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와 무죄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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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와 무죄판결
  • 임정수
  • 승인 2010.02.11 1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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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수 법무법인 충정(구. 한승) 변호사 / 전 고등법원판사

 

법정에 들어가 형사사건 판결 선고를 할 때 앞의 네 글자(음절)만 들으면 결론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안다는 말이 있다. 통상 유죄판결은 “피고인을 징역 1년에 처한다”와 같이 선고하고 무죄판결은 “피고인은 무죄”라고 하여, ‘피고인’ 뒤에 붙는 조사의 종류가 달라지는 것이다. 최근 몇 건의 무죄판결 선고와 관련하여 이런저런 말이 많고 세상이 좀 시끄러운 것 아닌가 싶다.


강기갑 의원 사건이나 MBC PD수첩 사건의 무죄판결이 보수·진보의 세계관과 무관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징조도 보인다. 단독판사, 특히 형사재판을 맡는 단독재판부를 10년 이상 법조경력이 된 판사에게 맡긴다는 방침이 대법원에 의해 제시되고 있다. 그래서 가뜩이나 누적되는 인사적체의 파장을 우려하는 사법연수원 20기 후반 대의 판사들은 ‘이제 부장판사는 못 해보고 형사단독이나 오래 하겠다’는 탄식을 하게 되었다. 또한 로스쿨 졸업생이나 사법연수생들이 판사가 되려면 3년 정도의 연구관을 거치는 내용으로 판사 임용 방안이 마련되고 있다고 한다. 이 부분도 법조인 양성제도의 변화에 따른 것이기는 하겠으나, ‘너무 젊은 사람이 판사가 되어 중요한 사건을 마음대로 처리한다’는 시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우리 형사재판에서 무죄판결이 선고되는 비율은 대단히 낮다. 법정에서의 재판을 거치지 않는 약식명령의 사건 수가 포함된 것이겠으나, 0.15% 내지 0.27% 수준으로 하여간 100건의 1건이 훨씬 안 된다.


그럼 무죄가 선고되는 비율이 이렇게 낮은 이유는 무엇일까? 기소, 즉 형사사건의 소추를 독점하고 있는 검사의 자질이 우수하고 기소 전의 수사가 워낙 철저하여 그런 것일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검찰, 경찰의 조서는 집어던져 버리라’고 하셨다는 대법원장의 말씀처럼 공판중심주의, 직접주의가 강조되는 재판절차에서 검찰 측과 피고인 측의 승부가 999승 1패라면 너무 지나친 일이 아닐까?


물론 무죄판결의 비율이 낮은 것을 무조건 탓할 일은 아니다. 범죄가 실제로 일어났고 그 범인이 재판을 받음에도 이런저런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다면 사회질서의 유지나 공동체 구성원들의 공감을 얻기가 어려울 것이다. 범죄를 저지르면 반드시 처벌받는다는 인식의 공유와 실제 그런 법집행이 이루어져야 응보와 범죄의 예방이라는 형사법의 목적도 달성될 수 있다.


무죄판결이 많지 않은 이유로 무죄판결이 유죄판결보다 작성이 훨씬 어렵기 때문이라는 점을 거론하시는 분도 있다. 실제로 그렇기는 하다. 필자가 판사 2년차에 형사재판부에 근무하면서 나름으로는 끙끙대면서 처음으로 무죄판결이라는 것을 작성하여 부장(판사)님께 가져다 드렸다. 부장님은 읽어보신 후 고칠 엄두가 나지 않으셨는지, ‘일단 취지는 알겠으니 선고는 하지’라고 하셨다. 필자는 부장님의 반응에 스스로 부끄러워 선고 후 주말 내내 판결문의 구성과 표현을 손보아 훨씬 번듯한 것으로 만들어 드렸다. 이처럼 무죄판결 작성은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구한다. 그럼에도 힘들어서 무죄판결을 하지 않는 일은 없을 것이고 또 없어야 한다. 필자가 주심이었던 사건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50대의 남성이 법정에서 엉엉 울며 돌아서던 모습을 십수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한다. 그 사건은 3중 충돌의 교통사고에서 누가 처음 충돌사고를 내었는지가 쟁점이었는데, 그 피고인은 1심에서 유죄판결을 선고받은 상태였다. 필자는 아직도 옳은 판단으로 좋은 일을 했다고 믿는다.


필자가 생각할 때 가장 큰 문제는 판사의 선입견과 무관심이 아닌가 싶다. 대개 남들의 모범이 되고 상을 받을 일을 한 사람이 형사재판을 받으러 오지는 않는다. 남들의 비난을 받거나 적어도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상대방이 있는 사람이 피고인이 되는 것이다. 판사가 이들에 대해 일단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면 과중한 업무부담 속에서 무죄 가능성을 치밀하게 검토하지 않게 되기 쉽다. 그래서 단순히 빚을 못 갚은 사람이 사기죄로, 실제로 얻어맞기만 한 사람이 쌍방 폭행의 폭력범으로, 내막을 모르고 돈 몇 푼 받고 심부름만 한 사람이 인질강도의 공범으로 유죄판결을 선고받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건이 언론보도 등을 통하여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끄는 경우에는 원래 냉담한 성향의 판사라도 다른 사건보다 훨씬 더 시간과 노력을 투여하여 다각적인 검토를 하게 될 것 같다. 그래서 그런 사건은 무죄 선고의 비율이 현저히 높아지는 것이 아닐까? 대검 중앙수사부에서 수사한 사건의 무죄율이 일반 사건과 달리 몇십 퍼센트가 된다는 것처럼.


이런 현상은 세간의 표현으로 ‘유전무죄’는 몰라도 ‘무전유죄’의 한 단면이라고 할 수는 있겠다. 어느 쪽이나 지양될 일이다. 최근 몇몇 무죄판결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사람들이 그 동안 결국 무관심과 냉담 속에서 유죄를 선고받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평범한 피고인들이 ‘빚을 못 갚았을 뿐 사기가 아니다’, ‘방어행위 외에 폭행하지 않았다’, ‘심부름하기는 했으나 공모로 볼 수 없다’고 하여 무죄로 판단되었다면, 그들은 두고두고 법원을 깊이 신뢰하는 후원세력이 될 것이다. 이런 일반 국민 속 후원세력이 폭넓게 존재한다면 어느 누가 감히 법원의 무죄판결에 대해 가시 돋친 발언을 함부로 하겠는가.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판사로 하여금 생각하는 대로 판결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판사가 무죄로 판단하는 사안을 유죄로 선고하거나 그 반대의 일을 하는 순간 법치주의도, 국민의 기본권 보장도 모두 허사가 되는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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