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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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9.08.1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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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21그램, 그 신비한 영혼의 힘

 

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반면교사는 무엇일까?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훌륭한 교사이고 교육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경건해지고, 죽음 앞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삶을 반성하기 시작한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처럼 아등바등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지척에 다가와 있는 자신의 죽음을 바라보며, “아, 인생이 결코 삶만이 있는 것은 아니로구나.”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게 한다. 죽음은 정 들었던 이를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을 느끼게 하고, 추억을 반추케 하며, 잘못해준 것에 대해 아쉬움을 남긴다. 남은 자들에 대한 연민과 미안함 또한 느끼게 한다.


죽음은 평소에는 철저하게 남의 일이었다가 가까운 지인의 죽음을 접하거나, 자신이 죽음의 문턱을 넘는 일을 겪으면 이보다 더 심각한 자기 일이 있을 수 없다. 나는 12년 전에 대형교통사고를 내었던 적이 있다. 아내와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던 아들, 고등학교에 다니던 조카를 태우고 지금처럼 도로가 넓어지기 전의 편도 1차선이던 영동고속도로를 과속으로 달리다가 사고를 낸 것이다. 추운 겨울철이라 도로가 얇게 얼어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경사진 커브길을 과속 주행하다가 절벽 아래로 차가 추락하고 만 것이다. 추락 당시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차의 모든 유리창이 깨어지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아들이 차 밖으로 튕겨나가고 차안의 시디박스가 완전히 떨어져나갔다. 물론 차문도 열리지 않았고 본네트 안에서는 시꺼먼 연기가 피어올랐다. 영화 속에서 본 한 장면처럼 금방이라도 차량에 화재가 발생할 것 같았다. 당시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느껴야 했던 공포심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아들 아이는 절벽에서 “아빠, 아빠”하고 절규하고 있었고, 사고의 충격으로 실신해 버린 아내는 승용차 안에서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조카는 아파 죽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나로서는 어떻게 손을 써야 할지 당황스럽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절벽 쪽으로 100미터 이상을 날아가면서,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아, 이렇게 죽는구나” 하는 생각에 잠기며, 내가 평생 믿고 살아온 하나님께 “얼굴만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하고 기도를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죽음과 맞닥뜨렸던 그 짧은 순간에 왜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아마도 이 세상에 남겨질 내 마지막 모습이 여기저기 상처투성이에 피 흘리는 모습으로 기억되어지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신기한 것은 그렇게 대형사고가 나고, 수리비만 2,800여만 원이 들 만큼 차량이 대파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절벽 밖으로 날아간 아들 녀석도 멀쩡했고, 아내도 실신했을 뿐 별다른 상처가 없었고, 아파 신음하던 조카 녀석도 별 큰 상처가 없어 그 다음날 곧바로 퇴원할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교통사고처리를 위해 현장에 출동했던 경찰관은 그해 한해에만도 14번의 교통사고가 똑 같은 장소에서 발생했는데, 이렇게 대형사고에 사람이 다치지 않은 경우는 처음 본다고, 오히려 안 다친 것에 어이없어 했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죽음을 만날지도 모르는 하늘을 날았던 그 절체절명의 짧은 순간, 나의 유일한 기도가 “내 얼굴을 다치지 않게 해 주세요”였다는 것이 두고두고 나에게 “삶의 화두”가 되었다. 얼굴을 다치지 않게 해달라는 나의 간절한 기도가, 내 마음과 영혼을 다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가 되었고, 더불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로 발전하였기 때문이다. 교통사고 났던 그날을 나는 제2의 생일로 기념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나는 과속운전을 하지 않게 되었고, 나와 남에게 조금 더 관용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직도 많이 미흡하고 부족하지만, 마음을 추스르고 여유로워지기 위해 내 자신의 욕심을 줄이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많이 부족하고 또 부족함을 잘 알고 있다.


