반법치국가 활동자는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
 
작센-안할트의 경우 1991년 10월까지 법관 67명, 검사 43명만이 생존했다. 다른 지방자치단체도 비슷했다. 나머지는 서독법관으로 충원되었다. 재임용자는 서독 법관아카데미(사법연수원)에서 재교육을 받았다.
 
독일통일이 남긴 또 하나의 특수문제. 체제희생자에 대한 사면과 복권문제였다. 정치범, 기본권 침해사범이 주요 검토대상이었다. 심사 후 판결파기와 복권의 절차를 밟았다. 동독전역에서 약 2만3000건이 제출되었다. 5년이 걸렸다.


한국통일과 법치국가의 복원. 독일 사법통합의 경험은 귀중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미리 준비해야 한다. 첫째, 북한지역에 파견할 법조인력의 숫자와 조직개편 그리고 재정확보방안이다. 둘째, 북한에서 취득한 법조자격증의 인정여부이다. 이는 다른 분야 자격증 소지자 처리와 연계되어야 한다. 셋째, 북한법과 법률용어의 분석이다. 넷째, 북한의 각종 범죄통계, 검찰통계, 법원판결의 확보문제다. 통일 이후 각종 처분 및 판결에 대해 재심요청이 있을 경우 어느 범위에서 받아들일 것인지도 준비해야 한다. 다섯째, 지방변호사협회의 지원체계 구축이다. 대형 로펌의 역할도 중요하다. 독일은 변호사 재교육을 로펌에서 유료로 실시했다. 여섯째, 법원과 검찰의 북한지역 전산망 구축이다. 지금 어느 정도 준비되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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