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속에서 새해를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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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속에서 새해를 맞으며
  • 임정수
  • 승인 2010.01.08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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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수 법무법인 충정(구. 한승) 변호사 / 전 고등법원판사

 

새해 첫 출근을 하러 집을 나설 때는 그저 눈이 조금 많이 온다고 생각했다. 집을 나서서 큰 도로로 접어든 뒤에야 교통 상황이 대단히 심각한 줄 처음 알았다. 해가 이미 뜬 도로에서 잠깐 동안에 차량 소통이 급격히 나빠지는 상황을 직접 볼 일은 과거에 없었고 앞으로도 매우 드물 것 같다.


회사나 각종 단체의 시무식이 기상과 도로 사정으로 늦춰지거나 참석률이 낮은 상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청와대의 업무보고는 장관 몇 분이 늦으셨고 어떤 기관의 시무식은 행사를 주재해야 할 기관장이 도로 상에서 휴대전화로 인사말씀을 하셨다고 신문에 보도되었다. 어쩌다 중국 연태까지 가서 사는 고향 친구는 저녁 먹자고 약속해 놓고는 그곳도 눈 때문에 계속 공항만 갔다 왔다 하고 있단다.


눈으로 길이 막힌 도로에서는 평소에 잘 느끼지 못하던 일이 벌어지기도 한다. 별 고저차 없이 평탄한 길이라고 생각했던 도로가 실제로 조금이라도 내리막인지 오르막인지에 따라 차량 통행에 엄청난 차이를 나타냄으로써 개인의 주관적 인식과 무관하게 객관적 진실이 얼마나 엄연한 것인지 여실히 보여준다. 중소형 승용차에 채용된 전륜구동 방식이 아니라 후륜구동 방식의 고급 대형차들이 무용지물, 애물단지가 되는 일도 눈길 위에서가 아니면 보기 어려울 광경이다. 길가에 버려진 차들은 하나같이 국산 혹은 외제 최고급 승용차들이다. 그 다음날도 도로 상에서 운행되는 고급 승용차들을 보기 어려워 우리나라가 폭설과 함께 갑자기 가난해진 느낌이 들 정도다.


이처럼 눈으로 뒤덮인 연말과 연초를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보내셨고 또 어떻게 보내고 계신지요? 저는 (혹시 여쭈어 보실 분을 위하여 말씀드리자면) 잘 있습니다. 달력의 검은 날은 작년 말일에 일과시간 막바지까지 촌각을 다투며 상고이유서 하나 써서 제출했었고 새해에도 휴가 하루 갈 형편이 못되지만, 색깔이 다른 날은 업무를 완전히 잊고서 아주 행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람이 행복과 만족을 느끼는 계기와 대상은 일생 동안 적지 않게 변화하는 것 같다. 요즘의 필자는 책벌레였던 30년 전의 중학생으로 돌아가 그 때 보았어도 좋았을 시시한 책을 들고 앉아 몰두할 때가 참 행복하다. 내 추억이 다른 누구의 추억보다 소중하듯이 내 방식의 행복 추구가 나에게는 가장 중요하다(물론 오로지 나에게만 가장 소중한 것인 줄 알고 있다). 새해 벽두 꿀맛 같은 3일의 연휴를 동네 산에 잠시 눈 구경하러 간 때와 동네 개울가 자전거 도로와 공원을 오가며 눈 위에서 자전거를 탄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보냈다. 이 행복을 위하여 미리 친척 집에서 책을 여러 권 빌려두었었다.


지난 연휴에 본 책은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와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이다. 그 중 하나는 과거에 손에 들었던 것 같기도 한데, 형편없는 기억력이 책을 읽는 즐거움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책을 읽으며 느끼는 바가 세월의 흐름과 그 동안 쌓인 개인의 지식 및 경험에 따라 엄청나게 다를 것이므로, 기억력이 장애요인이 될 것 같지는 않다.


아마 청소년기에 두 도시 이야기를 읽었으면 인물들 사이의 애정관계와 한 남자의 숭고한 희생에 감동을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필자는 대법원 판례의 방론과도 같은, 작가 디킨스가 혁명 직후에 벌어진 파리 상황의 원인을 설명하는 일종의 간섭에 눈길이 끌린다. 작가는 그 시대에 이미, 왕과 귀족이 배려와 절제를 잊고서 구제도라는 거대한 악(惡)을 만들어 놓는 바람에 단두대에 수많은 사람의 목이 잘리는 새로운 악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고 보고 있다. 목로주점은 특별한 구석이 없는 한 여인의 생애를 당시의 사회현실과 잘 엮어서 작가의 애정도 증오도 충고도 비난도 없이 서술하고 있다. 물질적, 정신적 재산을 모두 탕진한 주인공 제르베즈는 오로지 굶어 죽는 것을 면하기 위하여 거리의 여인으로 나선다. 머리에 어깨에 그리고 얼굴에 지금처럼 눈은 쏟아지고...


신년 벽두는 포부와 덕담의 시기이다. 사회변혁에 대한 꿈, 사회개량에 대한 의지, 공존의 조건에 대한 모색과 같은 것이 포부라면, (체험으로 달성할 수 없는 부분은 책을 통해서라도 터득한)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을 바탕으로 한 관용의 정신과 자기반성의 힘에 의지할 때 더욱 가치 있을 것이다. 하여간 열려 있지 않은 옹졸한 정신은 바로 나 자신의 것부터 참 딱한 노릇이고 걱정거리이다.


나부터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존중의 마음에서 ‘오는 말이 고와야 가는 말이 곱다’고 할 것이 아니라 가는 말이 먼저 곱도록 노력하겠다. 연말에 휴대전화로 ‘이 문자 받는 분의 행복이 소원입니다’고 했더니 ‘그 문자 보낸 이의 행복도 소원이다’는 답신을 받았다. 이 글 읽으시는 독자께 새해 좋은 일 많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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