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공개 논쟁, 인권이라는 불편한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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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공개 논쟁, 인권이라는 불편한 노력
  • 정정훈
  • 승인 2009.07.24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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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훈 공익변호사그룹 공감 변호사

 

나는 자칭 '인권변호사'다. 올초 부녀자 연쇄살인 사건의 피의자 강호순씨의 얼굴이 공개되자 몇몇 언론에서 변호사의 ‘코멘트’를 따기 위한 인터뷰 요청이 있었다. 처음에는 깊이 생각해보지 못한 문제라고 버텼다. 그러나 질문이 반복되고, 압도적인 찬성 여론을 보면서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겼다. 그렇게 인터뷰를 하고, 토론회에 참여하고, 신문에 기고도 했다.


얼굴 공개 논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여전히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현재 검사와 사법경찰관이 범행수단이 잔인하고 중대한 피해가 발생한 강력범죄에 대해 피의자의 얼굴과 성명, 나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특별법 개정안이 추진 중이다. 그러나 더 깊은 근본을 캐묻는 질문이 필요하다. 무엇이 인권이고, 인권이 문제 되는 상황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언론의 자유와 책임은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서도 묻고 대답해야 한다. 언론과 인권을 근본에서부터 다시 묻고 대답하는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다.


얼굴 공개에 대한 초기 95%에 가까운 국민 여론의 지지는 안타까운 현상이었다. 법률가들의 경우는 찬반이 팽팽하다며 전문가 의견을 시민들의 여론에 대립시켜 의미를 축소하는 방식은 부당했다. 그것은 엘리트주의로 가는 쉽고, 나쁜 길이다. ‘대중’을 적극적으로 사고했던 혁명가 그람시는 “상식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상식에 기초를 두고 출발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우리 사회가 공들여 도입한 국민참여재판도 국민의 건전한 법 상식을 신뢰한다는 제도적 확신의 표현이다. 얼굴 공개에 대한 시민의 법 감정을 사회적 관음증으로, 과격한 분노의 왜곡으로 치부해버리는 것은 스스로의 토대를 허무는 자기부정이 되기 쉽다. 결국 현재 시민의 법 감정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95%의 여론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무엇이 우리의 소통을 가로막고 있는가? 어떻게 시민들과 함께 합리적인 상식을 만들어갈 것인가? 우리는 사회적으로 대화가 가능한 언어를 가지고 있는가? 나는 그 희망의 언어를 ‘인권’에서 찾고 싶다.


강 씨의 얼굴공개 논쟁은 가해자의 인권과 피해자 가족의 인권이 대립하는 양상으로 진행되었다. 얼굴공개를 찬성하는 주장은, 피해자 가족의 분노를 조금이라도 고려한다면 ‘인간의 탈을 쓴 짐승’에게 인권은 사치라고도 했다. 그러나 연쇄살인범의 얼굴 공개 여부가 인권의 문제인 것은 ‘가해자-피해자’ 관계의 맥락이 아니다.


관계는 일면적이지 않고 총체적이며,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해간다. 상대적으로 힘이 없는 여성들만을 골라 살해한 용의자 강 씨는 연쇄살인이라는 범죄의 맥락(가해자-피해자 관계)에서는 상대적으로 강자였다. 그러나 그가 체포되어 형사절차로 들어온 이상, 그는 형벌권을 행사하는 국가에 대하여, 그리고 선정적 소재를 사냥하는 언론에 대하여 스스로를 보호하기 어려운 관계의 약자다. ‘가해자 인권’이 아니라, ‘피의자 인권’을 말해야 하는 이유다. 언론에 의한 얼굴 공개는 기본적으로 ‘언론권력과 개인’의 관계 문제이고, ‘국가 대 피의자’라는 맥락과 상황의 문제인 것이다. 피의자 강 씨의 인권을 이야기하는 것이, 살인범 강 씨에 대한 분노와 대립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의 인권을 말하면서도 충분히 그에 대해 분노할 수 있고, 분노해야 한다.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 상의 모습에는 여러 가지 버전이 있다.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여신상은 안대로 두 눈을 모두 가리고 있지만, 두 눈을 모두 뜨고 있는 모습도 있다. 또 한 쪽 눈만을 가린 모습이 풍자되기도 한다. 인권이라는 문제의식에서 여신상의 모습을 평가한다면, 한 쪽 눈만을 가린 모습이 상징적이다. 우리는 중첩되는 관계 속에서 인권의 관점이 필요한 권력관계를 찾아내야 하고, 그 관계 하에서 상대적 약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인권은 ‘외눈의 여신’과 같이 불편할 수 있지만, 그 불편함이야말로 우리를 성숙케 하는 힘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증오하고, 분노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인권을 어느 정도나 보장해야 하는가? 최대한 분노하고, 최대한 보장하자는 것이 나의 대답이다. 인권은 관계의 겹을 벗겨내서 권력관계를 드러내는 노력이다. 또 그 불편한 노력이 우리 사회의 소통을 풍성하게 할 것이라는 믿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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