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그리샴의 법정소설과 사법제도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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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그리샴의 법정소설과 사법제도 단상
  • 임정수
  • 승인 2009.12.11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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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수 법무법인 충정(구. 한승) 변호사 / 전 고등법원판사

 

근 10년 전에 존 그리샴의 법정소설을 우연히 접하게 되어 한 동안 제법 읽었다. 그 무렵 대법원에서 파견하는 해외연수 대상자로 선발되기 위해서는 제법 높은 토플 점수가 필요했다. 고등학교 교실을 떠난 후 영어를 할 기회나 필요가 전혀 없이 지낸 30대 중반에 새로 하는 영어 공부는 무척이나 따분하고 의미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다 후배 판사가 영어 소설책을 탐독하는 것을 알고서 ‘재미 삼아 보면 저절로 공부가 되겠다’는 생각에 1, 2권 빌려본 것이 시초였다. 그 후 미국 로스쿨에서 연수를 받으며 지역 도서관 도서 판매행사에서 또 여러 권을 사 모아서 틈틈이 읽게 되었다.
그리샴이 우리나라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생활을 했더라면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는 여러 편의 법정소설을 그처럼 흥미진진하게 쓸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아무리 명필이 붓을 가리지 않다고 하지만, 우리의 사법제도가 우연성과 예측불가능성이 적절하게 가미된 극적인 소설을 쓰기에는 아무래도 미국보다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법정소설은 대개 오래 전의 라디오 드라마 『법창야화』처럼 ‘이렇게 저렇게 범죄를 저지르고 결국 처벌 받고 후회하더라’는 내용이 되고 마는 것 같다. 우리의 사법제도 하에서는 범죄를 저지르고 거짓말과 증거 은닉의 방법으로 처벌을 안 받아도 이는 범죄를 조장하는 문제성 있는 작품이 되고, 당해 사건을 맡는 사법기관의 허점이나 담당자 개개인의 부정 내지 비리를 예측불가능한 극적인 요소의 중심으로 삼아도 당장 명예훼손 시비가 일 것이다. 이와 달리 종국에 진실을 드러내되 법이 보장하는 방법으로 처벌을 안 받거나, 개개인이 아니라 사법제도 자체가 예측불가능성을 용인하는 경우에는 작가가 서술에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고 독자도 윤리적 판단에서 벗어나 편안하게 소설의 재미를 느끼게 된다.


필자가 보기에 그리샴과 같은 미국 법정소설 작가들이 소재로 가장 많이 활용하는 미국의 특징적 사법제도는 배심재판(jury trial)과 징벌적 손해배상(punitive damages)인 것 같다. 둘 다 독자의 이웃일 수도 있는 일반 시민이 유, 무죄의 판단이나 손해배상의 규모를 정해주므로 전문 법관이 그 결과에 대해 책임을 지거나 비난을 받을 필요가 없다. 선거 후 항상 나오는 언론의 평가처럼 ‘국민의 선택은 현명한 것’이니까, 독자도 배심원의 판단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으로 의제하고 (즉, 그 판단이 옳은지 그른지 가리려고 혼란스러워 하지 말고) 그 결론에 의해 정의가 실현되거나 주인공이 향유하고 구제받는 것을 즐기면 된다.


최근 몇 년 간 사법개혁이라는 구호 아래 그 전에는 없던 제도들이 생기면서 배심재판도 우리나라에 국민참여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제한적으로나마 도입이 되었다. 이 달 초에 광주지법에서, 산후우울증으로 시달리던 여성이 생후 7개월 된 아들을 자신의 집 거실에서 이불로 덮어 질식사시킨 사건의 재판에서 배심원들은 무죄를 선고하고 직업 법관으로 구성된 재판부는 유죄를 선고하였다고 한다. 이는 우리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들의 평결에 대하여 재판부에 대한 권고적 효력만 인정하고 구속적 효력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미국 같았으면 배심원들의 무죄 평결이 곧바로 효력이 생기고 이에 대한 검찰의 항소도 이중위험(double jeopardy)의 금지 때문에 허용되지 않게 되므로 우리와는 엄청난 차이가 있게 된다. 우리 국민참여재판은 그 결론과 관련하여 직업 법관 개인에 대한 평가를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아직 법정소설의 관점에서 활용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은 민사상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때에 일정한 경우 가해자에게 피해자의 손해만이 아니라 때로는 거액을 형벌적 의미로 포함시켜서 배상하게 하는 제도이다. 어느 패스트 푸드점에서 커피 물의 온도를 (그래야 100℃를 넘지 못할 터인데) 지나치게 뜨겁게 하여 고객에게 열상(熱傷)을 입혔다는 이유로 배심원들이 수백만 달러의 징벌적 손해배상을 명한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제도가 채택되어 있지 않고 대법원 판례가 이 점을 분명히 밝힌 적도 있다. 아마 앞으로도 국민 정서는 물론 법조인들의 의식을 고려할 때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울 것 같다.


참, 우리에게 없는 유죄협상제(plea bargaining)가 있었기에 『The Partner』의 주인공은 거액의 보상금을 챙기고 형사처벌을 면할 수 있었다. 몇 년 전 대법원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이 제도를 경미범죄에 한하여 시범적으로 도입하자고 주장하신 분도 계셨다.


결국 어느 나라의 사법제도가 우월한지는 재판 과정에서 인권이 충분히 보장되고 결과가 진실에 부합하며 비용 측면의 효율성이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비록 글을 쓰는 작가들에게 좋은 구상과 소재를 제공하지 못하더라도 말이다. 어서 빨리 우리 사법제도가 훌륭하게 정착되고 우수한 법정소설이 양산되어 둘 다 외국으로 수출하는 때가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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