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의 변호인 그리고 진실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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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사건의 변호인 그리고 진실게임
  • 임정수
  • 승인 2010.10.08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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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수 변호사 법무법인 충정(구. 한승), 전 서울고법 판사 임정수

형사사건의 변호인이 되는 것은 심적인 부담이 큰 일이다. 민사사건처럼 경제적 이익에 관한 다툼이 아니라 사람의 신체적 자유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그 운명에 관여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무 정신적 압박이 오는 사건이나 피고인이 원하는 바를 달성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드는 사건은 수임료에 대한 욕심을 접고 극구 사양하기도 한다.


형사재판에서 사선변호인의 역할에 의문을 품고 모든 형사사건을 국선으로 진행하자는 과격한 견해까지 있다. 실제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판사님들 중에는 판사가 알아서 사안의 실체와 경중을 가리며 재판을 하는 것이지 변호인의 존부와 역할에 따라 재판의 결론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는 확신을 가진 분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필자는 법원에 재직할 때에 일가친척이나 지인이 변호인 선임 여부를 물으면 항상 ‘경제적 여력이 되면 선임하실 것을 권한다’고 하였다. 모든 일에 가급적 최선을 다하는 것이 옳고 특히 형사재판과 같이 개인사에 중요한 영향이 미칠 일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른 조언이지만, 지금 법원을 떠나 형사사건 변호인이 생업의 한 축을 이루다보니 일관성 없는 인생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있게 과거에 그런 발언을 하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다.


올해도 이런저런 경위로 몇 건의 형사사건을 맡고 있다. 그런데 올해는 사건을 의뢰한 피고인이 유난히 공동피고인들과 함께 재판을 받는 사건이 많다. 어떤 사건은 피고인 수가 20을 넘기도 한다. 공동피고인이 많으면 당연히 시간이 그만큼 많이 걸리고, 재판부에서도 오후 내내 혹은 하루 종일 진행하는 특별기일을 여는 경우가 잦아서 변호인에게 시간적으로 엄청난 부담이 된다(변호사 업무는 여러 사람을 상대로 다면기를 두는 프로 바둑기사를 연상하게 하는데, 이 경우와 마찬가지로 한 사건에 너무 많은 시간이 들어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공동피고인이 있는 사건에서 시간적 애로보다 더 힘들고 괴로운 것은 때로 공동피고인들 사이의 진실게임에 휘말려야 한다는 점이다. 추사가 세한도(歲寒圖)에서 ‘추위가 닥친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안다’고 했다는 것처럼, 사람은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본성을 알게 되는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형사재판이라는 일생일대의 난관에 봉착한 상황에서 원래 관계가 무난하던 다른 피고인이 돌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피고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진실게임의 첫 번째 유형은 자신은 죄가 없고 다른 피고인이 죄가 있다거나 자신은 하수인에 불과하고 다른 피고인이 주범이라고 일방이 혹은 쌍방이 주장하는 사건이다.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심리에서 이런 일을 벌이게 된다. 이런 유형의 사건은 대체로 서로 중형을 선고받고 마는 경우가 많다. 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님이 대개 피고인에게 유리한 진술은 변명에 불과한 것으로 경시하고 불리한 진술이 진실에 가까운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성을 보이기 때문인 것 같다.


얼마 전에 이런 첫 번째 유형의 사건을 맡게 되었다. 두 명의 피고인들 중에서 산림훼손의 주범이 누구인지를 서로 전가하는 내용이었다. 사안을 파악한 결과 우리 피고인이 죄책을 면할 가능성은 무망한 것으로 판단되고, 단지 주범으로 처벌받는 것은 억울해 보였다. 그래서 피고인을 설득하여 책임을 인정하고, 공동피고인의 책임전가 노력을 파헤치는 것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과정에서 공동피고인이나 필자의 동업자인 그 변호인에게는 참으로 미안한 일이지만, 공동피고인의 구치소 접견부까지 증거로 제출하는 강수를 구사하여 결국 공동피고인의 기도를 무산시켰다(구치소 접견부는 통상 피고인이 법정에서 보이는 공손한 태도와 엄청나게 다른 모습을 드러내는 대화 내용이 적나라하게 기재되어 있다).


두 번째 유형은 자신은 죄가 있고 다른 피고인도 공범이라고 주장하는 사건이다. 혼자 처벌을 받는 불안감이나 혹은 자신은 수사와 재판에 협조하고 반성하는 사람인데 다른 피고인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부각시켜 상대적인 선처와 관용의 근거를 구하려는 심리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다. 이런 유형은 죄가 없는 사람이라도 그 혐의에서 벗어나기가 엄청나게 힘이 든다. ‘처벌을 감수하고 진실을 이야기 하는 피고인이 왜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거짓을 말하겠느냐’는 단순하고 대단히 설득력 있는 논리의 안식처에서 벗어나는 판사님은 많지 않다. 어마어마한 노력을 기울여서 한 사람을 항소심에서 간신히 구해낸 일이 기억에 남는다.


특히 이와 같은 진실게임이 벌어지는 형사사건이라면 피고인 혼자서 감당하기는 분명히 어렵고 피고인과 교감할 수 있는 변호인을 선임할 필요성이 절실할 것 같다. 물론 변호인은 자신이 아는 진실에 의문을 던지는 자세를 잃지 않아야 진실게임의 피해자가 되는 위험을 줄일 수 있음을 늘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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