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시생 일기]초등학교 운동장 폐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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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시생 일기]초등학교 운동장 폐쇄 사건
  • 법률저널
  • 승인 2002.10.02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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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 오랜만에 아이들을 데리고 초등학교 운동장에 놀러갔다. 4살 다빈이와 축구를 하고 초등학생인 윤지에게는 전통놀이인 '바다차기'를 가르쳐 주었다. 정사각형을 가로 세로 3등분한 아홉 칸을 바닥에 그어놓고 각각의 칸에 번호를 매긴 다음, 평평하게 생긴 돌멩이를 정해진 순서에 따라 발로 차면서 옮겨다니는 놀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여학생들이 주로 하던 것인데 나도 끼어서 많이 놀았다. 요즘 서울 아이들이 그거 하는 것 한번도 못 봤다. 옛 생각이 났다. 내 처에게 전화를 해서 퇴근할 때 운동장에 들러서 같이 놀자고 했다.

 

그런데 정작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 아니다. 6시 다 되어갈 즈음 검게 그을린 얼굴을 한 어른 몇이서 사람들에게 운동장에서 나가라고 했다. 유리창을 깨고 낙서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 학교의 방침상 평일 6시 이후와 공휴일에는 운동장을 폐쇄한지 두 달 되었다고 했다. 놀던 아이들과 쉬던 주민들은 순순히 응했다. 그러나 나는 나갈 수가 없다고 버텼다. 운동장은 학교장의 소유가 아니라 지역주민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이며, 난곡이 산비탈을 깎아 만든 동네라 아이들이 뛰어놀 만한 평평한 곳은 운동장뿐이라는 사정을 아저씨들도 잘 알지 않냐고 했다. 아무리 해도 내가 논리를 굽힐 것 같지 않자 그 사람들은 교장이 지시한 것이라면서 따지려면 교장에게 따지라고 말했다. 사실 나는 그 문제와 관련해서 화가 나 있는 상태였다. 얼마 전 일요일에 잠긴 문 사이로 아이들은 텅 빈 운동장을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어른들이 그곳에서 술판을 벌이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 운동부와 관련된 사람들 같기도 했는데, 아무튼 매우 비교육적이라고 생각했다.

 

꼼짝도 하지 않고 버티는 내게 그 사람들도 화가 났고, 나도 예전 기억들이 떠올라서 감정싸움 비슷하게 발전되었다. 게다가 주민들을 몰아내고 닫은 문을 통해 '관계자'라는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것도 보기 좋지 않았다. 6명 정도와 차례로 다투다가 그 사람들과 논쟁해 봤자 실익도 없을 것 같아서 내 처가 올 때까지만 운동장 안에서 기다리겠다고 양해를 구했다. 일단 쫓기듯 나가기도 싫었고, 마을버스가 지나다니는 초등학교 앞 차도에서 아이 둘과 엄마를 기다리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관계자'들은 방침대로 한다면서 문을 쇠사슬로 걸어 잠그는 것이었다. 내가 담을 넘어가든 어떻게 나가든 자기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도 했다. 그리고 나같은 사람은 자기들한테만 큰 소리를 칠 줄 알지 정작 교장이나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말도 못 꺼낼 거라고 비아냥거렸다. 교장 전화번호를 가르쳐 주지 않아서 나는 경찰에게 전화를 했다. 대충 통화한 다음 전화를 바꾸려고 하니 방금 전까지만 해도 경찰과 다 얘기가 되어 있다면서 기세등등하던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중 대장쯤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핸드폰을 건네자 경찰과 오래 통화를 했다. 경찰은 내게 학교장의 방침은 경찰이 개입할 문제가 아니고 일단 오늘은 밖으로 나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예상했던 바다. 그래도 경찰이 뭐라고 했는지 쇠사슬은 풀고 빗장만 걸어 두었다.


나는 나가지 않고 내 처가 올 때까지 아이들 둘을 끌어안고 정문 앞 벤치에서 '관계자'들 숙소를 노려보면서 묵언의 시위를 벌였다. 내 처가 오자 문을 열어 주었다. 나는 내 처와 함께 텅 빈 운동장을 천천히 걸었다. 놀다가 둔 공이나 물건들을 챙기면서 느릿느릿하게 밖으로 나왔다.

 

내가 어릴 때 다니던 울산의 초등학교와 신림동 고시촌 앞의 신성초등학교는 새벽 3시에 가도 조깅을 할 수 있다.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설사 출입을 통제해도 자정 즈음에나 하지 6시에 하는 경우는 없고, 공휴일에 문을 닫는 것은 상상하기도 힘들다고 했다. 지금 돌이켜  보니 유리창 깨졌다고 문부터 걸어 잠그는 그 행정 편의주의적 접근에도 화가 났지만, 교장이 가난하고 힘없는 난곡 사람들을 깔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더 화가 났었던 것 같다.  강남이나 고시촌 앞의 초등학교 교장이 과연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물론 교장 선생님의 진정한 의도가 그것이 아니라면 미안하지만 내게는 그렇게 다가왔다.

 

내가 다투는 동안 작은 아이는 뛰어 다니면서 놀았는데, 딸 아이 윤지는 쇠사슬로 문을 걸어 잠그자 집에 못가게 되었다고 울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나온 뒤 우리 가족은 햄버거 가게에 갔다. 거기서 나는 윤지에게 아빠가 왜 그랬는지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을 해 주었다. 윤지도 대충 이해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빠가 잘했는지 잘 못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했다. 솔직한 대답이다.

 

누구랑 싸울 일이 생길 때 고시생만큼 피곤하고 약한 '사회적 지위'도 없을 거다. 무엇보다도 공부에 치명적이기 때문이다. 내 친구 하나는 독서실로 오다가 공사판 인부들에게 빨리 안 지나간다고 큰 소리를 듣기만 해도 하루 종일 공부가 잘 안된다고 했다. 게다가 나는 고시생이자 '학부형'이다. 아이를 학교에 맡긴 부모가 교장에게 쓴 소리를 한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다. 내 처랑 밤에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래서 다음날 윤지 담임선생님에게 먼저 연락을 해서 사정을 말씀드리고 교장 선생님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니 담임은 "항의"가 아닌 "건의"를 해달라고 당부했다. 그러겠다고 했다.

 

이 문제가 앞으로 어떻게 풀릴까? 끝까지 해서 개방을 관철시킬 것인지 아니면 한번 '건의'한 것으로 자족할 지는 나도 모르겠다. 나는 이런 것 잘 참지 못하지만 또한 고시생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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