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 교수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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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교수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10.07.09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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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블랙리스트 만들기

우리는 대부분 모든 것을 무의식적으로 스쳐지나간다. 어디에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곁에 서 있는지 깊이 의식하지 않은 채 매순간을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고 싶은 것만을 바라보고자 하는 내심의 의식이 우리를 그렇게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고, 우리의 의식의 한계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까닭에 우리에게 의미가 되어 다가오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김춘수 선생은 그의 시 “꽃”에서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고 갈파했다. 맞는 말이다. 지천으로 피어 있는 꽃, 그 꽃을 막연한 시선으로 바라보면 그냥 안개처럼 막연할 뿐이다. 하지만 꽃 곁으로 다가가 향내를 맡고, 꽃의 빛깔에 취하며, 꽃잎을 헤아릴 때 그 꽃은 우리에게 아름다움과 경탄으로 다가오고, 그 전에 느끼지 못했던 행복을 우리로 하여금 느끼게 한다. 어디 꽃뿐이랴?

따라서 아무리 위대하고 커다란 것일지라도 우리가 스쳐 지나가면 우리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고,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우리에게 작은 계기가 있어 인식의 세계에 심어지게 되면 우리에게는 커다란 의미가 된다.

개그우먼 김미화씨에 대한 KBS의 명예훼손 고소사건이 그러하다. 며칠 전 김미화씨는 그의 트위터를 통해 “한국방송공사(케이비에스) 내부에 출연금지 문건이 존재하고 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케이비에스에 출연이 안 된다.”는 내용의 블랙리스트존재에 대해 언급하였고, 케이비에스는 김미화씨의 그러한 언급이 존재하지 않은 블랙리스트를 마치 있는 것처럼 언급하여 케이비에스의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그녀를 고소하였다. 아마도 케이비에스는 그러한 “문건”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에 자신감이 있기 때문에 김미화씨를 고소한 듯 하고, 김미화씨는 “블랙리스트가 사실상 존재”한다고 보았기 때문에 그러한 언급을 한 것으로 보인다. 블랙리스트는 문서로 존재하든 비문서로 존재하든 존재하면 존재하는 것이다.

케이비에스가 김미화씨에 대하여 명예훼손을 이유로 고소하지 않았다면, 김미화씨의 위 트위터에 실린 내용은 그냥 흘러가는 물처럼 몇 사람만 알고 조용히 흘러가 버렸을 것이다. 그런데 케이비에스가 그 물 흐름에 가물막을 친 것이 문제가 되어버렸다. 케이비에스는 이러한 명예훼손고소사실을 무슨 국가중대사라도 된 것인 양 뉴스시간을 엄청 할애하여 보도하였고, 덩달아 다른 모든 언론까지 이에 가세하였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공당인 한나라당의 조해진 대변인은 지난 7일 공식브리핑을 통해 “김미화씨가 여론이 요동치는 재보선을 코앞에 두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파장을 일으킬 것이 뻔한 발언을 했는데 납득하기 어렵다.”면서, “더구나 사실로 확인된 일도 아니고, 본인이 표현한 대로 추측성 루머에 불과한 것을 사실로 오인하게 만들고 언론의 보도를 거치며 사실로 둔갑하도록 소재를 제공한 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선의로 보이지 않는다.”는 대변을 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덩달아 “그럴 바에는 차리라 연예인을 그만 두고 정치를 해라.”라는 충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저 말 한마디가 트위터를 즐기는, 소통의 창구로 삼고 있는 젊은 세대에게 어떤 핵폭탄보다도 더 무서운 반감을 불러일으킬 말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하는 말인 것 같아, 또 자충수를 두는구나 싶어 안타까움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말은 하면 할수록 어려운 것이라, 웃돌 빼서 아랫돌 괴면, 위가 무너지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미처 생각지 못한 까닭이다. 

그리하여 김미화씨의 블랙리스트 발언은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가 되고 말았다. 과연 케이비에스에 그러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지 여부가 수사를 통해 밝혀질지에 대한 국민들의 궁금증을 부채질하기에 이르렀으니, 김춘수 선생의 말씀마따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어버린 셈이 되고 말았다.

