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에 해야 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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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가을에 해야 하는 일
  • 임정수
  • 승인 2010.11.12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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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수 법무법인 충정(구. 한승) 변호사, 전 서울고법 판사

“가을 추(秋), 걷을 수(收), 겨울 동(冬), 감출 장(藏).” 소싯적 뜻도 모르고 외던 천자문 구절이다. 이제 계절은 가을을 넘어 겨울로 가는데, 올해는 또 무엇을 걷어 감출 것인가. 어머니의 각별한 보살핌 속에 원기를 이어가던 거실 밖 발코니의 접시꽃이 이제 붉은 꽃잎을 접어 가고, 높다란 줄기 위의 마지막 봉오리는 피지 않을 것 같다. 그 자리는 한 동안 국화가 대신하겠지만, 잠자리를 좋아하는 여덟 살 딸아이는 열흘 전 집 앞 풀밭에서 실잠자리 하나를 발견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아홉 살이 되어야 다시 잠자리 날개에 미소를 실어 보내겠다.


업계에서는 이때가 되면 많은 변호사들이 뒤늦게 의무연수와 공익활동을 챙기게 된다. 요 몇 년 사이에 생긴 연간 8시간의 의무연수와 20시간의 공익활동. 경기 둔화와 동업자 수의 증가로 어려움이 가중되는데 이런 새로운 부담에 불만과 불평이 어찌 없을쏘냐만, 이왕 맞는 매가 화를 낸들 덜 아프겠는가.


지난 토요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8시간의 행정법 전문분야 연수를 받았다. 그 전에 이메일로 연수 안내가 왔기에 2, 3일 후 비서에게 신청을 부탁했더니, 어느새 정원이 차서 신청을 못한단다. 연내에 언제 또 연수교육의 기회가 있을지 알 수 없으니까 그러리라. 평소에 ‘내일 할 일을 오늘 당겨서 하지 말라’는 격언이 있는 것으로 알고 사는 사람이 나만이 아닌가 보다. 그래도 대기자 등록 부탁 등등의 아쉬운 소리를 했더니 당일 현장에 나오면 신청을 받아준다고 한다. 어디나 탑승부도율이 있는 것이니까 그렇겠다.


연수교육이 이루어진 서초동 변호사연수원에 백수십 명의 변호사가 모여 들었다. 이렇게 많은 변호사가 있는 자리에는 처음 간 것 같기도 하다. 일단 하루의 시간을 내어 교육에 참석하니 주말의 특권인 늦잠을 못 잤음에도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다. 겨우 12만원의 수강료를 받고 8시간의 수준 높은 강의와 교재 외에 아침 못 먹은 사람들을 위한 샌드위치, 인근 음식점에서의 점심식사, 그 중간에 간식거리인 비스킷과 음료가 계속 제공이 된다. 어디에서나 풍성한 대접은 마음을 녹이는 법이니까.


적당히 하는 것 싫어하는 까다로운 성격이 아직도 남아 있어 앞줄에 앉아 교재에 메모를 해가면서 4개의 강의를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들었다. 현직 판사, 변호사, 교수로 구성된 강사님들은 강의를 참 잘 하셨다. 오늘 이 자리가 아니면 평생 알지 못하였을 것 같은 내용도 많다. 저분, 저분은 원래 아는 분들인데, 이런 면모도 있으셨던가 싶다. 연수가 끝난 뒤 수료증을 받아오면서 아는 분들의 이름이 적힌 봉투를 눈에 띄는 대로 몇 개 집어 들었다. 존경하고 사랑하는 동료인 이 분들의 수료증이 쓰레기통으로 가는 것을 방치하고 싶지는 않다.


공익활동은 다행히 사법연수원 출강시간을 포함시킬 수 있어서 별 문제가 없다. 하루에 2시간씩 10일만 계산해도 되니까. 우리 반 연수생들이 오로지 공익활동 충당을 위해서 단상에 서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평소에도 나만 즐겁고 연수생들에게는 괴로운 시간이라고 느끼기에 일종의 자격지심이라고 할 이런 마음이 더하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연수원 출강을 후회하기도 한다. 바로 채점을 해야 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사법연수원 시험은 힘들기로 정평이 있다. 한 과목 시험을 하루 종일 보는 데가 달리 있을까. 예전에 조치훈 선생이 전성기일 때 일본 메이저 기전 7번기의 매 대국을 2일 동안 두기는 하더라. 그래도 그 분이야 세계 정상의 정신력과 체력을 갖추었으니 그렇고, 일반인 천명이 과목마다 하루 종일 머리를 쥐어짜는 일은 다른 곳에 잘 없으리라.


연수생은 시험이 힘들겠지만, 채점 역시 ‘차라리 시험을 보겠다’고 할 정도로 힘이 든다. 하루 종일 시험을 보니 적어낸 분량이 엄청나다. 재미난 소설이라도 두세 번 읽지 않는 법인데 대동소이한 답안 수백개를 두고서 눈을 부릅뜨고 배점항목을 찾아내야 한다. 일어났다 앉았다 누웠다 먹었다 온갖 동작을 반복하며 집중력을 유지하려고 애쓴다. 연수원에 가보니 아직 채점을 마치지 못한 교수님은 아예 연수원에서 숙식을 하신단다. 정말 ‘새벽기도 없으면 목사 할 만하고 판결 안 쓰면 판사 할 만하다’에 이어 ‘채점 없으면 사법연수원 교수 할만하다’는 말이 나오겠다. 


오늘 보는 해를 내일 다시 볼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엄청난 축복이라는 것을 믿는다. 그럼에도 내일이 또 내년이 더 나았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한다. 내일과 내년을 맞이하기 위해 갈무리해야 할 일이 더 있는지 점검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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