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숙자 시인의 잉크(22)-내가 염색하지 않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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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자 시인의 잉크(22)-내가 염색하지 않는 이유
  • 법률저널
  • 승인 2009.10.30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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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비닐우산을 좋아한다. 그 가운데서도 무색투명한 우산을 선호하며 펼쳤을 때 비닐과 우산살이 가볍고 팽팽하게 조율되는 유대감을 친애한다. 꼬부라진 손잡이까지가 투명하다면 그야말로 happy~ happy~ 금상첨화다. 비닐우산에는 헝겊우산이 소유치 못한 장점이 있다. 그 첫째는 하늘을 열어둔다는 점이고, 둘째는 빗줄기가 착지하는 현장을 공개한다는 점이며, 셋째는 방울방울 빗방울 소리를 가장 맑게 퉁겨준다는 점이다. 불투명한 헝겊우산을 받쳐 들고 걸을라치면 우선 하늘이 가려지고, 또르르- 또르르- 미끄러지는 빗발을 감상할 수 없을 뿐더러 빗방울 하나하나에 담긴 천상의 전언 또한 둔탁한 음색으로 들어야 한다.


빗방울은 하늘의 봉인된 음률이다. 어디 떨어지느냐에 따라 각기 다른 소리를 낸다. 양철지붕 두드리는 소리와 후박나무 잎에 내려앉는 소리, 보도블록에 부딪히는 소리가 똑같을 리 없다. 지면에 닿는 순간 빗방울에 담긴 음운들이 본래의 음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일단의 파열 후에는 신(神)의 음표가 아니라 지상에 합류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빗방울은 이내 ‘물’이 되어 달리거나 호수를 이루거나 출렁출렁 거센 바람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나 무한비탈을 모른 채 사뿐사뿐 뛰어내리는 연둣빛 빗방울소리! 일회뿐인 그 점묘를 최대한 투명하게 보고 듣고 간직하고 싶은 소회가 나로 하여금 살뜰히 비닐우산을 챙기게 한다.  


저녁 설거지를 마친 뒤 비닐우산을 쓰고 가로등 푸른 길을 홀로 걸었다. 산책로란 둘이 걸으면 다정하고 혼자 걸으면 청아하다. 조촐히 내리는 가을비가 구깃구깃 눌린 일상을 가지런히 펴주었다. 먼 곳에서 출발한 빗줄기들이 가로등 광선속으로 쉴 새 없이 날아들었다. 그 빗발들을 우러르면서 나는 문득 속도를 봤다. 줄기줄기 빗줄기는 비의 줄기가 아니라 속도의 형상이었던 것이다. 방울방울 빗방울 소리도 비의 소리가 아니라 속도의 파장이었던 것이다. 얼마나 먼 곳으로부터, 얼마나 빨리 떨어지기에 그토록 작은 물방울이 그리 커다란 소리를 낼 수 있단 말인가. 점(点)을 선(線)으로, 부피를 소리로 변환할 수 있단 말인가.

 

이슬 한 점 크기의 물방울에 속도가 가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시야에 직선이 제시될 수 있었을까. 이슬 한 점 무게의 물방울에 속도가 더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귓전에 리듬이 피어날 수 있었을까. 이슬 한 점 질량의 물방울에 속도가 합해지지 않았다면 우리의 눈앞에 ‘빗발꽃*’이 만개할 수 있었을까. 우리를 다독이는 빗소리 속엔 속도의 뼈대가 실렸음이다. 우리를 쓰다듬는 빗소리 속엔 속도의 실황이 담겼음이다. 우리를 사랑하는 빗소리 속엔 속도의 전모가 찍혔음이다. 한 점 빗방울, 한 획 빗줄기, 한 촉 빗발꽃 속에 (그토록 진지하고 올곧은) 보이지도 들리지도 만져지지도 않는 물리가 율동과 여운을 공그르고 있었다니!


