똘똘이의 어떤 하루(38)-“겨울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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똘똘이의 어떤 하루(38)-“겨울 여행”
  • 법률저널
  • 승인 2009.12.24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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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무 39기 사법연수생 ryan310143@hanmail.net
  

대학 시절 전 ROTC 학군사관 후보생이었습니다. 비록 임관을 앞둔 시점에 고시공부를 위해서 그만두고 나왔지만 대학시절 내내 후보생의 신분으로 학교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원래 제 계획은 이랬습니다. 집에서 내 고시공부 뒷바라지를 해줄 수 없으니 장교로 군에 가서 월급을 모아 제대 후 그 돈으로 공부를 한다. 계획은 이렇게 세워두고 학부시절 전공이었던 영문학과 행정학을 공부하면서 일과 후에는 늘 법서를 깨작대면서(정말 지금 생각해도 깨작대던 것이 맞는 것 같습니다) 기본 3법이라도 보기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학기 중에 그렇게 대충 깨작댄다 하더라도 방학 동안 4주간의 군사훈련을 마치고 나면 정말이지 머릿속은 백지로 변해있었습니다. ‘어차피 군대 제대 후에 공부할거니까 언젠가는 되겠지’하는 생각으로 깨작대던 생활을 반복하던 중에 3학년 겨울방학이 다가왔습니다. 당시 학군단에서는 여름방학에는 4주, 겨울방학에는 2주간의 군사훈련을 받았는데, 무식하면 정말 용감한 걸까요? 문제는 제 무지함 아니 무식함에서 시작됐습니다.

 

달력을 보니 제가 동계 훈련을 마치고 나오면 약 한달 반 정도 후에 사법시험 1차 시험이 있더군요. 당시에는 말 그대로 헌·민·형을 잡지 보듯이 순수 1회독을 한 정도였는데 지금의 아내인 당시 여자 친구가 제게 그러더군요. “모든 국가시험 1차는 기출문제 5년 치만 벼락치기하면 합격할 수 있으니까 훈련 끝나고 1차 시험이나 한번 봐봐“ 저는 이 말을 듣고 여자 친구에게 원서접수를 부탁했고, 훈련을 마치고 한달 반 정도의 시간이면 정말이지 사법시험 1차를 준비하는데 충분한 시간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무식한 생각이었죠.

 

어쨌든 훈련을 무사히 마친 후, 일주일 정도 여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고 전 기출문제집과 기본서만 달랑 들고 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저나 여자 친구나 사법시험 1차를 워드 1급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주변에 고시 공부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그만큼 정보가 없어 무식했던 거죠. 하지만 그 무식함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헌·민·형 모두 뭘 알아야 기출문제를 봐도 이해를 하고 암기할 수 있을 것인데, 기출문제를 풀고 답지를 보아도 도대체가 이해할 수도 없을뿐더러 무슨 판례를 암기하고 어디가 중요한 것인지 강·약 조절도 되지 않고 체계도 이해도 없으니 무조건 외우자는 전법도 소용이 없더군요. 시험날짜가 다가올수록 점점 초조해지고 제 무능력과 한계에 짜증만 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의미 없는 시간만 보내다가 시험날짜는 바로 코앞으로 다가왔고, 전 또 다시 고민에 빠졌습니다. 시험장에 들어가서 0점을 맞더라도 시험을 볼 것인가 아니면 그냥 포기할 것인가.

 

그렇게 도서관에서 의미 없는 고민만 계속하다가 전 시험 전날 밤 수중에 있는 7만원을 들고 어머니의 소형차를 훔쳐 무작정 동해한 겨울바다를 향해 떠났습니다. 그것이 제 평생 잊을 수 없는 겨울여행의 시작이었죠. 고속도로에 진입하니 라디오에서는 강원도에 폭설주의보가 내려졌다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나오더군요. 태어나서 한번도 ‘폭설주의보’의 ‘폭설’의 의미가 무엇인지 경험해 본적도 없었고, 당시 저에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지금의 이 괴로운 심정을 겨울바다를 보면서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뿐이었죠.

