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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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
  • 법률저널
  • 승인 2009.07.31 1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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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후세의 역사가는 당신을, 참 웃겼다고 하지 않을까?

 

 

현대는 기록의 시대다. 모든 이들이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기록을 남긴다. 개인 블로그가 되었든 카페가 되었든 초등학생에서부터 은퇴노인에 이르기까지 개인별 관심을 가진 사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한다. 이런 萬人記錄의 시대가 오리라고, 사기를 쓴 사마천이나 자치통감을 쓴 사마광이 꿈속에서나마 생각을 했을까? 고려사를 집필한 정인지가 상상을 했을까? 아니면 사초를 잘 보관했다가 왕의 사후에 조선실록을 썼던 조선의 사관들이 예상이나 했을까?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각종 인터넷 게시판, 잡지나 신문 등에 칭찬을 남기기도 하고 독설을 남기기도 한다. 사랑과 감동을 전하기도 하고, 원망과 저주를 퍼붓기도 한다. 하지만 훗날, 이 모든 기록들을 사람들은 역사라 부를 것이다. 정사와 야사의 틈바구니에서, 후대 사람들은 이렇게 남겨진 기록들의 행간에서 오늘을 읽고, 이해하고, 평가할 것이다.


가치와 실리 중 어느 것을 취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세상은 가치에 더 높은 평가를 내리는 듯하지만, 가치라는 놈은 내일의 문제라 언제나 실리라는 현재의 놈에게 끌려 다니기 마련이다. 그런 까닭에 실리를 챙기며 오늘 호의호식하는 이보다 가치를 추구하며 내일을 꿈꾸는 사람은 현실에서 배고플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치라는 놈은 묘한 놈이라 역사 속에서 살아나 한번쯤은 제소리를 내니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


인간이라는 게 원래 약아빠져서 내 배 부르고 등 따뜻하면 만사가 형통이라, 남이야 배가 고프든 등이 시리든 내 알 바 아닌 것이니, 어떻게 오늘의 실리더러 내일의 가치를 배려하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실리는 가치에게 꼭 한 번은 지기 마련이고, 그 한 번 진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고 기록으로 남아 잊혀질 만하면 유령처럼 되살아나 실리를 묵묵히 쳐다보며 지긋이 웃고 있으니, 실리로서는 가치의 이러한 무저항적인 거울작전*에 속수무책이지 않겠는가? 배부르고 등 따신 이익에 비해 이런 거울작전을 가벼운 대응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잘려나가지 않는 도마뱀 꼬리처럼 질기고 성가신 대응이라고 해야 하나?


김훈의 “남한산성”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청나라가 조선을 침범한 병자호란 때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주화론자인 이조판서 최명길과 주전론자인 예조판서 김상헌이 목숨 다해 나누는 대화내용이다.


이조판서 최명길의 “제발 예판은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 라는 주장에 대해 예조판서 김상헌이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라며 목청을 높이는 대목이다.


주화론자 최명길은 광해군 6년에 그의 생모 공빈 김씨에 대한 폐모론의 기밀을 누설한 죄로 광해군에 의해 파직당한 후 경기도 가평으로 낙향하여 양명학에 빠져든다. 그리하여 양명학의 기본철학인 지행합일설을 깊이 깨달은 그는 지식과 실천이 마음(心)에 의해 합일된다는 지행합일을 실천하여 1623년 김유, 이귀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키는 역모를 꾀한다. 그리하여 광해군을 축출하고 인조를 즉위시킴으로써 정사공신 1등으로 완성군에 봉해졌고, 그 뒤 영의정까지 오르게 된다.


주전론자 김상헌은 광해군 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온 후 광해군으로부터 그의 생모 공빈 김씨를 공성왕후로 책봉하는 고명(誥命)을 지으라는 명을 받고, “허물을 보면 어질고 어질지 않은 여부를 알 수 있다”는 뜻을 담은 관과(觀過)라는 낱말을 사용하여 공빈 김씨를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 빌미가 되어 삭탈관직되었고, 그가 지은 사은전문(謝恩箋文)도 폐기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김상헌은 인조반정에 참석하지 않았으나, 역시 인조반정의 결과로 관직에 복귀하여 육조의 판서를 두루 거친 인물로, 청나라와의 주화(主和)를 배척하고 주전(主戰)을 주장하였다가 인조가 항복하자 파직되었다.


