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영의 세상의 창-철학부재의 시대, 황석영의 변절시비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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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의 세상의 창-철학부재의 시대, 황석영의 변절시비에 대하여
  • 법률저널
  • 승인 2009.05.22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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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시영 숭실대 법대학장/변호사/시인

 

소설가 황석영씨의 ‘MB 변론’ 논란이 뜨거운 사회적 이슈가 되는 것을 보면서, 철학과 실용의 상관관계를 생각한다. 황석영씨는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문인, 지식인으로 평가받아 왔다고들 한다. 과연 그가 얼마만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었는지, 얼마만큼 탁월한 문학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부족한 사람으로서 정확히 평가할 자신은 없지만, 그가 취해온 행동이 진보진영으로 분류되던 쪽 사람들이 늘상 해오던 행동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는 1989년 단독으로 월북하여 북한의 김일성 주석을 만났다. 통일을 지향해야 하는 민족의 이름을 내세우며 단독 월북을 감행한 것이다. 당연히 그의 치기 어린 행동으로 인하여 나라가 발칵 뒤집혔고, 국가보안법 위반자이니 처벌해야 한다는 여론과 용기 있는 그의 행동에 박수를 보낸다는 또 다른 여론이 충돌하며 세상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그의 방북은 결국 아무런 성과를 얻어내지 못한 하나의 어설픈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김일성 주석을 만난 후 그는 1990년에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강연 및 집필 등을 하다가 1993년에 귀국하여 7년형을 선고받았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중 김대중 정권 때 사면되어 석방되었다. 그러고 보면 그는 보수세력 집권 시절에 보안법 위반으로 구속이 되었다가 진보세력 집권 시절에 사면이 되었으니 진보진영쪽 사람으로 평가되는 것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기도 하다.   


그는 그 연장선상에서 지난 2007년 대통령선거에서 이명박 후보를 ‘거짓말쟁이 부패 지도자’로 규정하며 맹비난하면서 그가 대통령이 되면 나라가 망할 것처럼 맹박하였다. 그러던 그가 최근 이명박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방문길에 동행하였고, 그 동행중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적 생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서 “큰 틀에서 (현 정부에) 동참해가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함으로써 변절 시비에 휘말린 것이다.


그의 돌연한 변신에 한 방 먹었다고 생각하는 진보진영에서는 <MB 품에 안긴 황석영>이라거나, <하루아침에 뉴라이트 전향 선언>이라거나, <노벨평화상을 받고자 하는 개인 욕심 때문에 빚어진 정부 지원을 받기 위한 변절>이라는 등 거센 비난이 일고 있다. 반면에 보수진영에서는 정부정책을 발목잡기하는 것만이 진보진영이 할 행동이냐며, 뒤늦게나마 황석영씨가 제정신으로 돌아와 다행이라며 환영일색이다.


황석영씨의 별명 중 유명한 것으로 “황구라”가 있다. 소위 대화 중 뻥을 잘 친다는 말이다. 황구라라는 별명은 “그의 사상이 자유롭고 언어가 현란하며 위트가 넘친다.”는 것으로 좋게 해석될 수 있다. 그렇지만 나쁘게 해석하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마다 거짓말이고 진실성이 없으며, 주위 형편에 따라 언제든지 말 바꾸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만다. 


구라라는 말은 일본어 쿠라마스(晦ます: 속이다)에서 온 단어라고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은 “음흉하고 속이기 좋아하고 뒤로 뒤통수치는 사람”을 일컬어 “오나까가구라이おなかが?い”라고 하여 뱃속이 시꺼멓다라고 말하곤 한다. 즉 거짓말을 잘 하고 속이 음흉한 사람을 향해 구라이(くらい; 暗い)라고 평한다. 그 말이 우리나라에서 거짓말 잘하는 사람을 향해 “구라치지 마”라는 비속어로 사용되고 있다.


별명은 그 별명으로 불리는 사람을 잘 아는 이들이 붙여주는 것이다. 별명과 사람이 일치할 때 사람들은 맞아 하고 감탄하기도 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해 좋지 않은 이미지의 별명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명백한 것은 별명은 그 별명에 의해 지칭되는 사람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별명과 그 사람이 일치하지 않으면 그 별명은 지속되거나 유통되지 못하고 소멸하고 만다. 반면에 그 별명이 계속하여 사용된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 사람을 상징하는 별명에 공감하고 동일한 별명을 사용하는데 거리낌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황석영씨를 아는 많은 문인들은 사석에서 그를 공공연히 황구라라고 애칭한다. 그 속에 사랑이 있기도 하고 멸시가 있기도 한다. 황석영씨도 스스로 모 티브이 방송에 나와 자신의 별명이 황구라임을 떳떳이 밝힌 바 있기도 하다.