내가 맨 처음 물방울 소리에 눈을 떴던 건 두레박에서 떨어지는 우물물 소리였던 것 같다. 예닐곱 살 적, 우물의 운두에 배를 걸친 채 간신히 끌어올렸던 두레박. 이리 능청 저리 휘청 내벽에 부딪히며 눈물 흘렸던 두레박. 그 무거운 두레박에 딸려 내려가지 않으려고 깨금발로 힘을 잡던 내 무릎은 오늘에야 식은땀이 난다. 상큼하고 깊은 그 우물물 소리 아니었던들 나는 끝내 물방울 소리의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했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꼭이 명랑한 빗방울 소리가 아니어도, 물 위에 새겨지는 물방울 소리가 아니어도 향맑은 자연은 지키고 남겨야 할 지구의 재산이다. 하늘에서 오는 몸 치고 깨끗하지 않은 몸이 있던가.


나에게 고삐 매인 나 자신 또한 이 땅에 올 때의 모습 그대로 반납해야 될 물방울이다. 그 수신처가 우주공간이든 절대자의 품이든 매한가지다. 비단 먹고 입고 배설하는 본능적 차원을 넘어 영혼의 범주까지를 아울러야 하리라. 진정 우리를 시원케 하는 ‘물’이란 개개인의 ‘됨됨’을 일컬음이니 물과 같은 순수가 곧 회복해야 할 본성이요 진면목일 것이리라. 아무튼 나는 그런저런 코에 걸려 최소한의 염치나마 지키기로 자신과 약속했다. 비닐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강물과 수평선, 빗발꽃과 물별*들을 애호하는 자로써 한 바가지의 물일지언정 덜 쓰고 덜 흐리자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리고 부지불각 30년을 노 저어왔다.

 

그동안 내 외양과 정신력은 서로 반비례했다. 30년 동안 가윗날을 들이지 않은 모발은 강물빛이 되었고 생존칙을 곱씹은 갈빗대는 독야청청 야위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도달점이 다른 외유(外柔)와 내강(內剛)의 금슬이 좋다. 자아는 늙음을 비난하지 않고 늙음은 자아를 탓하지 않는다. 두 변의 합일에서 비로소 참다운 개성과 자연주의가 각을 이룬다. 그런데 이제 쉰여덟의 나에게 칠십이냐고 타진하는 풍월객도 종종 접한다. 머리터럭에 염색을 하지 않은 까닭이다. 뿐이랴 커트도 no, no, no 뒤통수에 느슨히 틀어 올렸으니 무심한 할머니로 짚이는 건 당연한 일. 그렇지만 괜찮다! 나는 강물을 사랑하므로 염색하지 않는 것을!


나에게 있어 지구는 마구 밟아도 좋은 대상이 아니라 오랜 벗이고 믿을만한 가슴이다. 적으나마 그를 위한 정성 없이 어찌 붕우유신을 논할 수 있으리오. 내가 검고 독한 염색약을 때때로 하수구에 흘려보낸다면 강물 앞에 떳떳치 못할 것이다. 세월 따라 나이가 많아짐은 든든하고 고마운 일. 아이에게 지혜를 빌려줄 만하고 이 풍진 세상을 떠날 날도 가까워진다. 어느 하룬들 고뇌 없이 거저 다가오고 물러갔던가. 고뇌보다 값진 게 어디 또 있더란 말인가. 고뇌를 통해 우리는 겸손?겸허?겸양을 배우고 성찰을 만났으며 분별력을 배양시켰다. 나이는 다종다양한 경험의 곳간이자 증거이거늘 왜 굳이 젊어 보이려 발버둥치겠는가.


