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의 일기] 내가 그리운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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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의 일기] 내가 그리운 것들
  • 법률저널
  • 승인 2002.11.13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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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병태

                                                                        사법시험 준비, 서울대 박사 과정수료

내 친구랑 새벽 5시까지 얘기를 했다. 오랜만이다. 우리는 대학시절 함께 한 경험이 많아서 만나면 열띤 토론으로 이어지곤 한다. 노무현과 정몽준 얘기, 미국, 이라크, 북한 얘기, 더 나아가 '자본주의의 극복이 가능한가?' 같은 해답도 없는 거창한 주제로도 잘 얘기를 한다. 조금 철 지난 감도 있지만, [거북이]라는 신세대 그룹이 예전의 운동권 가요인 '四季(사계)'를 랩송으로 만들었는데, 그것이 핸드폰 벨소리 다운 횟수에서 1위를 기록했다는 소식도 들었다. 물론 그것에 대해서도 신나게 논쟁을 벌였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내 스무살 언저리의 밤이었다.

 

요즘 텔레비전 광고 중에서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송강호가 "오늘도 백세주다"라고 말하면서 곰인형을 보고 씩 웃는 것이다. 고시공부를 하기 전, 나는 계획되지 않은 밤을 보낸 적이 많다. 밤이 깊어지면 보고 싶은 놈에게 전화를 하거나, 곁에 있는 친구나 동료에게 '가자'고 해서 술자리를 가졌었다. 작년에는 여름부터 가을까지 알코올의 유혹을 꼭꼭 누르면서 참다가, 11월 30일, 고시원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 따라 갔다가 완전히 맛이 가도록 마신 적이 있다. 요즘도 난 집에 들어갈 때면 맥주 한 병씩 사 가지고 가서 내 처랑 마신다. 그래도 왁자지껄한 술자리의 분위기와 흐리멍덩한 가운데 벌어지는 각종 '사건사고'들이 그립다. 술만 마시면 남자 또는 벽을 향해 주먹을 날리던 여자 후배, 울면서 웃던 친구, 취하기만 하면 시키지도 않은 노래를 계속 흥얼거리던 놈.....

 

3차로 큰길가의 장어집으로 갔을 때 였던가? 내 친구가 {당대비평}의 편집위원인 문부식씨를 존경한다고 했다. 그는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의 주인공이면서도 의문사진상위원회의 동의대사건 민주화 인정을 비판했고, 진보적인 사람들 속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문화에 대해 자아반성을 하는 책을 쓴 사람이다. 정권의 폭력과 운동권의 폭력, 지식인이 반성을 하는 방식 등을 주제로 또 한참 논쟁을 벌였지만, 내가 지금의 문부식과 {당대비평}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친구랑 토론을 끝내고 새벽 5시부터 7시까지 피시방에 가서 문부식이나 {당대비평}과 관련된 주제어는 다 검색해 보았다. 문부식은 고난을 통해 겸손해지고 경건해진 훌륭한 사람이었고, 그가 잡지를 통해 하고자하는 일도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 날 저녁의 스터디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더 오랫 동안 그렇게 앉아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관심있는 영역에서 새로운 차원의 얘기를 접하면 만사를 제쳐두고 깊이 파고드는 편이다. 그런데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친구와의 대화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의문과 탐구'를 스스로 제한하고 있다. 물론 고시생이라서 그렇다. {역사의 종말}을 쓴 후쿠야마가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립이 아닌 미국과 유럽의 국제질서에 관한 견해차를 역사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는 신문기사, 내가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던 칸트의 [정언명령]을 여성의 관점에서 뒤집어 버리는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EBS특강]. 나는 이제 이런 것을 보아도 잠깐 메모만 해두고 지나쳐 버린다. 이 책 저 책을 뒤적이며 밤새워 골똘히 생각에 잠기던 그 시절이 그립다.

 

하긴, 내가 사회인이 되면 이런 그리움 마저 갖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빡빡하게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영화 [왓 위민 원트]에서 잘 나가는 광고회사 부사장인 여 주인공은 그 성공을 지키기 위해 하루종일 일에 매달려 있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수익이 가장 좋다는 펀드 운용자의 하루일과를 보니, 아무리 돈을 많이 번다 해도 너무 심하다 싶게 살고 있었다.  우리가 합격해서 법무부나 사법부의 공무원이 되든, 로펌에 소속된 변호사가 되든, 업무와 관련되지 않은 무언가를 주제로 밤새 토론하며 보낼 수 있을까? 술은 아마 많이 마시겠지만, 허물어진 너와 나의 모습 속에서 유쾌해질 수 있을까? 결국 다시 생각해보니 고시생이기 때문에 내가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리워지는 것이 아니라, 서른 다섯이라는 나이 때문에 이제는 할 수 없게 된 것에 대해 그리워하는 것 같기도 하다.

 

지난 금요일 오후에는 가는 눈발이 흩날렸다. 마침 그 때 내 처랑 대학교 휴게실 2층에서 창밖을 내다보며 같이 있었다. 파헬벨의 [캐논]이 피아노 선율로 들려왔다. 10여년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커피숍에서 눈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며 [디셈버(December)] 앨범 속에 빠지던 그 시절로 돌아갔다. 잠깐 동안의 포근하고 따뜻한 시간 여행..... 그 날 밤도 모의고사 문제지를 풀어야 했던 나는 음악이 그치자마자 금방 또 현실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눈발도 음악과 함께 그쳐버렸다.

 

나는 꿈꾼다. 우리 아이가 갖고 싶어하는 마당 넓은 집에서, 거실 밖으로 내리는 하얀 눈을 바라보며 내 딸이 생(生)으로 들려주는 '조지 윈스턴'을 들으면서 내 처와 백세주를 한 잔 하고, {당대비평}을 읽으면서 [아이 러브 스쿨]을 뒤적이고 싶다. 그 날을 위해 이번 겨울, 눈이 내려 질퍽해질 그리고 추위에 얼어붙을 때마다 대 여섯 번은 꼭 넘어지게 만드는 신림동 골목길을 걸어 다녀야 한다. 또 그렇게 2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 이 시절마저도 그리움으로 남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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