무더운 여름, 장순금 시인의 서늘한 시 한 편을 읽는다. “사람의 영혼을 무게 달아 보았더니 21그램이라고 한다//그 동전 너댓 개 정도의 무게에 내 한 생이 끌려 다녔다니!//그 가벼운 힘이 휘두른 사랑의 칼날에 피 흘리며 죽음의 문턱에 쓰러졌던가,//저울의 눈금이 출렁, 기울어지는 몸의 2천분의 1도 안 되는 무게가/두근거리며 사랑한 비밀한 몸의 정수리에 떡하니 앉아/뜨거운 피 오르내린 골목을 들여다보고 있었다니//영혼에 경배하고 높은 곳으로만 끌고 다녔던,/수백 톤의 고통을 끌어낸 시를 쓰게 한,/아, 21그램!//거대한 힘이 하늘에서 한 생에 잡고 있는 줄만 알았던,//아니다/21그램에 힘을 주신 그 거대한 힘//을,/언제 깨우칠까” (장순금 시인의 ‘아! 21그램’ 전문, 시집 햇빛비타민에 수록)


사람이 죽는 순간, 영혼이 빠져나가는 순간 몸무게가 21그램이 줄어든다고 한다. 장순금 시인은 아마도 영혼의 무게를 21그램이라고 표현하고 싶었나 보다. 평생 신과 인간, 대지와 인간, 인간과 인간을 연결지우며 끌고 다녔던 영혼이 겨우 21그램이라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깨우치지 못한 21그램의 비밀을 인간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지난 7월 30일, 헌법재판소는, 학교 근처의 성당 내에 납골당 시설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한 학교보건법을 합헌이라고 결정하였다. 합헌 이유의 요지는, “우리 사회가 전통적으로 시신이나 무덤을 기피하는 풍토와 정서를 가지고 살아왔고 입법자는 이와 같은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감안해야 하며 학교 주변에 위치한 성당 내 납골시설이 학생들의 정서교육에 해로운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었다.


많은 이들이 경험했겠지만, 이웃 일본에만 가 봐도 마을 입구에서 납골당을 많이 보게 된다. 그들에게는 삶과 죽음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출근길에 들러, 퇴근길에 들러, 자신의 조상의 묘에 참배하고, 죽은 선조의 삶을 반추하며 자신의 오늘을 회상한다. 죽음을 일상 접하면서 일상의 삶을 경건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떠한가? 죽음은 죽어보기 전까지는 결코 상상조차 하기 싫은 기피 대상일 뿐이다. 그러니 죽음 뒤의 자기 모습을 어찌 상상이나 하겠으며, 죽음 뒤에 자기에게 내려질 평가의 잣대를 추측이나 하겠는가? 그러니 오늘 살아 있는 삶이 거칠고 추접스럽고 탐욕스럽더라도 하나도 이상한 것이 없는지도 모른다. 영안실이 들어선다고 해도 집단항의가 이어지고, 화장장이 들어선다 해도 집단데모가 벌어지는 님비현상을 헌법재판소가 합헌으로 손을 들어준 이상, 죽음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변하기에는 더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김대중 전 대통령께서 생사의 경계를 넘고 있는듯하다. 자식들과 측근들이 모이고, 평생 라이벌이자 동지이기도 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문병과 이명박 대통령의 문병이 이어지는 것을 보며, 삶과 죽음을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지난 8월 11일, 김대중 전 대통령을 문병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제 화해한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말해 화해의 뜻을 분명히 했다고 한다. 80대 후반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어가는 모습에서 80대 중반의 김영삼 전 대통령 역시 자기의 죽음을 보았을 것이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MB정부에 대한 독재정부라는 비판에 대해 “입을 다물라”고 극언을 퍼부었던 그 역시 죽음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다.


죽음 앞에서 “아,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고 후회했던 솔로몬 임금의 후회를,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이기도 했던 두 사람이 함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찌 그 두 사람뿐이겠는가?


어쩌면 이명박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 동안 수많은 전직대통령의 죽음을 보게 될지 모른다. 이미 가장 젊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았고, 이제 가장 연세 높은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을 가까이 대하고 있다.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노태우 대통령의 죽음을 멀지 않아 보게 될지 모르고, 연세 많으신 김영삼 전 대통령의 죽음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을 앞에 둔 전직 대통령들의 모습을 보며 살아 있는 이명박 대통령은 무슨 생각에 잠길까?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옛말이 하나 그르지 않다. 살아생전에 좀 더 착하게, 좀 더 선하게, 좀 덜 싸우고, 좀 덜 욕심내며 더불어 함께 따뜻하게 살아가는 세상이 되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 21그램의 영혼의 무게를 우리가 좀 더 무겁게 느꼈으면 싶을 뿐이다. 장순금 시인의 말처럼, 언제나 깨달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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