 

그러나 고속도로를 달려 원주에 이르니 폭설이 무엇인지 무섭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야 말로 폭설, 눈발로 인해서 정말이지 1미터 앞도 보이지 않았고 와이퍼를 제일 빠르게 작동시켜도 무용지물 이었습니다. 정말이지 이건 눈이 아니라 공포영화에 나오는 수만 마리의 벌레들이 제 차를 향해 돌진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대로 고속도로를 달리다가는 다른 차와 충돌해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온몸으로 전해지더군요. 즉시 비상 깜박이를 켜고 전조등을 상향등으로 계속 깜박이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며 시속 30킬로로 서행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운전이라고 해봐야 시내에서 왔다 갔다 한 것이 전부여서 도저히 이대로는 운전할 자신이 없어 저는 원주 시내로 들어갔습니다. 들어가자마자 제일 먼저 보이는 허름한 여관에 차를 주차하고 짐을 풀었습니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후 침대에 누워 창밖을 바라보니 계속해서 눈은 펑펑 쏟아지고 집에서는 위험하니 빨리 돌아오라는 전화만 계속 오더군요. 무거운 마음을 훌훌 털어버리려고 떠난 여행에서 마음만 점점 더 무거워졌습니다. 잠을 청하려 해도 잠은 오지 않았고 머릿속은 더 복잡해져만 갔습니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자니 왠지 패배하고 도망치는 겁쟁이 같았고, 그대로 가자니 밖에 내리는 눈발을 이겨내기에는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는데 새벽 4시쯤 되었을까요. 창밖을 보니 금방이라도 집어 삼킬 것 같았던 눈발도 진정세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저는 또 다시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이대로 계속 동해바다를 향해 떠날 것인지 아니면 집으로 돌아갈 것인지. 딱 30분 동안 천장을 바라보며 고민을 하던 끝에 전 동해바다를 향해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 즉시 차를 몰고 동해바다를 향하는데 고속도로 입구에 경찰차가 서 있더군요. 경찰관에게 문의한 결과 월동장비 없이는 운전하기 힘들 것이라는 답을 받았지만 그래도 한번 결심한 이상 떠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조심조심 살얼음을 기듯이 동해바다를 향해 핸들을 돌렸습니다. 눈은 그쳤지만 제설작업이 되지 않아 도로는 말 그대로 스케이트장 같았고, 간혹 제설작업을 시작하는 트럭이나 화물을 운반하는 차량이 있었을 뿐 마치 전세라도 낸 것처럼 고속도로는 한산했습니다. 그렇게 무서운 초행길이었지만 전 아직도 그 길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새벽녘 동이 틀 무렵 아무도 없는 눈 덮인 하얀 고속도로. 비록 언제 어느 순간에 사고가 날지 모르지만 하얗게 눈 덮인 고속도로에 제가 제일 처음으로 길을 내고 있었고, 고속도로 양 옆을 둘러싼 산들은 온통 하얗게 덮여있었습니다. 지금도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는 그 풍경을 여러분께 말로 글로 설명해 드리지 못하는 제 무능력에 또 화가 날 뿐입니다.

 

그렇게 천천히 오랜 시간을 달리고 달려 저는 무사히 동해안 해안도로의 겨울바다를 볼 수 있었고 무겁던 마음도 홀가분하게 떨쳐 버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겨울방학을 마무리하고 4학년 1학기, 행정학 수업시간에 평소 존경하던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삶의 주변에 일어나는 소소한 일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클 수 있는 그런 일들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 어떻게 본인 스스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교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 남들이 모두 위험하다며 가지 말라고 하는 길, 포기하지 않고 천천히 가다보면 남들은 볼 수 없는 멋진 풍경도 볼 수 있고, 언젠가는 내가 원하는 그곳에 갈 수 있겠지. 원주에서 동해안 겨울바다를 보러가던 그 때처럼...’ 그런 생각을 한 학기 내내 했던 것 같습니다. 결국 4학년 여름방학 하계 군사훈련을 마치고 전 정든 학군단을 나와 언제 끌려갈지 모르는 군미필의 휴학생 신분으로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제 겨울여행 이야기 어떤가요. 너무 비약적인가요. 그렇지만 저에게는 정말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고 결정적으로 학군단을 그만두고 고시공부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되었음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아마도 여러분 모두 스스로 되돌아보신다면 누구나 한 번 쯤은 저와 같은 경험이 모두 있을 거라 생각됩니다. 다만 아직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이겠죠. 이제 곧 크리스마스입니다. 아마 대다수의 수험생들은 법령특강이다 판례특강이다 학원에서 준비한 특강을 들으시느라 정신이 없으시겠지만 훗날 합격하시고 뒤돌아 봤을 때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뜻 깊은 성탄절 보내시기 바랍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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