나는 지금 당장 삼사십 년을 돌려준다 해도 정중히 사양할 것이다. 청춘-그것은 미숙과  혼돈, 무모한 용기 외에 뭣이었던가? 나는 이전에 그랬듯이 이후로도 한 살 한 살 느는 나이를 따뜻이 영접하고 송별할 것이다. 월 단위로 주름이 늘고 시시각각 무서리가 정수리를 장악할지라도 거울 속의 자연을 친근히 바라볼 것이다. 쉰아홉에는 쉰아홉이, 예순에는 예순이 내 안에서 찬찬히 살고 가게 할 것이다. 5년 혹은 10년을 젊어보이게 꾸밈으로써 나를 찾아온 나이들을 공중분해 시키지 않을 것이다. 내 몸과 내 나이는 나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짝패이니 무슨 까닭으로 거짓젊음을 차용하겠으며 그 초조한 작위를 선호하리오.

 

*빗발꽃: 이 명사는 이 지면에서 갓 태어난 신조어임을 밝힌다. 공중에서 출생한 빗방울들의 낙하와 속도, 착지까지를 포착하는 과정에서 얻은 덤이다. 곰곰 돌이켜보니 바닥에 내려서는 찰나 부서져 튀는 빗방울-빗줄기의 문양을 ‘어떻게 압축할까’ 얼핏얼핏 생각한 건 꽤 오래된 일인 듯싶다. 한 알의 씨앗도 온도/습도가 알맞았을 때라야 떡잎을 틔운다. 하물며 대자연을 명명하는 언어이랴. ‘빗발꽃’은 아마도 태초 이래 오늘을 기다려 왔던가보다. 비닐우산에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는 내 소녀시절부터의 행복이건만, 이미 귀향했을 그 빗방울들도 이심전심 화답하고 싶었나보다. 자연은 필히 무한사랑으로 사랑을 갚는가보다.


*물별: 이 명사 또한 내 신조어 제1호다. 1988년 출간한 첫 시집 『하루에 한번 밤을 주심은』에서부터 써온 단어다. ‘물결에 햇빛이 정맞았을 때 생기는 섬광’을 지칭하는 낱말이다. 이 신조어를 발표한 지 올해로 21년째, 사용하는 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국립국어원에 진즉 자료를 제출했지만 전 국민의 일상어가 된 다음이라야 국어사전에 채록(採錄)할 수 있다는 답변이 생생하다. 문인은 문학작품을 생산하는 자이며, 국어를 빛내고 발굴/창조하는 자이기도 하다. 선대의 선비들도 심사숙고 언어를 뒤지다가 대자연의 면면에 이름을 부여했으리라. 그 뒤를 따르는 나도 문인으로서의 임무를 다소나마 수행하고 있는 게 아닐까.  


※이슬주의: 오늘은 내친 김에 내 생활 속의 ‘이슬주의’마저 꺼내야겠다. 이슬은 제 몸을 온전히 풀잎에 부어주고 떠난다. 그러나 풀잎 어디에도 얼룩 한 점 남기지 않는다. 그 외연과 내포의 일치를 나는 ‘투명’이라 부른다. 언감생심 만만분의 1을 본뜰 수 있으랴만 감히 경외감을 빌어 ‘이슬주의’로 도입했다. 내 이름에 맑을 숙(淑)자가 섞여서일까. ‘숙’자에 삼수변이 흘러서일까. 물별, 빗발꽃, 이슬주의가 물과의 지극한 인연이다. 내 떠나고 없을지라도 명멸하는 ‘물별’들은, 송이송이 ‘빗발꽃’들은 가끔씩 나를 기억해줄까. 어느 비닐우산을 연주하는 빗방울들과 밭두둑 이슬들도 꿋꿋이 고독했던 한 시인을 아스라이 떠올려 줄까. ▩

 

정숙자 시인은 1952년 전북 김제 출생으로 1988년 <문학정신>으로 등단했다. 1992년 동국대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했으며, 1997년 대산재단 창작지원금 수혜를 받았다. 2006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우수문학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2008년 들소리문학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는<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 <밝은음자리표>가 2008년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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