중국에서 모택동에 의해 시작된 문화대혁명의 후유증이 한창일 때 새로운 지도자 등소평은 “黑猫白描論”을 들고 나왔다. 등소평이 부르짖었던 것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되지 색깔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즉 당시까지 지나치게 사회주의사상으로 경도되어 생산성이 바닥이었던 중국을 개혁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자유자본주의사상의 접목이 절실하게 필요함을 역설하였던 것이다. 그의 흑묘백묘론은 침체되어 있던 중국을 일깨우기 시작했고, 그의 철학은 지금의 비약적 경제성장을 중국에 안겨주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사상은 바뀌기 마련이고, 바뀌어야 한다. 만일 사람의 생각이 바뀌지 않고 고정되어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 중의 비극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황석영씨가 스스로 밝힌 바대로 이명박 대통령과 수차례 대화를 나누었고, 그러는 과정에서 그의 진심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결과 이명박 대통령이 중도적 생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어 그를 도와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의 변신의 변을 전해 들으면서 문득 영화 Batman Begins의 대화 한 장면이 떠오르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주인공 배트맨 크리스찬 베일(브루스 웨인 분)이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주지 못한 안타까움으로 “It‘s not me. Inside I am more...(지금 네 눈에 보이는 한심한 모습은 내 진면목이 아냐. 내 내면은 더 깊다고...)”라고 말하자, 여주인공 레이첼 도스(케이티 홈즈 분)는 “It's not who you are underneath, but what you do that defines you(네 내면이 얼마나 깊은지는 모르겠지만 네 인격을 정의할 수 있는 건 지금 너의 행동일 뿐이야)”라고 냉정하게 말한다.


이명박 정부가 중도적 노선을 걷고 싶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현재 진행되고 있는 정부 정책을 보면 그의 노선을 중도노선이라고는 객관적으로 동의하기 어렵다. 교착상태를 가져와 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남북관계하며, 노동자를 적대시하는 듯한 노동정책하며, 진보진영인사들에 대한 싹쓸이물갈이인사하며, 친기업적 경제정책하며, 종합부동산세를 포함한 부동산정책하며, 과격시위가 있었다는 이유로 집회 자체를 불허하겠다는 반헌법적 정책하며 모든 정책이 극우적 정책으로 일관하고 있는 행동을 볼 때, 이를 중도적 노선을 걷고자 하는 생각을 가진 대통령의 정책이라고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문학인들을 더러 알고 있지만, 그들의 상당수에서 깊이 있는 철학적 고뇌를 읽어낸다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는 생각을 갖는다. 남다른 글재주를 가져 아름답고 현란하며 심오한 문장을 구사해내고 있을지 몰라도, 술좌석에서, 사석에서 나누는 대화 내용은 속물적이고, 이기적이고, 세속적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냥 개인의 일신영달이나 문학적 평가를 높게 받고 싶다는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을 뿐 세상을 관통하고자 하는 철학적 사색을 깊이 있게 하는 작가가 드문 세상, 인문학의 중심세력이 그럴진대 아수라장인 정치판에서 놀고 있는 정치가에게서 그런 철학을 기대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까 싶다.


사회주의국가인 중국에서 흑묘백묘론은 나름대로 하나의 철학이 될 수 있다. 경도된 사회주의 가치를 인간 중심의 자유민주주의체제로의 약간의 전환을 모색하는 철학적 사고의 변화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미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만끽해 버린 대한민국에서 “실용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고 이념의 가치를 후퇴시키는 정책으로의 전환”은 역사의 후퇴일 뿐이지 의도된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변신은 정체성의 혼란을 가져와 사회적 혼돈을 유발할 뿐이다.


황석영씨의 변절의 변이 정의롭다고 평가받기 위해서는 우선하여 이명박 정부가 “보여지는 행동을 통해 중도적 정부”임을 스스로 증명하여야 하고, 황석영씨 스스로 자신이 “황구라”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것을 거부하고 진실된 말만을 하겠다는 “별명으로부터의 절교”와 “자기 언어에 대한 진실성의 담보”를 천명하여야 할 것이다.


공동묘지에 가면 억울하게 죽지 않고 묻힌 이가 한 사람이라도 있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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