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쿨시대의 기초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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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쿨시대의 기초법학
  • 성낙인
  • 승인 2009.12.31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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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낙인 서울대 헌법학교수.한국법학교수회장

 

서양에서 유사 이래 4대학문으로 꼽히는 것이 철학, 신학, 법학, 의학이다. 이 중에서 철학과 신학은 인간의 본성을 도야하는 기초학문이다. 오늘날로 치면 문학, 철학, 사학을 일컫는 소위 문사철 부류다. 이는 우리나라에서 ‘서울문리대 정신’으로 상징되기도 하였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접어들면서 기초학문이 위기론에 처해 있다. 인간의 삶과 정신세계를 풍요롭게 하는 문사철은 설자리를 잃고 실용학문이 대학을 지배한다. 첨단과학기술이 미래의 세계를 이끌어 갈 것이라는 예견에도 불구하고 이공계보다는 소위 의(醫,) 치(齒), 한(韓)으로 쏠림현상이 심각하다. 대학진학 배치표도 이들 모두가 차지한 다음에 서울공대가 자리 잡는다. 아무리 실사구시도 좋지만 안락한 현세적 욕구에 내몰리는 듯하여 안타깝기 그지없다.


법학전문대학원이라 하여 한국형 로스쿨이 개원된 이후에 법학에서도 기초학문 위기론이 심각하게 대두된다. 법학은 인간의 삶의 모든 영역과 직결되는 학문인지라 가장 고전적인 기본3법인 헌민형을 비롯해서 상법?행정법?국제법과 같은 기본법의 영역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이 존재한다. 소위 특별법이라고 지칭되는 법학의 분야만 해도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이미 학부과정에서도 개설된 노동법, 사회보장법, 경제법, 환경법, 지적재산권법, 세법, 국제사법, 국제거래법, 증권거래법, 입법학, 인권법, 법경제학, 법사회학, 법여성학, 법의학 외에도 언론정보법, 엔터테인먼트 로, 법과 문학, 건축법, 법인류학, 협상론, 금융법, 국제투자법, 통일법 등등.


그런데 법학의 문사철이라 할 수 있는 기초법학이 로스쿨과 더불어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 법철학은 법학의 법학으로 예우 받은 게 엊그제 같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대 대학원 석박사 논문자격시험에 법철학은 필수과목이었다. 그만큼 법철학의 중요성을 인식한 결과다. 어디 그뿐인가. 로마법, 한국법제사, 서양법제사, 법사상사도 법학도의 소중한 일용할 양식이다. 법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을 성찰하고 인간존엄성을 고양하며, 법을 통해서 역사인식을 제고하고, 법을 통해서 인류의 사상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초법학은 로스쿨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해야 한다.


미국식 로스쿨에서는 3년과정 이후를 중시하지 않기 때문에 실용학문적 성격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법학자라 할 수 있는 로스쿨 교수들의 학력도 대부분 로스쿨 졸업학위(JD)에 그치고 있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최근에는 법학교수 중에 JD학위 이외에 다양한 박사학위(Ph.D) 소유자도 대두되고 있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우리의 로스쿨 학제가 아무리 미국식이라고 하더라도 전통적인 대륙법학의 맥을 이어가야 하기 때문에 미국식 법학자 배출 시스템에 머무를 수는 없다. 로스쿨 졸업생들 중에는 아쉬워할지도 모르지만 로스쿨을 졸업하면 전문법학석사 학위를 부여한다. 이에 따라 서울대 로스쿨에서는 전문법학박사 학위과정을 개설하고 있다. 로스쿨 졸업 후에 보다 전문적인 영역에서 연구를 계속하고자 하는 법학도는 박사학위를 취득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취지다. 로스쿨 졸업 후 학부에서의 다양한 전공을 살려서 전문화할 수도 있겠지만 3년 과정에서 법영역에서의 전문화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법학교수 충원에 있어서도 다양한 방안이 강구되겠지만 원칙적으로 전문법학박사 학위 소지자가 우대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히 기초법학 교수요원은 박사학위 소지자여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로스쿨 이후에 법학이 단순히 실무과학이라는 우려를 씻어내고 학문으로서의 법학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법조실무도 중요하고 실정법이론도 중요하지만,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내다보는 투철한 역사인식과 철학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기초법학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기초법학은 로스쿨뿐 아니라 박사과정을 통해서 더욱 빛을 발하고 법학도의 산소와 같은 영양소의 공급원이어야 한다. 박병호 같은 법사학자, 심헌섭 같은 법철학자, 최종고 같은 법사상가. 최병조 같은 로마법학자가 로스쿨시대에도 계속해서 배출될 수 있는 법학의 학문적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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