주전론자와 주화론자로 갈린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의 핵심은 “길”이다. 길이라는 것이 사람이 만드는 것이니 가면 길이요 가지 않으면 땅바닥에 불과하니 지금의 이익을 위해 청나라에 항복하자는 주화론자 최명길의 주장이나, 아무리 길이 많아도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니 죽기로 항전해야 한다는 주전론자 김상헌의 주장이나, 모두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길이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고, 길이 있어도 가지 말아야 할 길은 있기 마련이다. 길이 아닌 길로 들어섰다가는 죽기 마련이고, 가지 않음만 못하기 때문이다.

 
미디어관련법의 무리한 국회통과 후 이명박 대통령은 “결과로 보여주겠다.”라고 말했다. 청계천복원공사의 결과처럼 결과로 보여주겠다는 그의 생각은 옳은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그 말속에서 민주적 절차와 과정은 도외시하겠다는 잘못된 생각이 베이스로 깔려 있음이 느껴져 마음이 답답하다. 민주주의의 기본 절차를 무시하겠다는 뉘앙스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일사부재의 원칙을 위반한 방송법 등의 재투표통과에 대하여 그 정당성을 주장하는 한나라당 박희태 대표, 안상수 원내대표, 조윤선 대변인은 모두 변호사 자격을 가지고 있다. 변호사에게 있어 법은 정의로 작용할 때도 있고, 부정의로 작용할 때도 있다. 어떻게 보면 변호사에게는 아예 정의라는 게 없는지도 모른다. 원고측 소송대리인이 되느냐, 아니면 피고측 소송대리인이 되느냐에 따라 법해석을 완전히 반대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당인 한나라당의 공식창구 대표들이 변호사 출신이어서 여전히 변호사적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일까? 원고측 소송대리인이 되면 못 뚫는 방패가 없다고 해야 하고, 피고측 소송대리인이 되면 어떤 창에도 뚫리지 않는 방패가 있다고 해야 하는 변호사로서의 대응방법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한 상태여서일까? 왜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계속하여 법리를 호도하여 국민을 기만하고, 억지주장을 계속하는 것일까?


정치가야말로 없는 강에 다리를 놓아주겠다는 거짓말도 서슴없이 하는 거짓말쟁이라고들 하지만, 차라리 변호사라면 거짓말을 밥 먹듯 해도 되지만(?), 정치가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직역 아닌가? 정치가 뭐냐는 제자의 질문에 공자는 “정야정”이라고, 바르게 되는 것이 정치라고 답변하지 않았던가?


비정규직 해고를 못해 안달이 난 듯 백만실업대란을 앞장서 주도하는 듯한 이영희 노동부장관의 반노동자적 행정처리, 최시중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의 미디어관련법과 관련한 방송통신진흥회의 이사 선임을 둘러싼 맹활약(?)과 방송을 힘센 언론사에게 몰아주려고 애쓰는(?) 모습, 난장판 국회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미디어관련법을 멋지게(?) 통과시켜 국민적 후유증을 앓게 만든 이윤성 국회부의장, 미디어관련법의 잘못된 국회통과절차를 주도하고서도 이를 옳다고 반복하는 변호사 출신의 법률전문가인 한나라당의 박희태 대표, 안상수 원내대표, 조윤선 대변인 등에 대해 역사는 어떻게 평가할까?


당신들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참으로 올바른 결정을 하였다고 칭찬을 할까? 아니면 당신, 참 웃겼어 라며 황당하다고 할까? 그것도 아니면 작가 김훈처럼 “제발 길, 길 하지 마시오, 길이란 땅바닥에 있는 것이오, 가면 길이고 가지 않으면 땅바닥인 것이오.”라는 최명길과 “내 말이 그 말이오. 갈 수 없는 길은 길이 아니란 말이오.”라는 김상헌을 내세워 둘 다 충신이자 역적이라고 양비론을 펼치게 될까?


당신, 혹시 지금 웃기고 계시는 거 아닙니까? 나보고 웃긴다고요? 맞습니다, 맞고요, 내가 웃기지요. 그럼 당신, 한 번 웃어 보시겠어요? 목젖이 다 보일 때까지 한 번 웃어보세요. 시원하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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