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쁜 기성법조인이 로스쿨 신입생에게 거는 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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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기성법조인이 로스쿨 신입생에게 거는 기대
  • 임정수
  • 승인 2009.04.10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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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수 변호사 법무법인 한승 · 전 서울고등법원 판사

 

작년 12월 어느 날 반가운 분으로부터 뜻밖의 전화를 받았다. 법원에 근무하시다가 모교 법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기신 분이 로스쿨 형법교재를 만들고 있으니 그 검토를 위한 워크숍에 토론자로 와 달라고 하시는 내용이었다. 능력 밖의 일이라 고사하다가 그 분의 권유와 필자의 호기심으로 결국 참석하겠노라고 약속하고 말았다.


교수님 2분의 강의 시연과 토론이 이루어진 워크숍 당일에는 그 대학 로스쿨 합격생들을 포함하여 다른 대학의 교수님들까지 많은 분들이 오셨다. 당장 2, 3개월 뒤에 로스쿨 개원을 앞둔 시점에서 필수적으로 갖추어야 할 교재에 대한 염려와 높은 관심을 잘 알 수 있었다. 시연을 하신 교수님들은 쉴 새 없는 질문으로 예비 입학생들을 긴장시키시거나 빔 프로젝터를 활용한 쟁점의 정리로 더욱 쉽게 이해가 가능하도록 하셨다. 어느 것이나 필자가 접했던 20년 전의 법과대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광경이었음은 물론이다.


더 낯설고 어쩌면 고무적인 것은 학생들의 반응이었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질문에 대해 당황한 기색이 없이 조리 있게 말을 이어가며 답변하였고 나름의 근거를 차분히 제시하는 모습을 보였다. 물론 미처 교재를 읽어보지 못해서 쟁점 파악이 어렵노라고 솔직하게 대답하는 학생도 있었다. 학생들이 보이는 논리성과 정직성에서 굳이 ‘장강의 뒷물’ 운운의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시대의 변화와 인적 자원의 진일보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나이를 몇 살이라도 더 먹고 세상을 살아가면 갈수록 지적인 측면에서는 기성의 지식을 축적하는 것보다 독립적으로 혹은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절실히 알게 된다. 또한 윤리적인 측면에서는 바로 정직한 자기반성이 훌륭한 인격의 토대임을 깨닫게 된다. 짧은 시간에 이 젊은 학생들은 이러한 모습을 혹은 적어도 그 단초를 잘 보여주었던 것이다.


하나의 실례로, 교수님이 형법 제13조의 범의 내지 고의에 관해 강의하실 때의 상황이었다(참고로 그 조문에는 “죄의 성립요소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 행위는 벌하지 아니 한다”라고 되어 있다). 교수님은 대법원 판례에서 피고인의 고의를 인정하면서 범죄에 대한 ‘인식’이 있었다고 판시한 것과 ‘인식 및 용인’이 있었다고 판시한 것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과연 ‘고의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질문하였다. 다른 답변들도 훌륭하였지만, 특히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는 답변은 ‘형법의 조문처럼 인식만 있어도 고의는 인정되지만 그 외에 용인이 인정되는 사례들에서는 법원이 굳이 용인이라는 표현까지 덧붙인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사실 위 답변은 만약 객관식 시험이었다면 ‘용인’을 고의의 필수적 요소라고 보는 기존의 주류적 견해에 의할 때 오답의 지문으로 제시되었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 이러한 답변이 그 때는 강의 참석자 모두에게 대단히 좋은 지적 자극을 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필자는 로스쿨의 강의실에서는 이처럼 통념적 견해의 근원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그런 의문이 제기되어야 로스쿨의 설립취지가 제대로 구현되고 존재의의가  발현될 것이라고 믿는다.


사실 필자는 변호사로서 준비서면을 작성하거나 판사로서 재판에 필요한 법률 검토를 할 때에 종전의 유사 사례를 발견하면 마치 문제에 대한 정답을 얻은 것인 양 만족하여 더 이상 연구나 비판적 분석을 진행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이 기존의 해답을 맹신하고 묵수하는 자세가 바로 급변하고 복잡한 현대사회에 적합한 창의적 사고를 갖춘 법조인을 배출하지 못하는 장애요인이 되었고, 그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법조인 양성방법에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한 것일 터이다.


이처럼 기성법조인 중에 특히 나쁜 물이 든 필자는 로스쿨 신입생들이 무엇보다도 기존의 견해와 해답에 안주하지 않고 그 근저를 탐구하고 천착해 줄 것을 기대한다. 법조인이 되어 법률지식의 바다에 전혀 새로운 자신만의 아이디어 하나를 더하는 것은 시인이 불후의 명구(名句) 하나를 남기는 것 못지않게 가치가 있다고 믿어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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