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험생활]엄상익 변호사(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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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험생활]엄상익 변호사(5)
  • 법률저널
  • 승인 2002.10.02 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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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과 동시에 입영영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연기하는 유일한 방법은 대학원등록이었다.  가난뱅이 월급쟁이 아버지에게 손을 벌리기 미안했다.


"한양대학원에서 특별장학생을 모집하는데 한번 가봐"


한 친구가 정보를 주었다. 당시 법대를 키우기 위해 특별장학생을 뽑는 몇몇 대학이 있었다. 사법시험에서 아깝게 떨어진 사람에게 등록금과 생활비를 주는 제도였다. 나는 사법시험 성적증명서를 들고 한양대학교 김기선 학장을 찾아갔다. 은발의 중후한 신사가 소파에 근엄하게 앉아 있었다. 서류를 보다가 학장이 말했다.


"서울 법대 아니고 여기 들어온 학생이 없는데----"


난색을 표명하는 것이다. 나는 명품이 아니란 얘기였다. 낭만에 젖었던 내가 일부 현실을 아는 순간이었다. 난 우물쭈물했다. 그런 나를 바라보던 학장이 장난기 서린 눈길을 주며  말했다. 


"너 말이다. 지금 당장가서 대가리를 빡빡 밀고 올 수 있니? 머리가 중같이 파랗게 면도하고 말이야.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지 뭐 싫으면 그냥 돌아가도 좋고----"


학장은 나의 각오를 테스트하려는 것이다.


"알겠습니다."


나는 대답하고 학장실을 나왔다. 잠시 망설이며 서 있는데 내 뒤로 작달막한 키에 눈이 옆으로 길게 찢어진 남자가 나왔다. 눈에서 푸른빛이 나오는 만만치 않은 인상이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저 영감 태기 머리 배코 치고 왔는데 안 넣어 주기만 해봐라. 상을 다 둘러엎고 갈 테니까-----"


그도 똑같은 주문을 받은 것이다. 나는 근처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빡빡 밀고 가서 학장에게 보였다.


"됐다. 당장 짐을 꾸려서 오늘 저녁으로 해인사 원당암에 가거라. 그리고 절대 암자를 떠나지 말거라. 내가 불시에 찾아갔을 때 공부하고 있지 않으면 자네는 그 자리로 병정 갈 각오해."


군대로 보낸다는게 제일 무서운 협박이었다. 입대순간 인생이 끝난다고 생각했다. 가야산 중턱에 겨울 해가 떨어질 무렵 보따리를 둘러멘 나는 해인사 버스정류장에 도착했다. 댓 명의 수염이 터부룩한 남자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두들 털모자에 회색의 한복바지를 입은 특이한 모습이었다. 원당암에서 합숙을 하는 고시생들이었다. 그날 밤 암자 요사채의 구석방을 배정 받았다. 문풍지가 '부우우'하고 떨면서 황소바람이 들어왔다. 마당의 탑 그림자가 창호지에 수묵화 같이 비쳤다. 이따금씩 산짐승들이 울부짖었다. 낭만이 실종되는 순간이었다. 식사도 최악이었다. 삶은 밀쌀에  막 된장을 푼 시레기 국이었다. 이따금 고시생들이 간단한 야식을 하며 얘기했다. 지금은 지검장인 그중 제일 고참인 강이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한지 11년이 넘었어. 그러니까 대학 두 번 졸업하고 대학원에 방위까지 마친 셈이지. 뒤늦게 나이 먹고 군대가니까 힘들더구만. 내가 소같이 생겼다고 어린 고참 놈이 물이 가득 찬 주전자를 주면서 다 마시라는 거야. 그걸 억지로 다 마시니까 눈알이 빙빙 돌고 입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던데. "


그는 서글픈 눈을 하면서 웃었다. 해 질 무렵이면 그는 나무 아래서 가곡을 부르면서 시름을 달래곤 했다. 항상 남대문 시장에서 산 군복을 입고 다니던 정은 이런 하소연을 했다.


"며칠 전에 서울에 갔었는데 검사가 된 고등학교 동창이 약혼녀와 함께 명동을 걷는걸 봤어. 그걸 보니까 나 자신이 얼마나 초라해 지는지 얼른 골목에 숨어 버렸어. 노장이 되니까 서울에 다니기도 힘들어 다시는 안 갈 거야."
모두들 서글픈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년 후 그는 사법시험 에 수석 합격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세상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밤하늘에 별이 총총한 어느 추운 날 이었다. 밤늦게 배가 고파진 나는 남은 장작불에 돌같이 굳은 떡을 굽고 있었다. 옆에 권이라는 사람이 다가와 쭈그리고 앉으면서 말을 걸었다.


"나는 묘지기 아들이요. 묘에 딸린 논 두마지기로 다섯 식구가 입에 풀칠했지. 나는 먹는 거는 독약만 아니면 뭐든 잘 먹어요. 내가 다음에 합격하면 고기 집에 장가 들거야. 그래서 친구들을 불러 실컷 먹여 볼꺼야."


그 해 일찍 합격한 그는 꿈대로 식당 집 딸과 결혼했다. 얼마 전 뉴스시간에 차장검사인 그가 기자회견을 하는 모습을 보고 나 혼자 슬며시 미소지었다. 모두들 고생을 할 때 거기 끼어있는 나는 고생이 아니었다.

 

▶약력:1954년 경기 평택 生/고대법대졸/안기부정책연구관/대도 조세형·신창원 등 변호/KBS 여기는 현장·SBS 사건파일 등 진행/현 변호사


▶저서:'변호사와 연탄구루마', '하나님 엄변호사입니다', 엄마 합의합시다'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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