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수험생활]엄상익변호사(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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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수험생활]엄상익변호사(3)
  • 법률저널
  • 승인 2002.09.18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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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촌 절 마당에 코스모스가 피고 잠자리가 날기 시작하자 내 속에서 다시 방랑기가 꿈틀거렸다. 다음 정착지는 노란 낙엽이 떨어져 쌓인 청평 유원지에 있는 가을 강가의 방가로 였다. 관광객들로 들끓던 유원지가 가을부터는 고시생들을 받아 밥장사를 했다. 도서관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이 이웃 방가로를 하나씩 빌려 모여들었다. 나는 예상출제문제의 타이틀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공책을 만들었다. 그리고 큰 타이틀과 작은 타이틀의 첫 글짜 만 조립해서 만트라 같은 주문들을 만들었다. 시간이 나면 틈틈이 그것들을 중얼거리면서 뇌리에 기계적으로 박아 넣었다. 나는 주관식채점위원의 입장이 되어 보았다. 수많은 논문답안지를 채점하기 위해서는 객관적인 기준이 필요할 것 같았다. 건물로 치면 기본 골조가 타이틀일 것 같았다. 다음은 타이틀 안의 핵심용어의 존재를 확인하고 점수를 매길 것 같았다. 그 정도면 기본 평균점수는 나오고 그 후

 

얼마나 아름답게 인테리어를 하듯 법의 이념을 아는 체 장식하면 추가점수가 나오리라고 예상했다. 법서 들을 다 읽으려고 치면 한이 없었다. 한 권 한 권 읽다보면 다시 돌아오는데 일년도 넘는다. 그때는 예전의 기억이 다 사라지곤 했다.


 법서 아래에 있는 주석까지 빼놓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는 친구도 있었다. 그는 "이것도 다 필요하니까 책에 썼을 거 아니가. 낸 다 읽는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성격에 따라 공부방법도 다양했다. 낮에는 놀고 밤에 공부하는 올빼미형도 많았다.  


 책을 읽다가 싫증이 날 때면 강가에 묶인 보트로 상류까지 다녀오곤 했다. 해질 무렵이면 커피를 마시면서 철교 위를 지나가는 기차와 그 배경인 붉은 황혼을 즐겼다. 날이 추워지자 청평의 철물점에서 작은 무쇠연탄난로를 사다가 엉성한 솜씨로 설치했다. 함석연통의 이음매마다 종이에 풀을 발라 틈새를 막았다. 연탄가스가 새나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추위가 닥쳐왔다. 강물에 두껍게 얼음이 얼어붙고 그 위로 흰눈이 쌓였다. 나는 최대한 범위를 좁힌 공부자료를 철저히 암기했다. 내가 공부한 분야에서만 나오면 어느 정도 합격할 자신이 생겼다. 다음해 초 제 18회 사법시험을 치렀다. 시험 사흘째 됐을 때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거의 다 예상 문제 안에 들어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뒤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제 하루만 무난히 지나면 합격의 희망을 가져도 될 것 같았다. 마지막 날이었다. 오전의 형법시험도 내가 알고 있는 문제였다. 나는 부담감 없이 답을 써 내려갔다. 합격할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제 형사소송법시험만 치르면 끝이었다. 성공한 화려한 내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수험장 칠판 위에 걸린 문제가 적힌 두루마리를 보면서 마지막 전열을 가다듬었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만큼 시험장은 긴장감이 팽팽했다. 이윽고 감독이 면도칼로 두루마리를 감고 있던 테이프를 끊었다. 형사소송법의 첫 번째 문제도 아는 문제였다. 다만 두 번째 문제만 '피의자 보전에 대해 논하라'는 처음 보는 제목이었다. 예상 문제 중에 없는 걸 처음 닥친 것이다. 순간 당황했다. 나같이 집중적으로 기계적 암기하는 사람을 물리치기 위해 시험관들은 같은 문제라도 표현을 비틀어서 던지는 것이다. 거기에 직통으로 걸려 든 것이다. 책을 처음부터 읽어 이해하는 사람만이 그 관문을 넘어설 수 있다. 사실 시험은 요약지에 전체적인 아웃라인을 메모하는 처음 5분간에 결정 됐다. 나는 답을 모르는게 아니라 문제의 제목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내가 외웠던 익숙한 다른 문제의 답을 쓰기 시작했다. 그 순간이었다. 우연히 앞자리에 앉은 사람의 어깨너머로 그가 메모한 타이틀이 보였다. 그걸 보고야 나는 나의 판단미스를 깨달았다. 당황했다. 그리고 방향을 바꾸고 싶었다. 그런데 깊은 속에서 울리는 양심의 소리가 있었다.


 '너는 컨닝을 한 거야. 정직한 법조인이 되려는 사람이 남의 답안을 보고 점수를 받을 수는 없어. 그렇게 합격하면 평생 너의 마음은 어두워. 남은 몰라도 너 자신은 속일 수 없으니까'


 나는 이미 방향이 틀렸다는 것을 알면서 그대로 써 내려갔다. 호남의 수재로 유명한 앞의 그 수험생은 그 해 합격하고 승승장구해서 지금 중진 정치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한달 후 발표가 났다. 나는 평균 1점 차이로 아깝게 떨어졌다. 마지막날 형사소송법이 39.66으로 과락이었다. 내가 마지막날 눈 한번 꾹 감고 양심을 눌렀다면 대학 3학년말에 합격하는 영광을 차지했을지도 모른다.  악마의 유혹을 뿌리친 나는 이후 7년이란 오랜 세월을 광야에서 비바람에 시달리게 된다.

 

▶약력:1954년 경기 평택 生/고대법대졸/안기부정책연구관/대도 조세형·신창원 등 변호/KBS 여기는 현장·SBS 사건파일 등 진행/현 변호사
▶저서:'변호사와 연탄구루마', '하나님 엄변호사입니다', 엄마 합의합시다' 등 다수
▶엄상익·진효근 합동법률사무소  전화 (02) 534-2202∼4 팩스(02) 534-5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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