김미화씨의 블랙리스트 발언에 대하여 문화평론가 진중권씨와 시사평론가 유창선씨 등이 동병상련의 아픔을 경험한 까닭인지 자신들의 트위터 등을 통해 실제로 케이비에스에 출연금지자들에 대한 블랙리스트가 존재한다고 폭로하면서 가세하였고, 미디어행동도 지난 6일 논평을 통해 “실제로 블랙리스트가 문건의 형식으로 존재하는지 여부는 이번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 현재 케이비에스 내에는 이미 블랙리스트 기능을 발휘하는 강력한 게이트키핑 장치가 작동되고 있다.”고 밝히면서, 굳이 누가 블랙리스틀 작성하여 지시하지 않아도 제작진이 케이에스사장인 김인규씨를 비롯한 경영진의 입맛에 맞지 않는 방송인을 출연시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라고 갈파하였다.

또 다른 의미를 만드는 일에 앞장선 것이 지금 수사 중에 있는 민간인 김종익씨에 대한 공직윤리지원관실의 불법사찰이다. “괜히 들쑤셨다.”라는 후회막급한 일을 공직윤리지원관실이 해버린 것이다. 법에도 없는 무소불위의 권한을 행사한 곳이 공직지원윤리관실이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97만 명의 공무원들과 34만 명에 달하는 공기업임직원들에 대한 “윤리심사권”을 그들은 무소불위로 행사할 수 있다. 42명의 직원들 중 40% 가까이가 포항과 영일을 중심으로 한 특정지역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다니, 공직지원윤리관실의 구성원들의 인적 구성이 포항시의 일개 동사무소보다 더 끈끈한(?) 이상한 형태가 되어 있다. 총리실 소속 직원이 9명이고, 다른 기관으로부터 파견받은 직원이 33명이라니, 파견나온 상당수의 직원이 영일ㆍ포항 출신인 모양이다. 저러한 인적 조직으로 구성되어 있는 공직지원윤리관실이 과연 그동안 무슨 일을 하여 왔을까? 그냥저냥,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며 지내온 것은 아닐까? 

법에 명시되어 있는 감사원, 검찰, 경찰, 청와대 민정수석실은 무슨 일을 하기에 그들과는 따로 법에도 없는 이상야릇한 특수기관인 공직지원윤리관실이 무고한 시민들을 미행하고, 사찰한다는 것이 과연 민주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윤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나 있는 사람이 그 구성원 중 몇이나 있었을까? 정말 호랑이를 등에 업고서 호위호가하는 얌체 같은 여우 새끼는 없었는지 이번 김종익씨 사건에 대한 수사를 통해 엄정하게 밝혀져야 할 것이다. 

사소한 것들은,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 아니 도도한 것들도 그냥 흘러가는 것이라면 흘러가도록 놓아두어야 한다. 흘러가는 사소한 것들을 가물막으로 막게 되면 엄청난 의미가 되어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도도한 것들을 막아서게 되면 급류에 휩쓸려 함께 떠내려가게 되어 있다.

블랙리스트라는 단어는 영국왕 찰스 2세가 청교도혁명 당시 자신의 아버지 찰스 1세에게 사형을 선고한 58명의 재판관 명단을 작성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물론 찰스 2세는 왕정복고에 따라 왕으로 즉위한 뒤 그 명단에 따라 58명의 재판관을 처형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조선시대 한명회가 수양대군을 도와 계유정난을 일으킬 때 김종서 등 제거해야 할 중신들에 대한 살생부를 만들었고, 연산군도 무오사화 당시 생모 윤씨의 폐비에 찬성했던 윤필상 등 수십 명을 살해하면서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전두환 5공정권 당시에도 정치활동규제자명단을 블랙리스트로 만들었고, 해고자복직금지, 제적생복교금지 등 수많은 블랙리스트 등을 만들었다. 그런 까닭에 블랙리스트에서는 음험한 복수의 느낌이 강하게 느껴진다.

일단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게 되면 그 자의 삶은 비참해질 수밖에 없다. 모든 것이 사필귀정이라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거나, 신원이 회복된다고 할지라도 힘을 가진 자에 의해 만들어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오르면 당시에는 핍박을 받고, 당장의 생활이 어려워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세상 홀로 외톨이가 되어 거대한 힘과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까닭에 블랙리스트는 밝은 대명천지로 나와야 한다. 김미화씨의 블랙리스트 발언대로 블랙리스트의 존재가 밝혀질지, 아니면 없는 것으로 밝혀질지 모르지만, 암암리에 우리 사회 곳곳에는 게이트키핑이 있기 마련이다. 이러한 병목현상이야말로, 도로 곳곳에 정체현상을 일으키고 모두를 짜증나게 한다. 하지만 어쩌랴, 힘 가진 자가 블랙리스트를 만들겠다는데, 어쩔겨? 만들겠다는데, 그래서 한 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 만들어라 만들어, 단 하나 명심할 것은 국민들도 다음 선거에서 제거할 놈들에 대한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고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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